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 *
그날 이후, 이따금 나를 바라보는 딜리언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은 집요했으나, 그는 바라보기만 할 뿐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건 마치, 탐색전과 같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내 속을 파헤치는 시선에 피가 바짝 말랐다.
“리아 씨, 향수는 안 쓴다고 하셨죠.”
한 입 크게 밥을 뜨던 나는 딜리언의 물음에 숟가락을 내렸다.
“네. 향수를 쓸 만큼 여유롭진 않아서요.”
“그럼 입욕제를 쓰시나요.”
밥 먹다 말고 웬 입욕제 타령?
“저는 먹고살기 바쁜 평범한 소시민이라 입욕제 같은 사치품은 꿈도 못 꾼답니다.”
그러니까 그냥 입 다물고 밥 먹으면 안 되겠냐, 이 자식아.
“그럼 온실에서 밴 향기인가.”
어제부터 왜 이렇게 향기에 집착하는 거야?
“…….”
또다, 또 저 시선이야. 나를 파헤치는 눈에 밥이 얹힐 것 같았다.
나는 딜리언의 관심이 불편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저러다 딜리언이 나에 대해서 뭔가를 알아내기라도 한다면…….
‘……그만 생각하자.’
애써 상념을 털어낸 나는 식사에 집중했다. 전투적으로 밥을 먹는 내 모습에 무언의 압박을 느낀 건지 딜리언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힐끔, 딜리언의 방을 훔쳐봤다.
‘아직까진 괜찮아.’
딜리언의 방에 가져다 둔 백소화는 여전히 맑고 깨끗했다.
하지만 나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조만간 딜리언이 또 폭주할 거라는 나단의 말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갑자기 터지진 않는다고 했지만 불안하단 말이지.’
나는 딜리언이 만들어준 오므라이스를 한 입 크게 뜬 순간,
쾅, 쾅, 쾅!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나는 깜짝 놀라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옷에 묻은 케첩과 밥풀에 눈이 찌푸려졌다.
“아침부터 누가 저렇게 문을 두드리는 거야.”
꿍얼거리며 일어난 내 앞을 딜리언이 막아섰다.
“왜 그러세요?”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데, 리아 씨의 집에 찾아오는 게 이상합니다.”
듣고 보니 그러네? 쏟아지는 폭설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힘든데 인가도 아닌, 숲 근처에 있는 내 집으로 누가 온단 말인가.
나는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가 프라이팬을 챙긴 후, 구석을 더듬었다.
손끝에 단단하고 차가운 쇠막대가 걸렸다.
“이게 뭡니까?”
“쇠지레요. 훌륭한 호신도구죠.”
나는 쇠지레 꺼내 딜리언에게 넘겨주었다.
“나쁜 놈이면 이걸로 머리를 확! 알죠?”
“……보기보다 과격하십니다?”
“칭찬 고마워요.”
뻔뻔한 내 태도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딜리언이 쇠지레를 움켜쥐었다.
나는 딜리언의 등에 붙어서 문을 노려봤다.
달칵, 딜리언이 문을 열었다.
동시에 하얀 생명체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쓰러졌다.
“이아, 이아아!”
“헉!”
웬 눈뭉치가 꾸물거리며 집으로 기어들어 왔다.
“저게 뭐냐! 마물?! 설인인 게냐!”
“마물은 못 들어오잖아! 설인! 설인인가 봐! 딜리언 씨, 얼른 그걸로 내리쳐요! 헤드샷, 헤드샷!”
뚝배기를 깨라며 오두방정을 떠는 나와 나단과 달리 딜리언은 무섭도록 침착했다.
딜리언이 지레 끝으로 설인의 턱을 들었다.
“진정하세요, 사람입니다.”
“사람?”
“ㄹ-이아!”
자세히 들어보니, 괴상한 언어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클로드?”
“리, 아!”
마침내 정상적인 발음을 해낸 설인이 푸욱 늘어졌다.
