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6화>
머리가 뺑 도는 것 같았다. 추리 소설도 이렇게 극적으로 전개가 되지는 않는데, 이 오빠의 말은 럭비공처럼 튄단 말이지.
“스, 스킨십도요?”
“제한을 둘 거야?”
“…….”
“자연스럽게 갔으면 좋겠는데. 마음이 맞으면 할 수 있는 데까지.”
“…….”
혼자 상남자 같은 소리는 다 하고 앉아 있네. 최근 들어 로맨스 소설에 입문하면서 계약연애를 꿈꾼 적이 있기는 한데.
음, 외모로 치자면, 오빠는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는 도무지 생각하지 않고 혼자만 지나치게 우월한 신인류였다. 게다가 보통 사람의 1.5배 지능을 가지고 있다.
오빠의 끔찍한 징크스를 불러온 장본인이자, 3일 동안 마음을 졸이며 밤잠을 설쳤던 가해자로서, 그리고 으~른 세계에 대한 막연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여성으로서 솔깃하긴 했다.
오빠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닌데, 이렇게 되고 보니 그동안 불편했던 감정들이 오빠에 대한 호기심이었나 헷갈리기도 했다.
“저기, 우리 형부랑 어떤 사이에요?”
“예전에 내가 썼던 남자 주인공 직업이 건축가여서 인터뷰를 해도 되겠냐고 메일을 보낸 적 있어. 흔쾌히 응해주셔서 그 후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고.”
“두 분 사이가 아주 가까우니까, 우리 집에 샤워하러 오신 거잖아요.”
“뭐, 호형호제하는 사이지.”
“그럼 우리가 계약연애를 하는 게 불편하지 않겠어요?”
“…….”
또 피식, 피식 웃는다. 그러다가 오빠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비밀로 할 거잖아.”
“…….”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입꼬리는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었고, 새까만 눈은 별을 박은 듯 반짝였다.
“왜 하필 저예요?”
“너한테는 간도 떼 줄 수 있으니까.”
“…….”
그 놈의 간……. 지안은 이 오빠와 함께 각각 수술 모자를 쓰고 수술 방에 실려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도리질을 하던 지안이 넌지시 물었다.
“우리 형부는요?”
“…….”
“우리 형부가 간이 아프면 형부한테도 간 이식 해줄 거예요?”
“…….”
오빠는 대화가 재미없는지 갑자기 눈앞에서 아예 딴 짓을 했다. 사람 무안하게. 오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휘휘 젓던 빨대로 커피를 묻혀서 하얀 탁자 위에 낙서를 했다.
심심해진 지안이 무심하게 눈을 창밖으로 돌리니, 길 맞은편에 높은 교회 건물이 보였다. 십자가가 이 곳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오빠도 십자가를 탁자 위에 그리고 있었다. 아주 열심히 말이다. 이 오빠, 종교 있었나? 들은 적 없는데.
[감사가 ○○이 되게 하라.]
뭐지? 교회에서 내건 현수막이 가로수 때문에 살짝 가려져 있었다. 지안은 안 보이는 글자를 보려고 상체를 기울였다. 고개를 옆으로 빼꼼 내밀었더니 글자가 보였다.
감사가 일상이 되게 하라. 아, 정말 좋은 말씀이구나…….
상체가 사선으로 넘어가 있어서, 순간 십자가가 비스듬하게 보였다.
으응? 아!!!!!
“…….”
“…….”
이거였어!!!
핵소름. 지안은 머리에 도끼를 맞은 듯 전율하며 오빠의 낙서를 다시 봤다. 십자가가 아니라 엑스였다.
그는 대화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었다. OX에서 X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던 거다.
‘우리 형부가 간이 아프면 형부한테도 간 이식 해줄 거예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엑스, 엑스, 엑스, 엑스, 엑스, 엑스, 엑스…….
저렇게 엑스를 심하게 그려놓은 걸 보니, 우리 형부에게는 피 한 방울도 수혈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아이큐 163이 보내는 신호를 또 한 번 알아들은 거다. 이상하게 자꾸만 통한다……. 내 짝인가…….
***
“누군데요? 그 작가님이! 소개 시켜준다면서요!”
수아는 궁금해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이준은 민준의 돈가스를 잘라주며 빙긋 웃었다.
“한태준.”
“뭐라구요? 한태준?”
수아는 숟가락을 놓고 흥분했다.
“와. 진짜 한태준? 빨리 약속 좀 잡아줘요! 그 작가님 계약만 따내면 나 진짜 앞으로 5년은 편하게 직장생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쎄. 얼마 전에 전화했을 때 신작 준비 중이라고 바쁘다더라고.”
지안은 음식물을 넘기지 못해 억지로 물을 마셨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바쁜 사람을 만나서 어쩌려고 그래…….”
“어떡하긴! 차기작이라도 우리 출판사와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매달려 봐야지! 작가 섭외하려고 목을 매는 것도 언니 일이야! 이때까지 작가들한테 아마 500번은 까였을 걸? 근데 아는 인맥이라도 있어 봐. 섭외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잖아.”
“…….”
