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0. prologue
인생은 갈림길의 연속이다.
지금 그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나는 새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인 피 웅덩이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붉은 피와 대조되는 하얀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리아, 빨리 치료해야겠구나.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내 어깨에 매달려있던 부엉이, 나단이 남자의 상태를 줄줄이 읊었다. 하나같이 심각한 내용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니까 나단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는 곧 죽을 운명이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자세,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는 얕은 숨, 복부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붉은 피.
남자는 반송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리아, 네 힘이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나단의 말이 옳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진 나는 분명 저 남자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왜 하필 저 사람인가.
피 칠갑을 한 모습이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심장에서부터 시작해 목까지 이어진 검은 가시.
이건 저주의 증표였다. 그리고 이 저주의 주인은 오직 한 명뿐.
황권과 맞먹는 힘을 가진 권세가. 시나이즈 공작가의 젊은 주인.
‘딜리언 시나이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 그는 이 이야기의 흑막이었다.
“다른 사람을 불러 오는 건…….”
“길어봤자 한 시간이다. 그때까지 못 버텨.”
나단이 내린 시한부 선고에 나는 왈칵 눈을 찌푸렸다.
딜리언을 발견한 이곳은 숲의 입구, 그리고 마을은 걸어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
나단의 말처럼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이 방법뿐인 걸까.’
위험한 사내라곤 하지만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를 치료했다가 능력을 들키면?’
신전에서 내 존재를 알아차리면 어떡하지? 다시 잡혀가면 어떡해.
불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리아.”
“알았어.”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오늘 내 선택은 모조리 실패했다.
약초 채집도, 조기 퇴근도 모두.
‘조기 퇴근은 무슨, 괜히 지름길로 갔다가 반송장이 된 딜리언이나 마주쳤지.’
“하아.”
묵직한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 사이 딜리언의 체온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결정할 때였다.
“나단, 손수레 가져올 수 있겠어?”
“금방 다녀오마.”
역시,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어.
‘치명상만 적당히 치료하고 수레에 실어 신전으로 보내면 되겠지.’
정신을 차린 딜리언이 신전을 뒤집든 말든, 뒷일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해보자. 할 수 있어.”
내 다짐에 응답하듯,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정신이 들어요?”
“…….”
깊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정해요. 해치는 거 아니에요. 상처를 치료해줄게요.”
나는 맹수를 안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었고,
탁.
손목이 붙잡혔다.
루비처럼 요요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느릿하게 휘어졌다.
요염한 눈웃음에 넋을 놓고 있던 그때였다.
억센 힘이 나를 당겼고, 곧이어 시야가 뒤집혔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윽.”
딱딱하게 언 땅에 부딪힌 등이 아프다. 아릿한 고통에 눈을 찌푸렸다.
내 허리 위에 올라탄 딜리언이 나를 보며 나른하게 눈을 접었다.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미소에 숨을 들이켰다.
‘위험한데…….’
지나치게 위험한 얼굴에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러자 딜리언의 시선이 내 입술로 향했다.
한참 동안 내 입술을 보던 그가 사르르 미소 짓더니 그대로 상체를 숙였다.
바짝 다가온 그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지럽히고, 더운 숨결이 얼굴에 흩어졌다.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래?’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밀었다.
“저기요, 우리 지나치게 가깝거든요? 우선 뒤로 좀 물러나…….”
끝맺음을 맺지 못한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꿈틀. 남자의 뺨에서 검은 그림자가 뱀처럼 기어 올라왔다.
눈언저리까지 뻗어온 가시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약에 취한 듯 흐릿한 눈이 나를 진득하게 옭아맸다.
‘말도 안 돼.’
뺨을 매만지는 은근한 손길은 명백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증상을 종합해볼 때, 이건…….
‘폭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었다.
“이봐요! 딜리언!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야!”
‘젠장,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딜리언의 폭주를 잠재울 방법은 하나뿐이다.
눈앞에 있는 생명을 취할 것.
섹슈얼한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생명력을 뺏는다는 소리다.
한마디로 지금의 난, 딜리언의 먹음직스러운 한 끼 식사라는 소리였다.
“딜리언! 나 맛없다고! 백 퍼센트 유기농 양배추즙 맛이야!”
너 그게 얼마나 맛없는지 알아?
걸레 빤 물 맛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딜리언을 자극할 뿐이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욕망에 나는 위급상황도 잊고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이 미친. 왜 더 좋아하는데? 넌 그게 먹고 싶어?’