“아는 사람입니까.”
“……네, 사업 파트너요.”
그렇다. 설인의 정체는 약초상, 클로드였다.
* * *
“하아아, 이제 살겠다.”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머금은 클로드가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아직 추위가 가신 게 아닌지 새파란 입술이 덜덜 떨렸다.
나는 금세 바닥을 보이는 잔에 차를 채우며 물었다.
“클로드, 날씨가 이런데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내가 네 집에 찾아올 일은 하나뿐이지. 뭐겠어.”
무식하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맨몸으로 눈보라를 뚫고 올 생각을 하다니.
이 녀석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이번엔 뭔데?”
“하늘 산삼초, 있지?”
“있기야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그럴 줄 알았다며 클로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한테 팔아. 내가 시세의 1.5배로 쳐줄게.”
“두 배.”
눈보라를 뚫고 나를 찾아올 정도라는 건, 내가 키운 약초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
나는 검지와 중지를 들며 협상을 시도했다.
“……그래. 그래야 리아 델리스지. 좋아. 두 배!”
예상대로였다.
‘진짜 거물을 물었나 보네.’
거래를 마친 나는 굽혔던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벽에 기대 이쪽을 바라보는 딜리언에게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꾹 눌렀다.
“그만 노려봐요. 부담스러워하잖아요.”
어찌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클로드 얼굴에 구멍이 뚫리는 줄 알았다.
“아무리 같이 일하는 사이라도 외간 남자를 함부로 집으로 들이다니, 너무 무방비합니다.”
나는 와다다 쏟아지는 말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지금, 나한테 잔소리한 거야?
“그럼 어떡해요? 얼어 죽게 내버려 둬요?”
“그래야죠.”
허어, 뭐래. 그랬으면 댁도 얼어 죽었거든? 과다출혈로 죽었거나.
‘이게 바로 내로남불인가.’
황당한 내 시선에도 딜리언은 못마땅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거야 원, 제 영역을 지키는 짐승도 아니고.
“클로드. 몸 다 녹였으면 따라와. 지금 바로 준비할 테니까.”
어쩔 수 없지. 클로드를 빨리 내보내는 수밖에.
온실로 걸음을 옮기는데 별안간 클로드가 비명을 질렀다.
“저, 저거 백소화잖아? 리아, 저거 나한테 팔아. 시세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로 쳐줄게!”
“안 돼.”
“그래, 알았어. 네 배. 어떠냐?”
“안 판다고. 열 배를 불러도 안 팔아.”
저건 내 목숨 줄이라고.
하지만 이런 내 사정을 알 리 없는 클로드는 자꾸만 나를 귀찮게 굴었다.
“리아, 다시 한번…….”
딜리언이 클로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봐.”
“네?”
“리아 씨, 그만 귀찮게 해.”
“네?”
딜리언이 턱짓으로 내 뒤에 있던 백소화를 가리켰다.
“내 거니까 그만 신경 끄라고.”
“네, 네?”
“못 알아듣나? 내 거라고.”
충격으로 물든 클로드의 눈동자가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리, 리아. 정말이야?”
“응. 맞아.”
딜리언에게 백소화를 선물로 줬으니까.
“말도 안 돼…….”
그 귀한 걸 남에게 준 사실이 그리 믿기 힘든지, 클로드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클로드가 백소화를 훔쳐 갈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는 딜리언을 본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와, 집착 장난 아니네.’
딜리언은 보통 악당들과 달리 이상하리만치 욕심이 없었다.
모든 걸 가져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세상에 흥미가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대신 제 것이라 여긴 건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그만 징징거리고 빨리 와.”
나는 얼이 빠진 클로드를 끌고 온실로 향했다.
딜리언의 못마땅한 시선이 등을 따갑게 찔렀다.
* * *
충격으로 다 죽어가던 클로드는 온실에 들어서자 엘릭서를 마신 사람처럼 살아났다.
