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95)

<외전15화>

음식물 쓰레기를 훌훌 버리고, 지안은 놀이터로 달렸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라도 그에게 가야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오빠의 필명이 궁금해졌다. 그는 보통 한태준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쓰지만 19금을 썼을 때는 필명이 달랐다. 무슨 팬티였는데. 뭐더라? 묵은 팬티? 슬픈 팬티? 삼각 팬티? 찢은 팬티? 

흐음. 오죽빨의 저자 한태준 씨의 19금 필명을 네이버 검색창에 직접 쳐보고 싶진 않은데. 

밥맛이 홀랑 떨어지는 소설 ‘오늘만 살고 죽을 것처럼 빨아라.’는 어찌나 망측한지, 2년 전에 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제 읽은 것처럼 생생하다. 

[‘으읏……’

뒤로 해도 놀라고, 

‘하아……’

옆으로 해도 놀라고,

‘하읏……’

서서 해도 놀라고, 

‘아읏……’

거꾸로 해도 놀라고, 

‘흐응……’

다리를 하나 들어도 놀라고,

‘아윽……’

다리를 두 개 들어도 놀라고,

‘흐읏……’

눈을 가리고 해도 놀라고,

‘하앗……’

어떻게 해도 그녀는 놀랐다.]

이것 봐. 요가 자세도 토 나올 정도로 야하잖아……. 나만 토 나옴? 저 오빠 책을 보면 모든 게 야하게 보인다고! 

그의 책을 읽고 너무 기겁한 나머지, 다른 책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언니와 형부의 침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게 바로 그 오빠 때문이라고!

더 해달라고 소리 지르는 우리 언니의 색정적인 본능 따위는 정말 알고 싶지 않았는데……. 

오랫동안 침실에서 그 일을 치른 다음 날이면 항상 형부는 쌩쌩하고, 언니는 피곤에 절은 얼굴이었다. 마치 형부가 언니의 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런데도 형부를 바라보는 언니의 눈은 행복함 그 자체였다……. 

아, 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놀이터 근처로 다 왔다. 오빠는 어두운 놀이터 벤치에 덩그마니 앉아 있었는데, 유달리 그늘진 곳이어서 검은 저승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옷도 무채색 계통이었고. 

며칠 만인데 그는 상당히 초췌하게 느껴졌다. 끔찍한 징크스라더니.

“오빠…….”

지안은 조심스럽게 옆에 앉았다. 

“지안이 왔냐.”

“…….”

그 무거운 음성에, 지안은 놀래자빠질 뻔했다. 3일 동안 말 한 마디 안한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글 써져요?”

“아니.”

지안의 심장이 쿵 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러갔다. 내가 이번 작품을 망친 거야? 그는 쩍벌 포즈였는데 무릎 위에 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후우, 하고 땅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어찌나 깊은지 땅속 마그마가 일렁거리는 듯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어, 어떡해요, 오빠……. 진짜 하나도 안 써져요?”

“…….”

연거푸 내뱉는 숨소리는 이미 사람 숨소리가 아니었다. 저승에서 내쉬는 한숨이었다. 너무 미안해서 입을 닫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글이 안 써질 때 정말 힘들다고 하던데……. 식사는 하셨어요? 좀 마른 것 같아요…….”

“밥이 문제가 아니야.”

하고는 또 한숨 발사. 한국 사람이 밥이 문제가 아니면 정말 큰 문제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인데도 지안의 눈에는 그네가 출렁이며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드셔야죠. 글을 쓰시려면요. 제가 지금 밥 사드릴까요? 용돈이 꽤 있어요.”

“생각 없다.”

또 때려 박히는 깊은 침묵이여……. 그는 상체를 푹 숙인 채 뒤통수만 보여주고 있었다. 축 처져 있는 넓은 어깨는 마치 150연패의 늪에 빠진 운동선수 같았다. 

“저 때문에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니까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

“제가 정말 뭐라도 돕고 싶은데. 또 여자를 가까이 하면 안 된다고 하니까 어떻게 해야 될 지도 모르겠고요…….”

“지안아.”

그는 굽혔던 상체를 슬그머니 세웠다.

“네. 오빠.”

지안은 초조한 마음으로 오빠의 눈을 말똥말똥 바라봤다. 그가 바라봐주지 않아서 애가 타더니, 곧 눈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뭐든 도와주겠다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네. 말씀하세요, 뭐든. 금전적인 것만 아니면 저는 다 해 드릴 수 있어요.”

