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4)화 (4/143)

4화.

일곱 살짜리 아이가 봐도 눈치챌 것이다. 결코, 평범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깊고, 진득하게 얽혀있는 사이가 분명했다.

딜리언의 날카로운 대꾸에 나단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이 녀석 감이 좋군. 리아 네 거짓말이 얼마나 통할지 모르겠구나.’

곧 들킬 거짓이라 할지라도 지금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내 소중한 아이가 네놈의 머리통을 깨부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내가 해줄 말은 없다!”

나단은 리아가 직접 입을 열기 전까진 먼저 말할 생각이 없었다.

‘깐깐한 부엉이. 입이 무겁군.’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딜리언에겐 작은 실마리라도 필요했으니까.

“질문을 바꾸지. 내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지?”

그 순간, 맹금류의 날카로운 눈에 서슬 퍼런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

나단은 머리끝까지 오른 열을 잠재우기 위해 숨을 가다듬었다.

‘네놈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아이를 잡아먹으려고 했지!’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나단은 참았다.

리아가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리아를 위해.

리아의 수호신인 나단은 화를 죽이는 대신, 딜리언을 씹을 듯이 사납게 내뱉었다.

“네놈이…… 몹쓸 짓을 했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나는 리아에게 미움받기 싫다!”

그러니까 리아라는 그 여인이 말하지 않길 원한다는 거다.

대체 왜?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면 질타하면 될 것을.

리아라는 여자와의 관계를 숨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설마, 정말 무슨 사이라도 됐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숨기는 거지? 그녀와 자신이 깊은 사이였다면 숨길 이유가 없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숨긴단 말인가. 사람은 본디 이기적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지.

숨겨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는 거다.

리아 델리스는 다른 것을 숨기고 있다. 도대체 뭐지?

‘나를 등쳐 먹기라도 했나. 아니면 그 여인이 날 사지로 몰고 간 장본인인 건가? 날 죽일 뻔하고 모른 척 도와주는 건가?’

딜리언이 진실에 근접한 그 순간,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단이 서늘하게 경고했다.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해두지.”

딜리언을 올려다보던 나단은 날아올라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마주친 두 눈에서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너는 우리 리아에게 싹싹 빌고 또 빌어야 해.”

누가 들어도 딜리언,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말이었다.

‘등쳐 먹은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나? 아니면 불순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아는 게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궁지에 몰린 딜리언은 거센 힘으로 나단을 움켜쥐었다.

“컥! 이, 놈이!”

망할 부엉이를 족쳐서라도 대답을 들으려던 그때, 리아가 돌아왔다.

잔뜩 붉어진 눈으로.

“늦어서 죄송해요. 얼른 식사하세요.”

물기로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 딜리언의 손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나단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쪼아댔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딜리언이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저런 얼굴을 하는 여자가 날 죽이긴 무슨.’

리아를 향한 의심이 서서히 옅어지던 그때,

뚝.

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의심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아, 아직도 이러네.”

덤덤히 눈물을 닦아내는 리아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딜리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뭔진 몰라도 내가 잘못했나 보다.

그래, 내가 개새끼였을 거다.

딜리언의 오해는 더욱더 깊어졌다.

* * *

와, 진짜 양파가 이렇게 매울 수가 있나? 생화학 무기 아니야?

시도 때도 없이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자, 돌처럼 굳은 나단과 딜리언이 보였다.

‘쟤네 뭐 하는 거야?’

딜리언은 왜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건지, 그리고 나단은 왜 그런 딜리언의 머리채를 뜯고 있는 건지.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나단이었다.

“리아! 왜, 왜 울어! 저놈 때문이냐? 내가 저놈을 그냥!”

“양……. 아니, 별거 아니야.”

양파 때문이라 말하려던 나는 딜리언을 흘끔 보고 말끝을 흐렸다.

‘쪽팔려서 말 못 하겠네.’

아무리 곧 헤어질 사이라지만, 양파 때문에 질질 짰다고 말하긴 너무 수치스러웠다.

나는 욱신거리는 눈을 꾹 눌러 진정시킨 후, 딜리언에게 다가가 죽을 내밀었다.

얼른 먹으라는 뜻으로 가볍게 눈짓했지만, 그는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 늦어서 화났나?’

티 나지 않게 슬쩍, 딜리언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별안간 눈을 왈칵 구겼다.

‘헉, 진짠가 봐. 근데 이 인간 진짜 염치없네. 내가 늦어봤자 얼마나 늦었다고.’

가슴속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그걸 말로 옮길 배짱 따윈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는데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덮은 딜리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미안합니다.”

“네? 뭐가…….”

“그냥, 그냥 제가 다 잘못한 것 같습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사과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놀란 건 나뿐인지 나단은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잠시 뒤, 손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자못 결연해 보였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도대체 뭘?

