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7)화 (17/143)

17화.

* * *

“하아아아.”

“리아, 땅 꺼지겠다.”

“차라리 꺼졌으면 좋겠다.”

나는 엉망이 된 온실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유리창은 깨지고, 화분은 부서지고, 식물은 죄다 말라비틀어지고…….

딜리언의 폭주는 재해나 다름없었고,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온실은 그 여파를 고스란히 받고 말았다.

결과는 보다시피, 엉망진창.

온전한 녀석이 없었다.

“내 애기들……. 엄마가 미안해.”

흑, 나는 처참한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키운 녀석들인데. 신성력을 먹이고 먹이며 공들여서 키웠건만 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나는 킁, 코를 훌쩍였다.

“아, 춥다.”

불어온 찬바람에 몸이 떨렸다.

“리아 씨, 추우세요?”

귀신같이 내 상태를 알아챈 딜리언이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며 다가왔다.

“이거 두르고 계세요.”

딜리언이 내 목에 목도리를 칭칭 휘감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서툰 손길이었다.

‘미라도 아니고 이게 뭐람.’

목도리에 파묻혀 눈만 빼꼼 내밀자 딜리언이 황급히 입을 가렸다.

“웃겨요?”

네가 이렇게 감았으면서 웃음이 나와?

찌릿, 노려보자 딜리언이 고개를 숙인 채 손을 흔들었다.

“큼, 아닙니다.”

“다시 가져가세요. 딜리언 씨 목도리잖아요.”

“저희 사이에 네 거, 내 거가 어딨습니까.”

“네? 저희 사이가 뭐길래…….”

내가 알기론 치료사와 환자, 집주인과 객식구인데?

딜리언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가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분명 잘생긴 얼굴인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손끝에 작은 가시가 박힌 듯 신경이 거슬렸다.

“리아? 왜 그래?”

뚱한 표정으로 딜리언을 노려보고 있자 나단이 다가와 물었다.

“나만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그게 뭔데?”

“몰라, 엄청, 엄청 불길한 기분이야.”

세상이 나만 따돌리는 기분이었다.

쉬엄쉬엄 온실을 정리하는데 딜리언이 대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그래요? 누가 있어요?”

“네, 누가 옵니다.”

젠장,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놈들이 쉽게 포기할 리가 없지.

나는 딜리언이 들고 있던 삽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딜리언에게 신신당부했다.

“여기에 가만히 있어요, 알았죠?”

“혼자는 위험합니다.”

“딜리언 씨랑 둘이 있는 게 더 위험해요.”

만약, 찾아온 사람이 마을 사람이라면 딜리언이 여기에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꼴이었다.

“이상하다 싶으면 소리 지를 테니까 대기하고 있으세요.”

불만 가득한 그의 얼굴이 시끄럽게 항의했지만 나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쩌라고, 집 주인은 난데.’

삽을 질질 끌고 대문으로 향하자 기사로 보이는 사내와 가녀린 여인이 내게 인사했다.

“실례합니다.”

“무슨 일이세요?”

“저, 사람을 찾고 있는데-.”

여자가 품을 뒤적거렸다.

‘저기서 갑자기 무기가 튀어나온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나는 삽 손잡이를 틀어쥐며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혹, 이분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녀가 꺼낸 건 딜리언의 초상화였다.

시도 때도 없이 눈웃음을 치는 지금과는 달리,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차가운 얼굴이었다.

‘저 얼굴이 본 모습일 텐데, 되게 낯설다.’

유심히 초상화를 들여다보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폭설 때문에 외출을 삼가서 모르겠네요.”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럼, 근처에 다른 인가가 있습니까?”

“저기 위로 가면 빈 오두막이 하나 있긴 한데…….”

두 사람이 눈을 맞췄다. 그리로 갈 계획인 듯 보였다.

“그럼 이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집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습니까?”

박살이 난 집을 본 남자의 눈에 작은 의심이 불씨처럼 피어올랐다.

“……어젯밤, 마물에게 습격을 당해서요. 두 분도 조심하세요. 저 숲, 마물이 들끓는 곳이에요.”

“……많이 위험한 마물인가요?”

“뭐, 걸리면 죽는다고 봐야죠. 특히나 무기가 없거나 다친 사람은 마물 밥이에요. 밥.”

모가지 댕강댕강.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두 사람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들에게서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제 온 놈들이랑 느낌이 다른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놈들이랑 결이 다르네요.”

“악! 깜짝아!”

불쑥 끼어든 얼굴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딜리언 씨?”

딜리언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귀를 문질렀다.

“귀 찢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제가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리아 씨가 걱정되는걸요.”

뭐지, 저 담백한 듯 달콤한 목소리는.

나는 처음 듣는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리아 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합니까.”

무슨 일은 지금 생길 것 같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딜리언의 등을 마구 때렸다.

“제 걱정을 왜 해요! 당신 걱정이나 하세요.”

“제 걱정은 리아 씨가 해주면 되죠.”

“무슨 헛소리예요. 얼른 가요.”

나는 딜리언의 등을 꾹 밀었다. 분명 밀고 있는데,

‘뭐야, 땅에 박히기라도 한 거야?’

있는 힘껏 밀어도 딜리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뒤를 힐끔거렸다.

방금 떠난 두 사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행히 말소리는 못 들은 듯했지만 뒤를 돌면 바로 딜리언이 보일 위치였다.

