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8화>
“오늘도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편하게 왔네.”
수아가 이준의 차에서 내렸다. 그때 희한한 소리가 들렸다.
“그만 둬요. 계약 연애 따위는.”
지안이 목소린데 이게 무슨 말이야? 이준도 눈을 가늘게 만들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봤다. 한태준인데?
“오빠 꼭지는 뭐 금꼭지예요? 실수로 한 번 빨았다고 난리를 치게?”
괴상망측한 말들이 오가고 있어서, 수아는 귀를 의심했다.
“그럼 내가 교회 오빠면 되나?”
“개새와 씹새를 구분하게 하시고, 다만 짭새로부터 구하소서. 아멘.”
“?”
둘이서 갑자기 키스를 하고 있었다. 이 미친 것들이……. 아무리 부모 없이 컸다지만 내 동생이 이 정도로 또라이였어?
수아보다 이준이 더 빨랐다. 이준이 달려가서 지안과 태준을 떼어놓더니, 태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윽.”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공격을 당한 태준이 비틀거렸다. 이준을 발견한 태준은 당황했다.
“어, 형님…….”
태준이 맞는 걸 본 지안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준에게 소리쳤다.
“형부! 뭐하는 거예요!”
“처제! 너야말로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 형부가 깡패예요? 아무나 때리게? 얼굴에 상처 생기면 물어줄 거예요?
이 기집애 봐……. 수아도 눈을 부릅뜨고 끼어들었다.
“깡패라니! 형부가 아무나 때린 거야? 미친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때린 거지! 이 기집애가 집에 빨리 안 들어오고 싸돌아다니더니! 온갖 추태를 부리고 있어?”
“아! 아! 악!”
수아는 지안의 등짝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지안은 보란 듯이 피하지 않고 맞으면서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왜 때려! 악! 동네 사람들 좀 보세요! 우리 언니가 사람을 때려요! 악!”
그 사이 이준이 태준에게 주먹을 한 대 더 날렸다.
“악! 형부 미쳤어요? 미쳤냐고요! 사람을 왜 때리냐고!”
지안이 펄쩍 뛰었고, 수아도 고함을 질렀다.
“정신 안 차려, 윤지안? 형부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지안은 태준의 팔을 이끌고 퍼뜩 차에 찼다.
“빨리 운전해요, 오빠! 빨리! 무브무브!”
수아와 이준이 밖에서 차 문을 두드리며 악을 썼다.
“문 안 열어? 이것아? 야, 윤지안! 너 진짜 나한테 죽을 줄 알아!”
“한태준! 야이 새끼야! 너 나한테 죽는다! 야! 야!”
“오빠! 빨리 운전하라니까요! 뭐하고 있어요? 빨리!”
얼떨떨한 태준은 퍼뜩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곧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지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차례차례 떠올렸다.
입술이 부딪쳤었다. 오빠의 매력적인 향과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고. 아주 짜릿했어. 근데 언니와 형부가……,
지안은 태준을 곁눈질했다. 오빠로 인해 몇 년간 형부를 짝사랑하던 마음이 어느새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분명히 오랫동안 지속됐던 감정이었고, 그것 때문에 사춘기에 남다른 속앓이를 했건만. 다른 남자를 만나자마자 마음이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아서고 있었다.
이건 뭐 짜파게티 끓이는 시간을 못 기다리고 신라면 먹고 싶어서 미치는 거랑 비슷했다. 사람 감정이라는 게 참 우습네.
“너 집에 들어가야지.”
지안이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오늘은 안 들어갈래요.”
“그럼 더 화내신다.”
“오빠가 맞았잖아요. 잠깐만 얼굴 좀 봐요. 많이 아팠어요?”
“괜찮아, 난. 네가 집에 안 들어가면 내가 더 곤란해져.”
“아이 참! 오빠가 맞아서 신경질 나 죽겠는데!”
한숨을 내뱉던 태준이 차의 방향을 틀었다.
“그럼 잠깐만 쉬다 가자.”
20분 후 차가 도착한 곳은 호텔 앞이었다. 어머나? 지안이 눈을 새초롬하게 뜨니.
“안 잡아먹는다. 걱정 마.”
“…….”
“나도 지금 우리 집에는 못 들어가. 이준이 형이 집 주소 알고 있어서.”
“…….”
지안과 태준이 차에서 내렸다. 호텔로 걸어가면서 그가 손을 잡으려는지 손끝이 스쳤다. 움찔 놀란 지안은 일부러 손을 피했다.
아직도 계약 연애인지 뭔지도 모르겠고, 손만 잡아도 감정이 뭉게뭉게 부풀어져서 그에게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만 설레, 이 못난 가슴아…….
돌연 그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지안이 의아한 눈으로 태준을 바라보고 있는데. 태준이 진지한 눈빛으로 입술을 떼어냈다.
“오빠가 미안하다. 오랫동안 좋아해서.”
“…….”
“너 고작 스무 살인데. 스무 살 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놈처럼 달려들어서 미안해.”