“그래! 책임져야지!”

그러니까 도대체 뭘 책임지겠다는 건데?

“제게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그러니까 뭘 만회하겠다는 건데!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대화에 답답해하던 나는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딜리언 씨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리아 씨도 알다시피 제 기억이 온전치 않아 당장 돌아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집이 어딘지 모른다는 그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치료도 끝났겠다, 축객령을 내리면 그만이지만…….

“죄송합니다. 곤란하시죠.”

젠장! 저 얼굴!

버려진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처연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안 돼, 정신 차려. 겉모습에 넘어가면 안 돼! 알맹이는 맹수라고!’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거절에 딜리언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 날씨에 나가는 건 위험할 것 같습니다.”

“날씨가 왜요?”

아침에 분명 해가 뜬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이것 보라며 꽉 닫힌 창문을 힘껏 열었다.

하지만 나를 반긴 건 따사로운 햇살이 아닌,

휘이이잉!

차가운 눈바람이었다.

눈싸대기를 맞은 나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 이게 무슨…….”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창문이 덜컹거렸다.

“리아 씨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지만, 기껏 살려주신 소중한 목숨이니 아껴 써야겠죠?”

“…….”

“염치없지만 잠시 신세 지겠습니다.”

“…….”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마음껏 부리셔도 됩니다.”

“잘됐군. 안 그래도 땔감이 부족한데 가서 나무나 해오거라.”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다.”

나단. 신성력을 가진 사람은 신의 사랑을 받는다며. 그런데 이게 뭐야.

사랑은 무슨. 신은 나를 미워하는 게 분명했다.

나단과 딜리언의 대화를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때, 눈앞에 커다란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딜리언이 나를 보며 예쁘게 눈을 휘었다.

‘망했네. 망했어.’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언제 기억이 돌아올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함께.

2장. 이런 동거는 싫어요!

탁탁탁. 경쾌한 칼질 소리가 주방에서 울려 퍼진다.

리듬을 타듯, 나단의 고개가 까닥거렸다.

“누굴 주려고 이리 열심히 요리를 하느냐.”

“누구긴 누구겠어.”

당연히 딜리언이지. 나는 분주히 움직이며 있는 재료, 없는 재료 탈탈 털어 아침을 준비했다.

‘고귀한 공작님께 누추한 음식을 먹일 수는 없지.’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남겨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혹시 아는가, 지극정성으로 돌보다 보면 기억을 되찾았을 때 자비를 베풀어 줄지.

“차린 건 없지만 드세요.”

어서 들라는 내 말에도 딜리언은 대답이 없다. 팔짱을 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앞치마에 시린 손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부족한 거라도 있으세요?”

물론, 귀족의 식사와 비교하면 부족하고 또 부족하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기억도 없잖아!’

나는 뺨이 뚫어질 것 같은 시선에 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딜리언이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제가 불편하십니까.”

당연하지. 편하겠냐!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참은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당겼다.

“그럴 리가요.”

“불편해 보이는데요.”

“아니에요.”

“입에 경련 일어났습니다.”

나는 부들거리는 입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제가 안면 경련이 있어서 그렇답니다.”

“하.”

작은 틈도 주지 않는, 철벽 방어에 딜리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제가 왕이고, 리아 씨는 제 하인인 줄 알겠습니다.”

왕은 맞지. 황실도 견제할 만큼 거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존재니까.

속으로 맞장구를 치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배가 안 고파서-.”

꼬르륵-

“……나중에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배가 엄청 고프네요?”

나는 냉큼 의자를 끌어 딜리언의 맞은편에 앉았다.

눈치 없는 위장! 눈치 없는 배꼽시계!

‘같이 먹으면 체할 것 같아서 일부러 따로 먹으려 한 건데……!’

기억을 잃은 공작님은 지나치게 신사적이었다.

“식사는 늘 이렇게 드십니까?”

식탁 위에서 고기를 노리던 나단이 콧방귀를 흥, 뀌었다.

“그럴 리가. 세상만사 귀찮아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때우는 녀석이 이런 진수성찬을 차린 이유가 뭐겠어.”

너 때문이라는 무시무시한 눈빛에 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했다.

“저 때문이군요.”

“아니, 그게…….”

“리아 씨 정성은 감사하나, 다음부턴 평소대로 먹죠. 그리고 식사 당번도 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잘 보이려는 수작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누, 누가 맨날 이렇게 요리한다고 했어요? 환자는 잘 먹고 푹 쉬어야 금방 낫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내일부턴 국물도 없다며 엄포를 놓은 나는 접시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요.”

“전 또, 저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신 줄 알았네요.”

“쿨럭.”

황급히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들자 붉은 눈동자가 반달로 휘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