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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0)화 (10/143)

10화.

“……너 정말 진심이구나.”

“난 언제나 진심이야.”

살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내 진심이 그에게 닿은 것일까. 심각하게 일그러져있던 그의 입매가 서서히 무너지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난 오늘 아무것도 못 본 거다. 대신, 저거 하나 서비스로 넣어줘.”

“날강도가 따로 없네.”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군말 없이 바구니에 약초를 담았다.

“아, 참. 아까 부엉이가 말을 하던데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내가 건넨 약초 바구니를 조심스레 안아 든 클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애써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그 결과, 한껏 비웃는 표정이 만들어졌다.

“부엉이가 어떻게 말을 해.”

“하긴, 부엉이가 말이라니. 귀까지 얼었나 보네. 나 간다.”

“조심해서 가.”

클로드가 떠났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피곤해.’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숨어서 듣는 건 나쁜 짓이에요. 딜리언 씨.”

“저자가 혹시나 이상한 짓을 할까 봐 감시했던 겁니다.”

딜리언은 훔쳐본 사실을 당당하게 인정했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던 거였다.

‘그걸 왜 댁이 감시를……?’

딜리언이 내 옆에 풀썩 앉았다.

“왜 저를 숨겨 주셨습니까.”

“……들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바로 말할 줄은 몰랐네요.”

“궁금한 건 바로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의외라고 여기나 봐요?”

“뭐, 조금은.”

딜리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바로 팔아넘길 줄 알았거든요.”

“팔아……. 사람을 뭐로 보는 거예요!”

무, 물론 그런 마음을 잠깐 먹긴 했지만! 그 정도로 양심 없진 않다고!

“언제든 절 내보내려고 하시잖습니까.”

하긴, 매일 창밖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는데 모를 리가.

속마음을 들켜 민망해진 나는 괜히 잡초를 뜯으며 딜리언의 시선을 피했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에요.”

“…….”

“그자들이 딜리언 씨를 아프게 한 사람들일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정말 그들이 딜리언을 찾는 거라면 숨기는 게 맞았다.

기억을 잃기 전의, 피도 눈물도 없는 딜리언이라면 모를까.

아무것도 모르는 현재의 딜리언은 탈탈 털리다 못해 뼈까지 발려버릴 수도 있다.

기억을 잃은 딜리언은 소시민 1에 불과했으니까.

‘혹시라도, 정말 만약에 딜리언이 죽어버리면?’

딜리언이 악당이긴 하나, 나 때문에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원작이 틀어지는 것도 싫었고.

‘이러나저러나 관여하고 싶지 않단 말이지.’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있으면 들킬 일은 없을 거예요.”

딜리언의 존재를 들키면 곤란해지는 건 내 쪽도 마찬가지.

‘눈이 그치면 들키지 않고 무사히 내 집에서 내보낼 방법을 찾아야겠어.’

다시 한번 그를 내보낼 의지를 다지던 그때, 딜리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아 씨는 무섭지 않습니까?”

“네? 뭐가요?”

“제가 나쁜 사람일 수도 있잖습니까.”

“…….”

“뭘 믿고, 저를 곁에 두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딜리언은 자기가 극악무도한 범죄자였을 수도 있다 착각하는 듯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시나이즈 공작가의 하나뿐인 주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누가 알면 웃음을 터트릴 게 분명했다.

그의 정체를 아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기억을 잃은 딜리언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초조함이 떠올랐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처음엔 그의 손에 죽는 줄 알고 덜덜 떨었으니까.

하지만,

“과거의 딜리언 씨가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제가 아는 딜리언 씨는 좋은 분이니까 괜찮아요.”

기억을 잃은 딜리언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더는 무섭지도 않았다.

적어도,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

“만약 딜리언 씨가 저한테 나쁜 짓을 하면.”

나는 옆에 있는 모종삽을 꽈악 쥐었다. 딜리언의 시선이 핏줄이 돋은 내 손으로 향했다.

딜리언을 향해 산뜻하게 미소 짓자 그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말 안 해도 알겠습니다.”

덩달아 웃음을 터트린 나는 모종삽을 쥔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온실 한번 둘러보고 갈게요.”

나는 물 조리개를 챙겨 온실 깊숙이 들어갔다.

* * *

리아는 먼저 들어가라 일렀지만, 딜리언은 기다리기로 했다.

그에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조용한 온실은 최적의 장소였다.

‘시끄러운 부엉이도 없고.’

풀벌레가 자그맣게 지저귀었다.