“크으, 이 약초들 좀 봐. 내가 이 일 하면서 너처럼 약초 잘 키우는 사람 처음 봤잖아.”
클로드는 늘 그렇듯 온실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키우는 거야?”
신성력 몰빵하면 이렇게 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비밀이야.”
매번 거절당하면서도 뭐가 그리 아쉬운지 클로드가 쩝, 입맛을 다셨다.
“네가 키운 것만 유독 효능이 좋다니까.”
그것도 신성력을 몰빵해서 그래.
신성력을 거름 삼아 큰 녀석들이니 몸에 나쁠 리가.
때문에 내가 키운 약초만 찾는 고객도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벌이가 쏠쏠하지.’
나는 치료사나 신관은 될 수 없지만, 신성력을 이용해 식물을 빠르게, 더욱 건강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이게 바로 치트키지.’
나는 특수 제작한 바구니에 약초를 옮겨 담았다.
“그런데 리아, 그 남자 신원은 확실한 거 맞아?”
“응.”
“위험한 사람은 아니고?”
“왜 엉뚱한 사람을 의심하고 그래. 빌헬름에 범죄자라도 기어 들어왔어?”
나는 모종삽을 흔들며 심드렁히 말했다.
범죄자는 늘 많다. 빌헬름은 국경에 인접한 마을.
국경을 넘어 도망가려는 자들이 모이는 범죄자들의 환승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어떻게 알았냐? 범죄자인지는 모르겠는데 걸려 있는 포상금이 어마어마해.”
아무도 없는데 클로드는 누가 들을세라 주변을 살피며 내 귀에 속삭였다.
‘미친.’
입이 떡 벌어지는 액수였다.
“정말?”
“그렇다니까.”
“정보 풀어봐. 뭐 하는 놈인데? 인상착의는?”
눈만 그쳐봐라. 심마니 때려치우고 그 녀석 찾으러 다닌다.
그 돈만 있으면 난……!
“흑발에 적안, 그리고 목에 검은 문신이 있는 남자라고 하더라.”
“…….”
“우연이라기엔 너무 딱 들어맞잖아. 문신은 그렇다고 쳐. 적안이 어디 흔한 눈이야?”
클로드는 딜리언을 의심했다. 아니, 확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리아. 그 남자 괜찮은 거 맞아?”
클로드가 무어라 딜리언에 대해 캐물었지만 내 귀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믿기지 않았다. 누가 감히 시나이즈 공작을 건든단 말인가.
그 순간, 상처를 입고 숲에 쓰러져 있던 딜리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딜리언을 다치게 만든 놈들이구나.’
딜리언을 죽이지 못해서, 다시 죽이기 위해 그를 찾는 게 분명했다.
절대 딜리언의 위치를 알려선 안 되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흔들렸다.
‘이거 기회 아닌가?’
포상금도 포상금이지만, 딜리언을 내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그 돈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꼭꼭 숨어버리면 제아무리 딜리언이라도 찾지 못할 거야.
‘딜리언은 강하니까 고작 암살자들한테 죽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때였다. 온실 밖으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에 입이 틀어막혔다.
‘정신 차려. 강한 건 완벽한 시나이즈 공작이지, 기억을 잃은 딜리언이 아니야.’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클로드. 모른 척해줘.”
“뭐? 저 남자가 위험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막말로 살인마일 수도 있잖아!”
“클로드, 그런 사람 아니야.”
“너 사실대로 말해. 협박이라도 당한 거야? 그래서 같이 지내는 거냐고.”
“아니라고.”
나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클로드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 사람은 아니야. 좋은 사람이거든. 그리고 내가 이상한 사람 집에 들이는 거 봤어?”
평소, 잔뜩 가시를 세운 채 주변을 경계하던 나를 떠올린 클로드가 입을 다물었다.
“클로드, 넌 오늘 나 말고 아무도 못 본 거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