소희 오빠가 한태준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지안은 돈가스 빵가루가 목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한태준이 보통 작가야? 최고의 스타작가잖아. 한태준 작가 팬덤은 군대처럼 막강하다는 거 몰라? 책만 냈다하면 첫 주에 바로 판매량 1위에 올라가는데. 저번 책은 100만부 파는데 최단 기간 기록 세웠어.”
이준은 수아의 빈 국그릇에 미소된장국을 조금 더 퍼서 놓아주었다.
“내가 다시 한 번 전화 걸어볼게. 아내가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한 적은 있는데 그 후로 다시 물어보진 않더라고. 워낙 많은 제의가 들어오니까.”
수아는 나름 애절한 눈빛이었다.
“알죠. 눈만 뜨면 계약하자고 사방에서 메일이 날아올 걸요. 근데 직접 만나서 말이라도 한 번 건네 보고 싶어요. 바로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욕심이 나서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깨톡.
“지안아. 네 건가 본데?”
“아…….”
지안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톡을 확인했다.
[내일 2시.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밥상머리에서 한태준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첫 데이트다…….
나, 설마 정신없이 빠지는 건 아니겠지? 언니랑 형부한테 들키면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소희는 무슨 낯짝으로 본단 말인가……. 내가 미쳤어……. 생각할수록 걱정거리가 쌓여만 갔다.
다음 날. 걱정과 다르게 지안은 10시부터 옷장을 열어젖혀 옷을 죄다 꺼냈다. 이 옷을 입어보고, 저 옷을 입어보고, 방구석 패션쇼를 하고 있는데 민정에게서 문자가 왔다.
[점심 때 돌돌파스타 먹으러 갈래?]
[아니. 나 약속 있어.]
[무슨 약속? 누구 만나는데?]
민정, 소희와는 절친이라 거짓말을 하려니 참 미안했다. 그러니 성심을 다해 거짓말을 해야 했다.
[예전에 미술학원에서 잠깐 같이 수업 들었던 앤데, 얼마 전부터 계속 연락이 오더라고. 그래서 만나기로 했어.]
[어머머머~ 이 기집애가! 그렇게 남자한테는 관심 없다더니 세상에! 데이트 하는 거야?]
[뭐, 데이트라기보다는 그냥 밥 한 끼 하는 거지.]
[누군데! 누구? 안 가르쳐줄 거야?]
[갔다 와서 말해줄게:)]
[아, 궁금해 죽겠잖아!]
[ㅋㅋㅋㅋ]
[나 이런 거 절대 못 참는다고!]
지안은 원피스를 벗고 스키니 바지를 입으면서 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언니랑 형부 눈에 띄면 안 되니까요. 데리러 오지 마세요.]
[알았다. 그럼 어디서 볼래?]
[영도 상가에서 봐요.]
[ㅇㅇ]
지안은 거울 앞에서 스키니 핏을 보며 민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치마 입고 갈까? 바지 입고 갈까? 뭐 입지?]
[당연히, 치마.]
“응?”
당연히, 치마. 라고 답을 보낸 건 태준이었다. 어머나! 민정이한테 문자를 보내려 했던 건데, 실수로 태준에게 보낸 거였다.
으악~~~! 창피해~~~! 잘 보이려고 애 쓰고 있는 것 같잖아! 어떻게 수습해야 되지?
시크하게 보이고 싶었는데 처음부터 쪽팔림 대참사였다. 근데 치마를 입고 오라고? 뭐야. 남자 아니랄까 봐……. 흥. 심술이 살짝 나려는데 문자가 연거푸 들어왔다.
[라고 말하는 새끼들은 앞으로 만나지 마라.]
[넌 뭘 입어도 예뻐.]
음……. 순식간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솜사탕으로 가슴을 간질이는 기분인데. 위험한 것 같아. 정신 차려야겠다…….
결국 지안은 정장 느낌이 살짝 나는 원피스를 입었다. 오빠가 8살이 많으니 너무 어려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안은 언니의 좋은 가방을 훔쳐서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약속장소는 가까웠다. 상가 안으로 들어온 지안은 거울을 보고 싶어서 화장실로 왔다. 전체적인 스타일이 괜찮은 것 같다. 거울을 보고 한 번 웃어본 후 지안은 화장실을 나왔다.
아! 나오자마자 오빠가 바로 눈에 띄었다. 지안은 숨을 안으로 들이켰다.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키가 무척이나 큰 오빠는 창가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는데, 오빠의 실루엣 뒤로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개기일식 때 어두운 달 뒤에 태양이 숨겨진 것처럼.
오빠가 이쪽을 보더니 해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오빠를 감싸는 거대한 빛의 무리들이 함께 움직였다. 자체발광의 정석을 보여주는 남자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안도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다가. 허걱!!! 지안은 발밑에 물컹한 것을 밟고 경악했다. 쥐 대가리를 밟은 느낌과 흡사했다. 소름이 끼친 지안이 덜덜 떨며 발밑을 바라보니.
하, 하, 하, 다행히도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버린 슬라임이었다. 그때였다. 번개를 맞은 것처럼 머리에 강렬한 것이 꽂혔다. 불현듯 오빠의 필명이 떠올랐다.
세상에. 오빠의 19금 필명은…… 우는 팬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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