밖은 시리디시린 겨울이건만, 이곳은 포근한 봄이다.

딜리언은 이른 봄을 만끽하며 생각에 잠겼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왜?’였다.

리아는 왜, 자신을 도왔나. 도대체 왜 저를 지켜주는가.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 해도 눈치까지 잃은 건 아니다.

리아가 첫 만남부터 어떻게든 자신을 내보내려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루, 이틀, 사흘…….

리아가 창밖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얼굴엔 근심이 떠올랐다.

자신과 함께 지내는 게 그녀에겐 퍽 곤란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 기회가 온다면, 가차 없이 버릴 거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클로드가 그의 정체를 의심하며 리아를 설득하던 그때, 딜리언은 리아가 자신을 고발하리라 여겼다.

짧은 순간이지만 앞날을 그려본 딜리언은 입막음을 위해 클로드를 죽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다음엔 리아를…….

아니, 리아는 죽일 수 없다.

어째서?

리아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자신에게 멈칫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때, 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드. 모른 척해줘.’

‘클로드, 넌 오늘 나 말고 아무도 못 본 거야. 그렇지?’

의외였다. 그녀가 저를 감싸줄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그자들이 딜리언 씨를 아프게 한 사람들일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아는 딜리언 씨는 좋은 분이니까 괜찮아요.’

저를 믿냐는 물음에 리아는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했다.

올곧은 그 눈을 떠올리자 가슴이 술렁거렸다.

마치, 배 속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상한 여자.’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는 그녀는 종잡을 수 없는 태도로 그를 헷갈리게 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그녀와 함께 지내고 있지만, 신뢰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지만…….

믿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딜리언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나단이 말한 그 사랑도, 그는 믿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서라기보단, 태생이 그런 듯했다.

무엇보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리아의 묘한 태도가 그의 신경을 긁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고? 입만 열면 거짓이지.’

딜리언은 더는 리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얼굴도 몰랐던 생판 남을 호의로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아무리 착한 호구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경계심이 극도로 높은 리아라면 더더욱.

리아는 다정하지만, 거짓투성이다. 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이 바로 리아 델리스였다.

과연 그녀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것일까.

그녀의 거짓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리아를 향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딜리언 씨? 안 가고 계셨네요.”

회상 속에 존재하던 목소리가 현실이 되었다.

딜리언은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온 리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속을 파헤치면, 뭐라도 나올까 싶어.

집요한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아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꽃 구경하고 계셨어요?”

딜리언은 그제야 제 앞에 있는 꽃의 존재를 인지했다.

“무슨 꽃인지 알아요?”

“히아신스.”

식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딜리언이지만, 이 꽃만큼은 알았다.

히아신스는 건국왕 리산드로 로하임이 자신의 연인에게 청혼할 때 준 꽃으로 유명했다.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

딜리언은 제 입으로 뱉고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운 미간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글쎄요, 저는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믿는 쪽이지만.”

그래도. 작게 읊조린 리아가 덧붙였다.

“낭만적이잖아요. 그래서 가능하다고 믿으려고요.”

팍팍한 인생에 로맨스까지 없으면 목 막힌다고.

어깨를 으쓱인 리아는 히아신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거 알아요? 히아신스는 사랑의 꽃이기 전에 승리의 꽃이에요.”

리산드로가 정적을 제거하고, 왕좌에 오른 날 피어났다고 하여, 승리의 꽃이라고도 불렸다.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에 묻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이야기지만.

조심스럽게 꽃을 꺾어 딜리언에게 건넸다.

“다 잘될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딜리언은 리아가 내민 꽃을 받는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럼, 제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옆에 있어 주세요.”

그건, 다분히 충동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뱉고 나니 함께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리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힘들 것 같아요.”

나는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돌려보낼 건데? 아니면 내가 도망치거나.

“제가 기댈 곳이라곤 리아 씨뿐인데도요.”

“딜리언 씨 곁에 평생 저 혼자일 리는 없잖아요. 다른 분들도 생기겠죠.”

“평생일 수도 있죠. 전 도망자 신세니까요.”

이건 흡사 창과 방패의 싸움.

찌릿, 딜리언과 리아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쉽게 잡히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리아는 강적이었다.

하지만 리아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잠들어있던 그의 포식자 본능이 깨어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해야겠다는 이상한 오기와 함께.

“이리도, 자꾸 도망치려 하시니, 쫓아가고 싶네요.”

도망가지 못하게. 딜리언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악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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