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네?”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놀란 나는 얼떨결에 다시 되물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기억이 안 나세요?”
딜리언은 머리가 아픈지 눈을 찌푸렸다.
“……그래.”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누군지, 뭐 하던 사람인지, 내 이름조차도.”
그러니까…… 지금, 기억을 잃은 거야? 날 놀리는 게 아니고, 진짜로?
휘둥그레 눈을 키우고 입을 벌리고 있던 나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저, 저기. 잠시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빠르게 뛰는 심장에 자꾸만 거친 숨이 나왔다.
‘머리를 맞아서 기억을 잃은 거겠지? 맞아. 틀림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망울을 보자 미약한 죄책감이 들었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까지 잃었을까.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괜찮나?”
“……네, 괜찮아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짙은 안도감이 들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기도가 이루어졌어……!’
모든 기억을 싹 다 잊게 해달라고 빈 건 아니었지만, 당장 살 구멍을 찾아 다행이었다.
“어떡해…….”
너무 좋아. 나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공작님께서 이상한 오해를 하는 줄도 모르고.
* * *
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깨운 건 딜리언이었다.
“이봐, 괜찮나?”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나는 씰룩거리는 입매를 간신히 갈무리한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가 어떻게 만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래.”
“그렇군요.”
나는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젠장, 울 것 같아.
딜리언의 머리를 깨고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데. 살았다는 안도감에 코끝이 찡했다.
‘당장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럼 남은 건 어떻게든 입을 털어서 딜리언을 이 집에서 내보내는 건데.
‘잠깐,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나는 뺨에 닿아오는 딜리언의 시선에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물가에 버려진 아이를 바라보듯 안쓰러운 눈빛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아니면 주인을 잃은 강아지거나.
‘뭐지, 지금 개새끼 취급당한 건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던 딜리언이 손을 뻗었다.
솥뚜껑만 한 커다란 손이 내게 향하자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눈가에 무언가가 닿았다. 그건 딱딱하고, 거칠며, 따뜻했다.
갑자기 닿아온 온기에 놀라 눈을 뜨자, 전보다 가까워진 딜리언의 얼굴이 보였다.
검지로 내 눈가를 쓰다듬는 그의 행동에 당황하는 사이,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를 놀라게 했다.
“운 건 아니군.”
“네? 아, 아니에요.”
나는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며 딜리언의 손에서 벗어났다.
‘다른 사람과 닿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왜 이러는 거지…….’
아! 기억을 잃어서 아무렇지 않은 건가? 그래도 그렇지, 너무 훅 들어왔잖아.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딜리언이 무서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저 눈 돌아가게 예쁜 얼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냥, 잠시 놀라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꽉 막힌 목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딜리언은 대답이 없었다. 굳이 그의 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태도는 어딘가 이상했다.
갑자기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딜리언의 눈치를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마침내 나와 시선을 맞춘 딜리언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지? 누구길래 내 곁에 있는 거지?”
당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정성스럽게 꾸민 말로 소개하려던 그때,
자고 있던 나단이 깨어났다.
“누구긴 누구야! 제 살을 내어주며 널 살려낸 은인이지!”
“나단!”
얘가 말을 하면 어떡해!
정체를 들키지 않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입도 뻥긋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나는 황급히 나단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지 내 손을 뿌리쳤다.
“우리 리아가 네놈을 살리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고생하긴 했지. 딜리언을 집까지 옮기느라 혹사당한 몸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나단은 열심히 내 편을 들어주며 연신 날개를 퍼덕였다.
“그런데 네놈은 우리 리아를 깨끗하게 잊어? 이런 고얀 놈을 봤나!”
나단, 그렇게 말하면 딜리언이랑 내가 깊은 사이인 것처럼 보이잖아.
“나단, 그만해. 아직 환자잖아.”
내 만류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나단이 매서운 눈으로 딜리언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게 된 딜리언은, 재밌어했다.
그의 붉은 눈에 떠오른 건 명백한 흥미와 호기심이다.
“말하는 부엉이라.”
“나는 평범한 부엉이가 아니라 리아의 수호신이다!”
“재밌는 걸 키우고 있네.”
나단이 성질을 내며 왁왁거려도 딜리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도대체 네 정체가 뭐지?”
의심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까와 달리 흥미를 품은 질문이 돌아왔다.
“늦었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리아 델리스라고 해요. 대단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약초꾼이에요. 그리고 나리의 성함은…….”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이름을 알려 주려 했던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성까지 알려주면, 곤란해지겠지?
“딜리언입니다.”
당신이 의식을 잃기 전에 알려줬다고 덧붙였다.
‘완벽한 알리바이야.’
마침내 제 이름을 알게 된 딜리언은, ‘딜리언.’ 하고 몇 번이나 제 이름을 읊조렸다.
그렇게 하면 기억이 떠오를 거란 기대를 품은 채. 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게 없는지 그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이쪽은 나단. 제 수호신이자, 소중한 가족이에요.”
너무 간단한 설명이 아닌가 싶겠지만, 신수라는 걸 밝힐 수는 없지 않은가.
