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95)

<외전17화>

대한민국 성인남녀의 팬티를 모조리 젖게 한 장본인, 우는 팬티 씨가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눈앞으로 다가왔다. 

필명은 도무지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대단히 자극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후, 후, 윤지안. 진정하자…….

두 사람은 예매해놓은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팝콘 먹을래?”

“네.”

지안은 팝콘쟁이. 그 향긋한 버터향과 바삭거리는 식감이 좋아서 손에 기름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데 남자와 같이 영화를 보려니 손에 번지르르하게 기름기가 묻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지안은 물티슈를 챙기면서 태준에게 물었다. 

“오빠는 팝콘 안 먹어요?”

“난 네 거 먹을 건데.”

“…….”

돈도 많으면서 1인 1팝콘 하지 않고 왜 내 것을 먹겠다는 건데요! 하면서 맹견처럼 달려들었다가는 로맨스가 파괴된다……. 

팝콘을 먹다가 손이 닿으면 어떡하지. 걱정스러운 지안은 팝콘 통을 아기마냥 꼭 껴안고 그를 따라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곧 불이 꺼졌다. 코 밑으로 그 좋아하는 팝콘 냄새가 풍겼고, 옆자리에서는 상큼한 향이 실려 왔다. 정말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여자친구랑 올 때는 자리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체격이 좋은 남자와 오니까, 팔이 닿았다. 어깨를 살짝 좁혀야 했다. 갑자기 그의 향기로운 숨이 가까워졌다. 

“예뻐.”

“…….”

오빠는 고막 앞에서 짜릿하게 속삭이고는, 멀어졌다. 어디가 어떻게 예쁜 건데요. 자세하게 말해줄래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허덕이는 여자처럼 보일까 봐 겨우 참았다.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서 주변이 어두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 참. 예쁘다는 말 처음 듣는 사람처럼 나 왜 이래. 좀 들어봤단 말이야. 언니 닮아서 예쁘다는 말. 그것도 무지하게. 

“팝콘 안 먹어?”

“아, 네. 먹어야죠…….”

지안은 팝콘 서너 개를 손에 쥐고 입가에 묻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팝콘을 먹기 시작했다. 와구와구 먹어줘야 제 맛인데 이렇게 힘들게 팝콘을 먹기는 처음이었다. 

어라. 오빠의 손이 팝콘 통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팝콘 통을 안고 있으므로 그의 손이 가슴 부근에 올 때 바짝 긴장이 됐다. 

가슴을 만지려고 손이 오는 게 아닌데, 내가 왜 이러누……. 

지안은 숨을 참았다가 오빠의 손이 왔다 간 다음에 팝콘을 한 주먹 쥐어서 조금씩 입에 넣었다. 또 오빠의 손이 왔다 갔고, 지안은 그 사이 주먹 가득 팝콘을 쥐었다. 

그러기를 몇 번쯤. 꼭 내가 팝콘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이렇게 나를 방어할 필요가 있나 싶을 무렵. 

헉. 미처 방어하지 못한 다른 손에 오빠의 손이 닿았다. 지안은 움찔했다. 깜짝 놀랐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가 손등을 엄지로 슬며시 쓰다듬었다. 

심장이 정신없이 콩콩콩콩 뛰었다. 오빠의 귀에 내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닐까?

이제는 팝콘 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손이 지안의 손 전체를 덮고 있었다. 오빠의 커다란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만지고 놀았다. 탐색하는 것 마냥 천천히 즐겼다.

손에 제법 땀이 났다. 내 손에만 나는 것 같은데. 다한증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어느 순간 오빠는 손을 꼭 잡았다. 

상영하고 있는 영화는 액션 영화였다. 비행기와 차가 폭발하고, 총질이 난무했다. 피가 튀기는 건 예사였고, 잘려진 다리가 무덤에서 툭 튀어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지안은 오직 그의 온기에만 신경이 가 있었다. 뽀드득거리는 눈밭에서 손을 잡고 걷는 것처럼 포근하고 따스했다. 내가 미쳤어…….

잠시 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고, 불이 켜졌다. 

“팝콘 안 먹었어?”

“네. 영화가 재미있어서 깜빡했어요…….”

결국 팝콘을 먹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세상에. 남자한테 빠져서 팝콘을 못 먹다니…….

불이 켜지고도 손을 잡고 있는 건 너무 어색했다. 지안은 딴청을 피우며 손을 뺐다.

사람이 가득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구겨 넣고 오빠와 몸이 거의 겹쳐졌을 때는 정말 모든 피가 얼굴로 몰리는 듯했다. 귓불까지 새빨개진 지안이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그러나 몸이 맞붙어 있어서 오빠의 단단한 몸 근육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머리 하나가 큰 남자여서, 그의 가슴팍에 지안의 얼굴이 부딪쳤다. 

또 꼭지를 빨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번에는 얼굴에 빨강 물감을 바른 듯 시뻘게졌다. 맨몸 아래에서 느꼈던 갈증은 뭐였을까……. 