그들이 금방이라도 뒤를 돌아볼 것 같은 불안감에 심장이 요동쳤다.

“알았으니까 얼른!”

“좋네요, 리아 씨 걱정도 받고.”

진짜, 이 인간이!

나는 몸통박치기를 하다시피 딜리언의 등을 밀어 넣었다.

그래서 미처 보지 못했다.

새하얀 눈밭 위를 일정한 거리로 이어지던 두 쌍의 발자국이 뚝 끊긴 것을.

그곳엔 앞으로 나아간 흔적도, 돌아간 흔적도 없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밤.

딜리언은 창밖에서 느껴지는 집요한 시선에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좀 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이보단 덜 노골적이겠군.”

이렇게 인사를 원하는데 해줘야겠지.

거칠게 뒷문을 열어젖힌 딜리언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존재를 불렀다.

“나와.”

낮게 가라앉은 달리언의 부름에 남녀 한 쌍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익숙한 낯에 딜리언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낮에 봤던 그 녀석들이군.’

하나는 기사, 나머지 하나는 마법사인가?

딜리언의 신경은 다시 사내에게 향했다.

허리춤에 걸린 검, 다부진 몸, 각이 잡힌 자세,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성가신 놈이군.’

딜리언은 사내의 허리춤에 찬 검을 보다 제 손에 들린 쇠지레를 슬쩍 내려다봤다.

쇠지레는 나쁘지 않은 무기다. 한번 휘두르면 뼈는 물론이고 몸에 예쁘장한 구멍을 낼 수 있는 훌륭한 근접 무기니까.

단지 그는, 모양 빠지게 휘두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괜찮아 보이는 검이군. 저놈한테서 뺏으면 딱 좋겠어.’

지난번 습격 때 검을 주웠으나, 폭주 이후 전부 부숴 먹은 탓에 무기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우선 머리부터 후려쳐볼까.’

누가 악역 아니랄까 봐, 아주 상냥한 방법으로 무기를 강탈할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상대를 예쁘게 조각낼 생각으로 다가선 그때,

사내가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딜리언을 놀라게 했다.

“엘드먼 카틀란. 전하를 뵙습니다.”

“카나에 힐. 전하를 뵙습니다.”

부복한 채 딜리언을 올려다보는 두 쌍의 눈엔 신뢰가 가득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 아니, 건강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네, 너무 좋으세요…….”

달리언의 충직한 기사, 엘드먼은 차마 그의 얼굴이 상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딜리언의 충직한 마법사, 카나에는 그 말에 동의했다.

반지르르한 얼굴이 누가 봐도 잘 먹고, 잘 자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얼굴이었다.

‘가문에 있을 때보다 좋아 보이시는데…….’

역시, 전하의 스트레스는 전부 원로 때문이었어!

충직한 기사, 엘드먼은 자기합리화를 마쳤다.

좋아 보이는 딜리언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보던 엘드먼은 이내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저희가 부족해서 생긴 일입니다. 공격당할 것을 예상 못 한 것도 아닌데 그리 쉽게 당하다니……. 전부 저희 잘못입니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엘드먼은 머리 숙여 잘못을 고했다.

당장에라도 바닥에 머리를 박을 수 있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꽃을 찾았다고 방심한 게 문제였지.’

이 추운 날, 최북단 빌헬름까지 찾아온 이유는 용의 심장이라 불리는 꽃 때문이었다.

오로지 한겨울에만 피는, 심장처럼 붉은 꽃. 용의 심장.

어떤 병이든 씻은 듯 낫게 해주는 전설의 꽃이었다.

그리고 이 꽃이 최근 빌헬름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황태자는 딜리언에게 충성의 증표로 진상하라 일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사사건건 자신을 견제하려 드는 황태자가 지겨웠던 딜리언은 직접 소수정예를 꾸려 꽃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앞으로 보름 정도의 시간이 남았으니, 지금 돌아가면 딱 맞을 듯싶습니다.”

“전하, 꽃은 제가 보존 마법을 걸어 안전한 곳에 보관해뒀습니다. 염려 마세요.”

당시를 떠올린 카나에가 땅에 이마를 박았다.

꽃을 찾았다는 기쁨을 만끽할 시간도 주지 않는 치사함, 쪽수로 밀어붙이는 야비한 전투,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

그리고 약초가 아닌 딜리언을 노린 암살자.

갑작스러운 습격에 딜리언은 크게 다치고 말았다.

‘이건 전부 내 잘못이야.’

좀 더 견고한 방어벽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카나에는 다친 딜리언을 보호하기 위해, 다급히 이동마법을 사용했다.

목표 지점은 그들이 묵었던 여관.

우선은, 상처 입은 딜리언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분명, 마법으로 그가 이동한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힘겨운 전투를 마치고 여관에 도착했을 때, 딜리언은 그곳에 없었다.

여관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 쏟아지기 시작한 폭설 때문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눈이 그치고 간신히 이동이 가능해지자 비교적 부상이 덜했던 두 사람은 마을 중심부를 돌아다니며 딜리언을 수소문했다.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들과 비슷한 시점에 딜리언을 찾기 시작한 적대 세력 때문에 대놓고 찾아다닐 수도 없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그를 찾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무려, 보름.

엘드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주인이 여기서 목을 치라고 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머리 위에선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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