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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5)화 (5/143)

5화.

‘젠장. 너무 속 보이나 봐.’

남들보다 경계심이 많은 딜리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선 은밀하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데.

너무 티가 나버렸단 말이지.

「이딴 개수작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나? 우습지도 않군.」

하며 내 목을 치기라도 하면…….

‘뭘 해도 참수 엔딩이라니. 살기 참 힘들다.’

엑스트라에 빙의해 평범한 일상물만 찍을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장르가 바뀌어버렸다.

공략 난도 최상인 생존물로.

“농담이었는데 정말인가 봅니다.”

“……저 놀리는 거예요?”

“설마요. 제가 은인께 그런 짓을 할 리가요.”

딜리언이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의외네? 장난도 칠 줄 알아?’

마냥 딱딱하고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럼 잘 먹겠습니다.”

딜리언은 참 맛있게도 식사를 했다.

“맛있어요?”

“네, 맛있습니다.”

빈말은 아닌지 한 상 가득 차린 접시가 차례대로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잘 먹어서 다행이야. 안도한 것도 잠시.

“아니에요. 안 해도 된다니까요.”

“신세 지는 처지에 받기만 할 수는 없죠.”

나를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밀어낸 딜리언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손을 슥, 집어넣었다.

“차갑네요.”

“네! 그러니까 설거지는 제가……!”

“빨리 끝내도록 하죠.”

달그락, 달그락.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뚝, 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커질수록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딜리언 시나이즈에게 설거지를 시키다니, 난 이제 죽었어!’

내가 시킨 건 아니었으나 말리지 못한 내 죄였다.

지금 당장 딜리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곁에서 맴돌았다.

“저 잘하고 있습니까?”

“네! 그럼요! 딜리언 씨가 못하는 게 뭐가 있겠어요!”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너 더럽게 못해! 접시에 기름기 하나도 안 빠졌다고!

‘기름은 뜨거운 물로 씻어야 한다고!’

나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키며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모터를 단 듯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내 칭찬에 딜리언의 입가가 은근하게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입니다.”

나는 딜리언의 가슴팍에 매달린 곰돌이 앞치마를 보며 입가를 움찔거렸다.

갈색 곰돌이 앞치마를 입는 건 안 쪽팔리나?

“설마요. 너무 멋있는걸요!”

눈이 마주친 곰돌이가 눈을 찡긋거렸다.

그대여! 힘내시게!

젠장. 살아남기 더럽게 힘드네.

* * *

또 하루가 밝았다.

하룻밤 사이 훌쩍 늙어 버린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딜리언의 뒤를 쫓았다.

그의 너른 등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다음은 뭘 할까요?”

딜리언이 두 팔을 걷어붙이며 물었다. 나는 다급히 그의 팔을 끌어내렸다.

“괜찮아요. 쉬고 계세요.”

“어제처럼 설거지를 할까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당장에라도 주방으로 달려갈 기세인 딜리언을 말리며 등을 밀었다.

‘시키는 일은 뭐든 하겠습니다.’

내 집에서 신세를 지는 동안 열심히 일을 하겠다 말한 딜리언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제 아침, 설거지를 하고 자신감이 붙었는지 딜리언은 집 안 이곳저곳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림을 하나씩 거덜 냈다.

설거지를 하다 접시를 깨트리질 않나, 빗자루를 부러트리질 않나, 이부자리를 정리하다가 베개를 터트리질 않나…….

넘치는 힘이 문제였다.

‘어제 깨트린 건 내가 제일 아끼는 접시였지…….’

하룻밤 사이 딜리언이 망가트린 것만 해도 손해가 얼마인지,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챙그랑-!

나는 날카로운 소음에 눈을 일그러트렸다.

이번엔 또 뭐야? 한숨을 쉬며 뒤를 돌자, 딜리언이 재빨리 제 손을 뒤로 숨겼다.

그리곤 무슨 일이 있었냐며 능청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능구렁이 같긴.’

물기 가득한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그에게 다가가자 딜리언이 다급히 발을 움직였다.

증거를 은폐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나는 화를 내는 대신 호다닥, 그에게 달려가 눈을 크게 깜박였다.

“큰 소리가 들렸는데 딜리언 씨, 괜찮으세요?”

“그게 말입니다.”

“헉! 손 다치신 건 아니에요?!”

딜리언이 마지못해 뒤로 숨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컵 손잡이가 딜리언의 손에서 달랑거렸다.

“힘 조절에 실패해서…….”

그가 멋쩍은 듯 눈을 찡긋거렸다.

처참하게 박살이 난 컵을 보자 단전 깊숙한 곳에서 한숨이 소용돌이쳤다.

‘참자. 참아. 도련님이 무슨 집안일을 해봤겠어.’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나는 한껏 걱정을 꾸며낸 얼굴로 딜리언의 손에서 컵 손잡이를 빼냈다.

“다친 곳은 없네요. 다행이에요.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요!”

나는 그를 걱정하는 척 꾸짖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내가 화병 걸려서 죽을 것 같았다.

“딜리언 씨. 여긴 위험하니까 저기 가서 쉬고 계세요.”

하지만 딜리언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를 따라 몸을 굽힌 그가 유리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하긴 뭘 해. 순간 울컥한 나는 나도 모르게 딜리언의 손등을 때렸다.

‘헉, 미친.’

꽤 세게 때린 건지 찰싹 소리가 아주 차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리아 씨, 손 은근 맵네요.”

“그, 그러니까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손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맨손으로 만지는 건 리아 씨도 똑같습니다만.”

딜리언의 눈썹이 불만을 품은 채 꿈틀거렸다.