걱정한 것과 달리, 딜리언은 나단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의 관심을 차지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우리가 아는 사이였나?”
“아니요. 초면이에요.”
큰일 날 소리. 나는 절대, 절대 딜리언과 아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숲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계신 딜리언 씨를 제가 모시고 왔어요.”
짧게 요약하자면 ‘넌 내 환자고, 나는 네 은인이야.’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단번에 이해한 딜리언의 얼굴에 금이 갔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묵직한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결례를 범했군요.”
뭐……? 결례……?
돌처럼 굳은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다행히 제 분수를 아는 녀석이군.”
닥쳐봐. 나단.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 딜리언 시나이즈가! 나한테 존댓말을 썼어. 사과했다고!
안하무인일 줄 알았던 딜리언은 의외로 상식인이었다.
기억을 잃은 상태라서 그런가. 내가 아는 극악무도한 공작님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딜리언의 사과라니! 절대 듣고 싶지 않아!’
나중에 기억을 되찾은 딜리언이,
「감히 나를 속여? 나를 죽이려 한 주제에 뻔뻔하게 사과나 듣고 있었다니, 죽고 싶나 보군.」
하고 나를 죽이려 들면 어떡하란 말인가.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기억을 잃으셨는데 놀랄 만하죠. 이해해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쓸데없이 예의 바른 딜리언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여기서 잘 배운 티가 났지만 그럴수록 나는 죽을 맛이었다.
“부탁이에요. 제발 사과하지 말아요!”
사색이 된 나는 무작정 그의 뺨을 잡고 들어 올렸다.
불시에 뺨이 붙잡혀 놀랐는지 잔뜩 커진 딜리언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흔들리는 딜리언의 눈과 시선을 맞추고 재차 말했다.
“당신에게 사과 듣고 싶지 않아요.”
“…….”
“부탁이에요. 제발.”
간절히 속삭이자 딜리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할 테니 이만 제 뺨을 놓아주시겠습니까.”
“헉.”
나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내가 무슨 짓을……!
당황한 나는 우왕좌왕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죄, 죄송해요. 배고프시죠? 얼른 식사를 내어올게요.”
겨우 방을 벗어날 핑계를 쥐어 짜낸 나는 재빨리 등을 돌렸다.
곧장 주방으로 내뺄 작정이었다. 딜리언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지만 않았더라면.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저희 말입니다. 정말로 초면인 거 맞습니까?”
저 질문의 저의가 뭘까? 나는 딜리언과 꽤 오랫동안 시선을 맞췄다.
내가 그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그 또한 내게서 뭔가를 찾으려 했다.
‘나를 의심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 백지상태가 된 딜리언은 숨김없이 감정을 드러냈는데 거기에 의심은 없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엔 미약한 죄책감이 깔려 있었다.
‘죄책감?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해도 딜리언이 그런 감정을 가질 리가 없잖아.’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속으로 피식 웃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뿐이었어요.”
그것뿐이어야 했다. 더는 엮이고 싶지 않고 말이야.
나는 딜리언이 또다시 붙잡을세라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주방으로 도망쳐 온 나는 식탁에 머리를 박고 발을 굴렀다.
“미쳤나 봐. 왜 그랬어, 멍청아!”
식탁에 머리를 쾅쾅 박던 나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빨리 내보내자. 얼른 보내버리는 거야.”
그리고 이 마을, 아니 제국을 떠나자. 딜리언이 기억을 되찾기 전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했다.
“그래도 밥은 먹이고 내보내야지.”
나는 뽀득뽀득 씻은 양파를 썰었다.
탁탁탁탁-
매운 내에 눈물이 흘렀다.
으으, 양파 너무 매워.
* * *
딜리언은 저를 피해 도망치는 작은 등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내가 왜 그랬지?’
딜리언은 느릿하게 제 검지를 매만졌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아직 손끝에 남아있는 듯했다.
이상하게 이 모든 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욱신. 기억을 떠올리려 하자 해일처럼 덮쳐오는 둔탁한 통증에 딜리언이 머리를 짚었다.
젠장, 도대체 저 여자가 뭐길래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방을 가득 채운 이 향은 또 무엇이고.
딜리언은 코끝에 맴도는 달콤한 잔향에 숨을 삼켰다.
“이봐. 부엉이.”
“내 이름은 나단이다.”
리아를 따라가는 대신 딜리언의 감시를 자처한 나단은 저를 부르는 그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단.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뭐가 궁금하지?”
딜리언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본디 인간을 사랑하고 아끼는 나단은 그에게 최소한의 친절을 베풀었다.
“저 여인과 나는 무슨 사이였지?”
“흥, 무슨 사이긴, 말했잖냐.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저도 그리 믿고 싶지만, 초면이라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기억을 잃었다는 자신의 말에 당황하던 모습과 어쩔 줄 몰라 하던 태도, 울 것 같던 표정, 체념한 듯 입가에 머물던 씁쓸한 미소.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와의 만남을 잊었다는 대답에 흘러나온 목소리.
‘……울 것 같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축축하고, 바스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날 바보 취급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