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2)화 (12/143)

12화.

* * *

쉬익-!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눈밭 사이를 뛰어다니는 토끼의 목을 꿰뚫었다.

토끼가 무너지는 모습을 본 나는 달려가 화살을 뽑았다. 그러자 나단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잘했다. 한 번에 숨을 끊었구나. 훌륭한 솜씨야.”

“쉰 지 꽤 돼서 실수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야.”

나단이 내게 가르친 건 신성력을 다루는 법만이 아니었다.

“조금 쉬었다고 실수하면 안 되지.”

나단은 내게 활 쏘는 법을 가르쳤다. 아주 혹독하게.

제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나단의 뜻대로 나는 죽어라 그의 밑에서 굴렀고, 그 결과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추게 됐다.

“손에 굳은살을 보고 무인일 거라 짐작은 했는데 활을 이리 잘 쓰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잡은 토끼를 자루에 넣으며 딜리언이 감탄했다.

“당연히 우리 리아 실력은 최고지.”

나단이 가슴을 내밀며 콧김을 뿜어댔다. 마치 자기가 칭찬이라도 받은 듯 으스댔다.

“나쁘지 않은 실력이긴 하죠.”

겸손이 뭐야? 먹는 거야? 나는 나단과 함께 우쭐거렸다.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주 훌륭한 솜씨였습니다.”

딜리언의 칭찬에 씰룩이는 안면을 감추지 못한 나단은 아예 딜리언의 어깨에 앉아 내 자랑을 했다.

‘여우 한 마리에 토끼 두 마리. 괜찮은 수확이야.’

그럼 이제 일어날까. 슬슬 배도 고프고.

“그럼 점심 먹고 조금만 더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가죠.”

자리에서 일어나자 몸이 휘청거렸다. 헛디딘 발이 눈 속으로 푹 빠졌다.

늪도 아니고 발이 왜 이렇게 푹푹 빠지는지.

눈밭에 끼인 발을 뽑아내려 낑낑거리던 그때 불쑥, 눈앞에 커다란 손이 나타났다.

“잡아요.”

나는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았다. 강한 힘이 나를 끌어당겼다.

무 뽑듯 쑥 뽑힌 나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우리는 얼떨결에 손을 잡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딜리언 씨, 손 좀…….”

도와준 건 고마운데 언제까지 잡고 있을 작정이야?

손바닥에 닿은 온기가 어색해 손을 꼼지락거리자 딜리언이 맞잡은 손을 빤히 바라봤다.

“저, 딜리언 씨?”

“그냥 잡고 가죠. 또 빠질 것 같은데.”

“설마요. 제가 그렇게 허술한, 앗!”

말하기 무섭게 앞으로 기운 몸을 딜리언이 안정적으로 받아냈다.

귀 옆에서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설마가 사람을 잡았네요.”

귓바퀴가 간지러웠다. 귀를 벅벅 문지르며 몸을 물린 나는 목도리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등껍질 속에 숨는 거북이처럼.

“잡고 가는 겁니다.”

“알았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놈 저거, 개수작을.”

나단이 매서운 눈으로 딜리언을 노려보았다.

“개수작이라니, 그런 수준 낮은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정말 수호신이 맞나?”

“흥, 나는 리아 수호신이지 네놈 수호신이 아니다.”

“너 같은 건 줘도 안 갖는다.”

“나도 너 같은 건 줘도 안 갖, 아니! 갖다 버릴 거다!”

애들도 아니고. 어떻게 하루도 빠짐없이 싸우는 거지?

이제는 익숙해진 유치한 싸움을 배경음악 삼으며 앞으로 나아가던 나는 곧이어 들려온 딜리언의 말에 멈칫했다.

“신수가 이렇게 위엄이 없다니, 제국도 망했군.”

“……신수라니요. 나단은 영물이에요.”

딜리언이 내 눈 밑을 부드럽게 툭 건드렸다.

“리아 씨, 거짓말할 때면 눈 밑 떨리는 거 아세요?”

나도 모르게 눈 밑을 매만지던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렸다.

젠장, 들켰다. 빼도 박도 못해.

나단이 딜리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성서에 네 얘기가 나오던데.”

예상치 못한 출처에 나는 당황했다.

“성서요?”

딜리언이 성서를 읽었다고? 물론 내가 준 책 사이에 성서가 있긴 하지만.

성서와 딜리언이라니, 원작에선 상상도 못 할 조합이었다.

딜리언은 신전을 혐오한다.

어린 시절, 시나이즈 공작 부부가 그에게 저지른 일 때문이었다.

공작 부부는 명망 높은 시나이즈 가문에서 저주받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시나이즈의 아이는 언제나 완전무결해야 했으며, 완벽한 주인이 돼야 했으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하자가 생긴 셈이었다.

부부는 어떻게든 딜리언을 고쳐보겠다며 그를 신전으로 데려갔으나 결과는 실패.

이유가 정확히 나오진 않으나,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표현됐다.

그 일로 뿌리 깊이 박힌 혐오에 딜리언은 신성력을 이용한 치료를 거부했으며, 신전 근처에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로하임 제국이 엄연한 신성국가임에도 말이다.

신전이 싫으니 신관을 싫어했고, 당연히 성녀인 아이나도 싫어했다.

‘아마 작품 내에서 유일했지? 아이나를 싫어한 인물은.’

만인의 사랑을 받는 아이나지만, 딜리언에게만큼은 그 사랑스러움이 통하지 않았다.

아이나가 딜리언의 저주를 풀어주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 텐데.