“…….”
뭐라는 거야…….
“좋아한지 꽤 됐어. 너 중2때부터 보고 있었으니까.”
“…….”
이것도 연극 같은 건가. 하도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니까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잖아. 심장박동이 미쳐 날뛰면서 둥둥둥둥 고막을 때렸다.
***
“윤지안! 너 어디야! 언니 미치는 꼴 보려고 이래?”
수아는 음성사서함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전화 안 받아? 그 자식이랑 있지 말고, 빨리 집에 오라고! 언니랑 형부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준은 태준의 음성사서함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야 인마! 전화 안 받아? 감히 누구한테 개수작이야? 그 좋은 머리로 여자애들한테 그딴 식으로 작업하냐? 야이 개새끼야! 내 처제 건들지 마! 너 가만히 안 둔다! 딱 자기만 해! 어? 끝장을 내줄 거야!”
수아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머. 진짜 자면 어떡해……. 여보. 어떡해요. 응? 변태 같은 자식한테 제대로 걸린 것 같은데…….”
이준은 다시 폰을 붙잡고 지안의 음성사서함에다 퍼부었다.
“처제! 나쁜 새끼한테 꼬여서 정신 못 차리지! 너 자면 안 된다! 외박하면 호적에서 파버릴 줄 알아! 어른들 하는 말 들어서 나쁠 거 없다고 했지! 다 너를 위해서라고, 제발!”
***
호텔 안으로 들어온 지안은 폰을 켜보고 깜짝 놀랐다. 음성메시지에서 고함을 어찌나 지르는지 형부는 목이 쉰 듯했다.
“지금 안 잘 건데. 오빠가 안 잔다고 했는데……. 왜 지나친 걱정들이야…….”
아까는 화가 났지만 좀 누그러졌다. 가슴을 졸이며 걱정하고 있는 가족을 생각하니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외롭지 않았다.
고마운 그들이 지금 너무 흥분해 있는 상황이므로 일단 안심하게 해야 했다. 하지만 전화할 용기는 나지 않아서, 지안은 형부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부.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언니. 미안해. 그동안 키워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문자를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오해할 만한 발언이었다. 그 시간. 수아는 유서처럼 섬뜩한 문자를 받고 도리질을 했다.
“뭐야. 지안이가 왜 이런 문자를……. 여보. 지안이가 나한테 맞았다고 나쁜 생각하는 거 아니겠죠?”
이준도 놀라서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죽겠다는 것인지 정말 감사하다는 것인지, 타이밍이 절묘했다.
“아닐 거야. 그만한 일로 죽기는…….”
이준은 수아를 꼭 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포근한 달빛이 두 사람 등 뒤로 내려앉았다.
호텔 룸 테라스에 선 지안은 멋진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것처럼.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려는데, 태준의 손이 더 빨랐다. 태준이 지안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유사 연애 말고, 진짜 연애 할래?”
“…….”
지안은 대답 대신 눈을 맞추고 방긋 웃었다. 올라간 입꼬리와 뺨이 광대를 압박하면서 볼이 터질 듯했다.
“왜 웃기만 해.”
“…….”
이런 순간이 오다니. 친구들 사이에서 애교쟁이인 지안은 병아리 같은 목소리로 낭랑하게 외쳤다.
“윤지안. 좋아서 기절~~~!”
풉, 큭큭,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태준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고, 지안은 부끄럽지만 행복해서 꺄르르 넘어갔다.
배를 잡고 웃던 지안이 쪼그리고 앉았을 때 태준이 싱그러운 미소를 띠며 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강아지 같은 녀석이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아까 하던 거 계속 하고 싶은데.”
“맞기 전에 하던 거요?”
“어.”
“…….”
눈을 끔뻑이던 지안이 침을 꿀떡 삼켰다. 아, 창피해. 긴장하다 보니 절로 그렇게 된 거다. 태준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워졌다.
“오빠랑 오늘부터 1일이야.”
태준이 지안의 입술을 천천히 머금었다. 맞닿은 살갗이 간질거리면서 찌릿찌릿 했다. 입술을 가지고 노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와, 달다. 달아……. 꼭지는 꼭지대로, 입술은 입술대로 달다. 본격적으로 태준의 혀가 지안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형부는 아예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들의 뜨거운 연애는 이제 시작이었다. 곧 한태준은 강이준에게 좀 더 맞을 예정이었고, 지안은 수아에게 머리채를 뜯길 예정이었다.
비로소 윤지안 주연의 드라마 <눈사람>은 11년 만에 끝이 났다. 22년 동안 방송 됐던 <전원일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사춘기 성장을 소재로 한 <눈사람>은 꽤나 장수한 드라마였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죄로 두 사람의 연애는 많은 질타와 감시를 받으면서 진도를 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는 사랑은 미치도록 뜨거운 법.
우는 팬티 씨와 애교쟁이 씨는 여러 모로 찰떡궁합이었다. 찰떡, 찰떡, 찰찰떡.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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