금전적인 건 안 된다고 미리 때려 박았다. 이건 3일 동안 생각한 거였다. 돈은 못 낸다.

“내가 원래는 여자를 만나면 절대로 글이 안 써진다. 절대로.”

“오빠. 절대 라는 건 없어요.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구요…….”

갑자기 오빠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고, 말에도 힘이 실렸다. 

“근데 지금 딱 운 좋게, 네가 필요하다.”

“…….”

그의 얼굴색 또한 급작스럽게 살아났다. 자체적으로 얼굴색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지안은 죽다가 살아난 것 같았다.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아, 정말요?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오빠가 징크스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과연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뭔데요? 금전적인 것만 아니면 저는 정말 괜찮아요.”

다시 한 번 더 금전적인 건 안 된다고 못 박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진짜 편하게.”

그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망설였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음…….”

지안은 궁금해서 목을 늘였다.

“뭔데요?”

“준비하고 있는 신작 말이야. 법의학자가 어떤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에 대해 파헤치는 건데, 거기서 죽은 남자의 치정에 관한 부분이 등장하거든.”

“치정이요?”

“응. 쉽게 말하면 로맨스지.”

“근데요?”

“그 부분에서 심각하게 막혔다. 도저히 감을 못 잡겠어. 연애한지가 너무 오래 돼서 말이야.”

“…….”

지안도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그걸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고개만 갸우뚱거리다가 지안이 되물었다.

“로맨스 소설이라도 읽어드려요?”

“…….”

태준이 음, 목을 가다듬은 후 말의 대가리를 직접적으로 꺼냈다.

“쉽게 얘기할게. 오빠한테 연애가 필요하다. 나랑 석 달만 연애하자.”

“…….”

“그러니까 계약 연애지. 석 달 후엔 무조건 끝날 거니까.”

“…….”

나한테 꼭지를 빨았다고 버럭하더니. 이 미친 오빠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임? 소희야. 너희 오빠가 나한테…….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의도하지 않게 콧방귀가 나왔다. 

“여, 연애를 하자구요?”

“어.”

“세 달 동안이요?”

“그 이상은 절대 요구하지 않을 거다.”

“절대?”

“어.”

콧방귀가 쉼없이 나왔다. 

“그러다가 오빠가 저한테 빠지기라도 하면요? 더 사귀자고 매달리면요?”

그 순간, 그가 피식 웃었다. 또 몇 번이나 피식, 피식, 피식 웃는다. 얘, 정말 쓸데없는 걸 묻네. 라는 듯이. 

피식거릴 때마다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았는데, 내가 콧방귀 낄 때 오빠가 이런 기분이었나?

“걱정마라. 난 너의 성욕을 식욕으로 느꼈다.”

“네?”

“네가 성욕이 좀 있어서 내 맨몸을 빨았나 본데.”

“…….”

아,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여…….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지안은 발끈했다.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목이 말랐던 것뿐이에요!”

“어쨌든 난 그걸 식욕으로 느꼈다. 문어 빨판이 붙은 줄 알았어. 네가 배가 고파서 문어처럼 내걸 뜯어 먹으려나 보다 했어. 그러니까 오해는 안 해.”

“…….”

이 오빠는 정말 교묘하게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아예 할 말이 없도록 사람을 몰아넣는 걸 보면, 그는 바람둥이+사기꾼+난봉꾼 기질이 다분해보였다. 지안은 심하게 어지러웠다.

“아니, 친동생처럼 생각한다면서요?”

역시 오빠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촘촘한 속눈썹을 내렸다가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아래 새까만 눈동자가 빛을 발하면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오빠는 작가야.”

“그래서요?”

“작가는 배우다. 슛 들어가면 몰입하고, 오케이 사인 나면 바로 빠져 나온다.”

“…….”

오빠는 미쳐 보이지 않으려고 대단히 노력하는 미친놈이 확실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지안도 미쳐버린 것인지, 묘하게 설득 당하고 있었다. 

“너한테 빨린 내 꼭지가 갈대처럼 맥락 없이 흔들린다 해도, 내 마음은 맥락 없이 흔들리지 않는다.”

“…….”

“그러니까 오빠 마음은 정확하게 석 달 후에 끝난다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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