딜리언은 내가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무섭게 달려들었다.
마치 내 피에 이끌리는 것처럼, 본능처럼, 굶주린 짐승처럼.
‘이러다가 진짜 죽겠어!’
나는 필사적으로 딜리언의 얼굴을 밀어내며 소리 질렀다.
“나단! 살려줘! 나 잡아먹히겠어!”
“이런 파렴치한 놈을 봤나! 당장 리아에게서 떨어져라!”
내 비명에 빠르게 날아온 나단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딜리언의 머리채를 당겼다.
작은 부엉이의 몸짓은 딜리언에겐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틈을 만들기엔 충분했다.
나는 한 손으로 딜리언의 얼굴을 밀어내고, 나머지 손을 뻗어 땅을 더듬었다.
손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움켜쥐고 딜리언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둔탁한 소음과 함께,
털썩-
딜리언이 내 위로 쓰러졌다.
재빨리 딜리언을 밀어낸 나는 구르다시피 몸을 물렸다.
툭, 손에서 짱돌이 굴러떨어졌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리아.”
“……쉿, 아무 말도 하지 마.”
딜리언 시나이즈.
저주에 걸린 괴물 공작, 이 소설의 흑막. 파멸의 근원.
최강자라 불러도 손색없는 사내.
그리고 나는 방금 그 악역의 머리를 짱돌로 후려쳤다.
젠장, 데드 플래그 한번 시원하게 꽂았네.
1장. 엑스트라로 환생했습니다. 근데 이제 데드 플래그를 곁들인.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수많은 길을 두고 지름길을 택한 것? 어쩔 수 없이 딜리언을 치료해준 것? 아니면 그를 집으로 들인 것?
아니, 전부 아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눈을 뜬 것부터 잘못됐다.
나는 퀭한 눈으로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미형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부드러웠고, 피부는 매끈한 도자기처럼 맑았다.
오뚝한 코와 반듯한 입술, 날카로운 턱선.
마치, 신이 빚은 조각 같았다.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 손으로 흑막을 집으로 들이다니……. 미친 게 분명해.’
숲에서 딜리언을 실어 데려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해는 졌지, 눈보라는 몰아치지, 신전까지는 너무 멀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집으로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끄응,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나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단, 내가 위험에 빠지면 구해줄 거지? 넌 내 수호신이잖아.”
“당연하지. 넌 내가 지켜주마. 그런데…….”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나단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저 사내와 무슨 일이 있었나?”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그냥 내가 이쪽을 일방적으로 알고 있어.”
“위험한 녀석이냐?”
“응.”
아주아주, 위험한 녀석이지.
그리고 나는 이 무시무시한 사내의 뒤통수를 돌로 후려쳤다.
의식을 잃을 만큼 있는 힘껏.
딜리언이 깨어나면 감히,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며 목을 칠지도 몰랐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나단. 우리 도망칠까?”
딜리언을 쫓아낼 수는 없으니 남은 방법은 내가 나가는 것.
‘치료는 끝냈으니, 할 일은 다 한 거야.’
뒤처리까지 내가 맡을 필요는 없다 이 말이야.
“이 날씨에?”
휘이잉-
매섭게 날리는 눈발이 창문을 부술 것처럼 두드렸다.
“리아, 얼어 죽을 거다.”
“하지만 나단. 외간 남자와 단둘이 있으라니. 불안해서 잘 수가 없어!”
“네가 좋아하는 얼굴이잖느냐.”
“저 얼굴이? 아닌데? 내 취향 아니야.”
모른 척 시치미를 떼자 나단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리아. 네가 잘생겼다고 한 녀석들은 하나같이 다 저렇게 생겼었다.”
“……쳇.”
“걱정 말거라. 제아무리 짐승 같은 놈이라도 자신을 도와준 자를 해하진 않는다.”
‘그래. 나단 말이 맞아.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니 죽이진 않겠지.’
부디 그러길 바라며 나는 제일 아끼는 이불을 딜리언에게 덮어주었다.
온몸으로 싫다 소리를 지르고 있으면서 극진한 대접이라니, 나단이 이게 무슨 모순이냐며 중얼거렸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거실로 나온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았다. 평소엔 찾지도 않는 신께 기도를 올렸다.
‘부디, 딜리언이 이 일을 새카맣게 잊어버렸기를…….’
나는 긴 밤 동안, 빌고 또 빌었다.
그 기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