딜리언이 저주에 잡아먹혀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도 없을 테고, 그럼 아이나도 죽지 않았을 거다.

‘딜리언 인생도 참 기구해. 저주 때문에 평생을 괴롭게 살다가 죽어버린 거니까.’

그의 최후를 떠올리자 마음이 짠했다.

하지만 짠한 건 짠한 거고, 이 일을 어떡하지.

“큼, 비밀로 해주실 거죠?”

“비밀로 하면, 리아 씨는 제게 뭘 해주실 건데요?”

와, 역시 악당. 어디 빼먹을 게 없어서 벼룩의 간을 빼 먹어.

“토끼 뒷다리 두 개를 전부 다 딜리언 씨한테 드릴게요.”

옜다. 큰맘 먹고 두 다리를 하사하자 딜리언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우리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빈약한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샌드위치 양이 많지 않은 터라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몇 개 있지도 않은 짐을 정리하던 그때, 딜리언의 손이 불쑥 내 뺨을 쓰다듬었다.

“무, 무슨?”

당황한 내가 몸을 물리고 뺨을 더듬자 그가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거.”

그의 검지엔 하얀 빵가루가 묻어있었다.

“나중에 먹으려고 저장해둔 겁니까? 다람쥐처럼?”

“그럴 리 없잖아요!”

나는 딜리언의 손목을 붙잡아 빵가루를 탈탈 털었다.

“무슨 착각을 했길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을까요.”

“허, 열 받아서 그런 건데요?”

“흐음, 그럽니까?”

흐음은 뭐가 흐음이야. 의미심장한 소리에 자꾸 얼굴에 열이 올랐다.

“생각해보니까 저만 일하는 건 억울해요. 딜리언 씨가 정리해요. 그리고 장작이나 패고 계시죠. 밥값, 확실히 해야죠.”

으름장을 놓자 딜리언이 집에서 챙겨온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마님과 나무꾼 컨셉입니까?”

“네? 컨셉이요?”

“전엔 하녀와 왕, 선생님과 제자. 이번엔 마님과 나무꾼 아닙니까?”

아니,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되게 쓸데없는 걸 기억하고 있네.

“이번엔 왜 마님이에요?”

나는 어디로 봐도 마님은 아닌데.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읽었거든요.”

“책이요? 무슨 책을 말씀하시는 건지…….”

싸늘하다. 무언가 터질 것만 같은 이 불길함은 뭘까.

“마님은 왜 나무꾼에게 고기반찬을 줬을까?”

“아악!”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아주 격정적인…….”

“아아악!!”

나는 딜리언이 입을 열 때마다 비명을 질러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빨간 딱지가 붙은 소설이었으니까!

“그거 제 거 아니에요! 제 친구 거란 말이에요!”

“아아, 그러시군요.”

젠장, 안 믿잖아. 전혀 안 듣고 있다고!

“진짜 제 거 아니에요!”

“그래서 마님, 오늘 저녁은 고기반찬일까요? 아까 약조한 토끼 뒷다리?”

“닥쳐요! 그 입 제발 다물란 말이에요!”

방방 뛰는 내 모습이 재밌는지 딜리언의 광대는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이번 역할은 마님과 나무꾼이 아니라 사냥꾼과 나무꾼이거든요! 사냥꾼은 가서 사냥을 하고 올 테니 열심히 장작이나 패고 계세요!”

“리아!”

나단의 부름에도 앞만 보고 달려나간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죽자. 죽어.’

너무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메이, 가만 안 둬.”

메이미 알트란. 망할 내 친구이자 이웃사촌.

자기 집엔 이제 빨간책을 보관할 곳이 없다며 내 집에 옮겨둔 장본인!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녀는 현재는 의뢰 때문에 빌헬름을 떠나 있었다.

고로, 메이가 돌아오기 전까진 나는 오해를 벗어날 기회가 없다는 소리였다.

‘미치겠네. 어떡해!’

사냥은커녕, 얼굴을 식히느라 진이 다 빠진 나는 터덜터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쾅, 쾅. 도끼질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럴수록 내 심장도 함께 쿵쿵거렸다.

아, 가기 싫다. 메이 때문에 이게 무슨 개쪽이야.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발치에 가득 쌓인 장작이 보였다.

‘저렇게 많이는 못 들고 가는데…….’

커어어어.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단 코골이인가?’

나뭇가지에 앉아 드렁드렁 코를 골고 있는 나단을 바라봤지만, 그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낮고, 꺼림칙한 소리였다.

마치, 가래가 들끓는 소리처럼.

“딜……!”

그때였다. 나무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침을 질질 흘려대며 딜리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재빨리 화살을 걸어, 활시위를 당겼다.

쉬익, 퍽!

날아간 화살촉이 정확히 마물의 미간에 꽂힌 동시에, 마물의 머리가 터졌다.

“뭐야.”

딜리언이 도끼로 마물의 머리를 터트려 버린 것이었다.

엄청난 반사신경이었다. 도끼질 소리 때문에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마물이에요.”

“이 숲에 마물도 있습니까?”

“많죠. 너무 많아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어요.”

저 괴상망측하게 생긴 마물은 황소개구리 같은 놈들이었다. 닥치는 대로 동물을 잡아먹어 먹이사슬을 파괴하는 주범이었다.

‘여기까지 내려올 줄이야.’

나는 활을 어깨에 메고 딜리언이 싸둔 짐을 들었다.

“장작은 됐고, 이만 내려가요. 날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어요.”

구름의 이동을 보아 또 한바탕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잠깐만요. 이 숲에 마물이 있다면 리아 씨는 왜 이곳에 사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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