“달라요.”

“뭐가 다릅니까.”

나는 간이 콩알만 한 소시민이고 댁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서운 놈이라 거?

그 무서운 놈 손에 피라도 나게 했다간…….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저랑 다르게 당신 손은 아주 고운…….”

나는 말끝을 흐렸다. 거친 흉으로 가득한 그의 손을 보고 차마 곱다고 말할 수 없었다.

“……소중한 손이라고요.”

웅얼거리듯이 뱉은 말에 딜리언이 묘한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정 그렇게 걱정되면 얼른 가서 빗자루 가져다주세요. 네?”

나는 이때다 싶어 딜리언을 힘껏 밀어냈다. 강경한 태도에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 딜리언이 신신당부했다.

“유리 만지지 말고 기다리고 계세요.”

“네, 얼른 다녀오세요.”

나는 멀어진 발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컵도 다시 사야겠네.”

새로 사야 할 식기구가 도대체 몇 개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커다란 조각을 한데 모으고 있으니, 내 곁으로 나단이 다가왔다.

“저놈 진짜 큰일 날 놈이구나.”

“나단. 나 스트레스 받아서 죽을 것 같아.”

이제 고작 사흘 차인데 위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저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꾸나.”

“어떻게?”

“흐음, 창고에 있는 책을 던져주는 건 어떨까. 어제부터 계속 이것저것 질문하던데 책을 던져주면 조용해질 것 같구나.”

그렇다. 여유가 생긴 딜리언은 질문봇이 되어 내게 끝도 없이 질문을 던져댔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대답하기 곤란한 개인 신상까지.

이대로 가다간 그가 쏟아낸 질문에 잠겨 죽을지도 몰랐다.

“나단, 넌 역시 내 수호신이야.”

나는 나단을 껴안고 그의 머리에 연신 입을 맞췄다.

“에잇, 내 나이가 몇인데 남사스럽게.”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은 좋은지 나단의 금안이 초승달처럼 샐쭉 휘었다.

“그냥 재수 없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변태 부엉이였군.”

쪽쪽거리는 낯선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등장한 딜리언은 잔뜩 풀어진 나단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썩어 들어간 얼굴이 그의 진심을 알려주었다.

“징그럽군. 저렇게 흉할 수가.”

“뭬야?!”

“리아 씨, 떨어지세요. 저건 수호신이 아니라 변태입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을 봤나!”

“거기다 성질까지 더럽군요.”

“리아! 나 말리지 말거라. 오늘 저놈 머리에 구멍을 내주겠다!”

응, 안 말려. 속으로 대꾸한 나는 딜리언이 집어 던진 빗자루를 가져와 유리 조각을 쓸어 담았다.

* * *

청소를 마친 후, 싸우는 둘을 내버려둔 나는 곧장 창고로 향했다.

“콜록, 콜록.”

허공에 휘날리는 먼지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입을 막고 손을 휘저었지만, 그럴수록 먼지는 더 날릴 뿐이었다.

“후, 찾았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책 묶음을 꺼낸 나는 끙끙거리며 책을 집으로 옮겼다.

휘청거리며 뒷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나단이 잽싸게 날아왔다.

“리아! 이 무거운 걸 혼자 들고 온 거야? 나를 부르지 그랬어.”

“너 이거 들면 날개 다 부러져.”

“딜리언! 뭘 보고만 있느냐! 누구 때문에 우리 리아가 고생하고 있는데!”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불호령에도 딜리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책이요. 딜리언 씨 궁금한 거 많으시잖아요. 제가 가르치는 건 잘 못 해서 책이라도 읽으시라고.”

내가 낑낑거리며 들고 온 책 묶음을 한 손에 가뿐히 든 딜리언이 찬바람이 드는 문을 닫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딜리언 씨, 제국어는 기억하고 있죠?”

“제가 기억에 장애가 생긴 건 맞지만 백치가 된 건 아닙니다.”

다행이다. 제국어부터 가르치라고 했으면 다 포기하고 던져버렸을 텐데.

“많네요.”

그의 말대로 책은 많고, 다양했다.

역사서, 문학, 철학, 성서. 심지어 요리책까지 있었다.

“오늘부터 리아 귀찮게 굴지 말고 책이나 읽거라!”

“좀 조용하지? 변태에 성질은 더럽고 말까지 많군.”

“리아. 나 저놈 정말 싫다.”

“이때만큼은 통해서 다행이군.”

아까부터 느낀 건데 둘이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나쁜 쪽으로.

나단의 속을 박박 긁은 딜리언은 책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가 책에 빠져들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 전 뒷정리하고 올게요. 읽고 계세요.”

독서에 심취한 딜리언에게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차라리 잘됐어.’

나는 뒷문을 열고 후원에 자리한 온실로 향했다.

열 평 남짓한 온실.

이곳은 내 일터이자 휴식 공간으로 약초와 꽃, 허브, 난 등등 여러 식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공간이었다.

온실 문을 열자 따뜻한 기운이 부드럽게 나를 감쌌다.

딜리언이 없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에 오자 마침내 긴장이 풀렸다.

“으으, 이제 좀 살겠네.”

약초와 꽃향기가 한데 섞여 노곤한 몸을 녹여주었다.

“그럼 일을 해볼까.”

나는 온실 구석구석을 살피며 죽어가거나, 성장이 더딘 약초를 찾아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신성력을 생명수처럼 빨아들인 식물은 천천히 생명을 되찾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순간 나타난 황금빛 나비를 향해 눈을 휘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인사에 화답하듯 나비가 내 주변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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