그는 지안이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 않도록 팔로 감싸 안아 지안을 보호했다. 첫 데이트일 뿐인데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모든 것이 둘이 함께이기 때문에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계속 혼란스러웠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강렬한 감정에 몸과 마음이 풍덩 던져진 것 같았다. 

헤어 나오려 해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심장이 끊임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곧 그의 차를 탔고, 차는 출발했다.

Rrrrr~~~ 오빠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으면서 통화 버튼을 누른다는 게, 실수로 스피커폰 모드로 바꾼 듯했다. 

난데없이 형부 강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한 상태였다. 

-어이, 한태준. 뭐하냐.

“아. 누구 좀 만나고 있습니다.”

-누굴?

“…….”

태준은 옆에 있는 지안을 힐긋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는 사람이요.”

-아는 사람 누구?

두 사람이 많이 친한가. 누굴 만난다고 하면 다 아는 거야? 간이 조마조마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행여라도 오빠가 형부한테 내 이름을 들먹일까 봐.

“……그냥 뭐.”

오빠가 뜸을 들이며 대답하자, 형부는 키득 웃었다. 

-아. 여자구나?

“…….”

-이야. 맞나보네. 내가 한태준 데이트 하는 거 본 적이 없어서 남자 좋아하나 했는데.

“그럴 리가요.”

-예쁘냐.

아, 형부. 경박하게 왜 그런 걸 물어요……. 지안은 괜히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태준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예쁩니다.”

후, 후, 후…….

-얼마나.

아, 형부. 쫌…… 양아치 같이 그러지 마요……. 예쁘다고 하면 예쁜 줄 알지, 얼마나 예쁘냐고 왜 묻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지안은 태준이 무슨 말을 뱉어낼지 그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더 예쁜 여자는 본 적 없는데요.”

꺄아아악~~~ 돌고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하하하. 내 와이프보다 예쁠 리는 없고. 도통 여자 안 만나던 네가 데이트를 하고 있으니 수상한데? 이루나가 대시해도 별로라고 하더니.

응? 이루나? CF 한 편에 10억 받는 그 예쁜 이루나? 완성형 미모를 가진 연예인으로 인정받는……. 아, 짜증나. 좋았던 기분이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이만 끊습니다.”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던 지안이 물었다.

“연예인 이루나 말하는 거죠?”

“초등학교 동창이야.”

“친해요?”

“딱히.”

“…….”

딱히, 라는 말은 썩 친하지 않은 거지? 이루나한테도 대시를 받다니 왜 이렇게 인기가 좋은 거야. 얼마 전 이루나의 수영복 화보를 보고 여자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쳇.

그러고 있는데 네비로 쓰고 있는 폰에서 벨이 울렸다. 하필이면 발신자는 이루나였다.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안 받아요?”

“나중에 하지 뭐. 지금은 너랑 있잖아.”

“…….”

그 말이 지금은 너랑 있고, 나중에는 이루나랑 만나겠다 뭐 그런 말로 들렸다. 딱히 친하지도 않다면서 왜 전화가 오는 건데. 

이루나랑 진짜로 사귀면 되지 왜 나한테 장난을 쳐? 고까운 마음이 들어서 밥이고 뭐고 다 싫었다. 도저히 이 기분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씩씩대지 않기 위해 숨을 골랐다. 

“그냥 집에 데려다 주세요.”

“왜. 밥 먹기 싫어?”

“……네.”

“왜.”

“…….”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계약 연애? 석 달 후에 끝나는 데도 감정은 진짜잖아. 나는 설레고 또 화가 난다고! 질투에 휩싸여서 몸에 살기가 돌고 있는데, 밥은 얼어 죽을……. 

차는 지안이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지안은 차에서 내린 후 문을 닫았다. 태준도 운전석에서 내렸다. 약이 오른 지안은 태준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머리가 팽팽 돌았는지 앞뒤 분간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만 둬요. 계약 연애 따위는.”

“왜. 난 이유를 알아야겠다.”

아니, 진짜…… 

“오빠 꼭지는 뭐 금꼭지예요? 실수로 한 번 빨았다고 난리를 치게?”

태준이 미간을 구부리며 지안의 말에 귀 기울였다. 

“저는 교회 오빠 같은 스타일 좋아해요. 오빠랑은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교회 오빠?”

“네. 없던 일로 해요. 그만 가세요.”

“…….”

자존심을 한 방 긁어주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인 거였다. 오빠가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서 지안은 뒤로 돌아섰다. 

“그럼 내가 교회 오빠면 되나?”

“…….”

무슨 말 하는 거야. 지안이 몇 걸음 걸어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얄궂은 기도문이 들렸다. 

“개새와 씹새를 구분하게 하시고, 다만 짭새로부터 구하소서. 아멘.”

“?”

성큼성큼, 커다란 발자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다가온 태준이 지안의 팔을 붙잡아 몸을 돌려세웠다. 

“읍!”

그리고 지안의 입술이 태준에게 잡아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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