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4화>
“빤 건 아니구요…….”
사람에서 홍당무로 변한 지안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자 태준이 제 손가락으로 가슴 부위를 탁 가리켰다. 지안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빤 게 아니고, 닿은 거죠…….”
닿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연유크림이 그의 상체에 묻어 있어서,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는 있을 수가 없었다.
괜히 공격했다. 본전도 못 찾고, 성질만 건드린 셈이 됐다. 그는 후우, 후우, 아주 괴로운 한숨을 토해냈다. 곧 죽을 사람처럼.
“나 원래 글 쓸 때는 여자 안 만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도 않고. 아주 지독한 징크스인데.”
“…….”
“여자를 가까이 하면 그 후론 아예 글이 안 써진다.”
“…….”
어, 어떡해. 나 때문에 스타작가님이 글을 못 쓰는 건가? 신작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지안은 완강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오빠. 저는 동생 친구니까 여자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럼 넌 남자냐? 내일 아침에 나랑 같이 사우나 갈 거야?”
“아, 습하고 더운 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는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고뇌했다.
“계약금 토해내려면 집을 팔아야 되나…….”
“…….”
허걱. 계약금으로 뭘 그렇게 많이 받으셨어요, 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지안은 똥줄이 타닥타닥 타들어갔다.
“오, 오빠. 어떡해요?”
“이거 좀 닦아줘 봐봐.”
“아, 네네.”
지안은 물티슈를 쏙쏙 뽑아서 그의 가슴 부분에 있던 연유크림을 닦았다. 남자의 맨몸을 닦아주려고 하니,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나저나 오빠의 몸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작가가 아니라, 운동선수처럼 울퉁불퉁했다. 얼굴이 더 불그스름해지기 전에 지안은 빨리 작업을 끝내고,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건 아시죠?”
“…….”
“글이 안 써지면 안 되는데…….”
“…….”
그가 티셔츠에 목을 넣는 중이라서, 지안은 그의 몸을 슬쩍 더 보게 됐다. 나 또 왜 이러는 거야…….
곧 티셔츠 구멍 사이로 그의 매끈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지안아. 난 널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
“네? 친동생씩이나요?”
“…….”
아, 속마음이 입으로 나와 버리다니!
“소희와 네가 각별하잖아. 그만큼 너도 나한테는 특별해. 나는 너한테 간이라도 이식해줄 수 있다.”
“……가, 간을요?”
살면서 이렇게 과격한 발언을 들은 건,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가끔 오가며 오빠를 만날 때 쥐꼬리만큼도 반긴 적 없는데, 왜 나에게 간을 덥석 떼어준단 말인가.
친동생이라는 말도 기절할 뻔했는데 세상에……. 지안은 귀신이라도 본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자, 장기는 공유하지 말기로 해요…….”
“신장 안 좋으면 언제든 얘기해라. 두 개 다 쌩쌩하니까.”
“오, 오빠아…….”
지안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여튼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소희의 친구라서 과할 정도로 애정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그의 징크스를 건드린 가해자였기 때문에 무지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오빠. 제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요, 뭐라도 도와드릴게요. 자료 조사 같은 거 시키셔도 돼요. 뭐든 말만 하세요. 뭐든지요.”
“…….”
오빠의 눈썹 한 쪽이 힐긋 올라갔다.
“뭐든?”
“네. 힘껏 도와드릴게요.”
흐음, 하고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그는 손을 척 내밀었다.
“지안아. 네 폰 내놔 봐.”
“아, 네네.”
지안은 소파 위에 두었던 폰을 공손하게 건넸다. 그랬더니.
“패턴 풀고.”
“아, 네네.”
지안은 패턴을 휘리릭 풀고 다시 폰을 드렸다.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Rrrrr~~~ 거실 선반 위에 있던 그의 폰이 짧게 울렸다.
“이거 오빠 번호다. 지금 당장 저장해라.”
“아, 그럴게요.”
이때까지 그는 친동생이라 생각했던 지안의 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지안이 ‘한태준 작가님’이라고 저장하고 있는데 곁눈질을 하던 그가 말했다.
“태준 오빠라고 하는 게 낫겠는데.”
“아, 네네.”
“네가 어떻게든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생각나는 게 있으면 톡 할게. 불러낼지도 모르고.”
“아, 언제든 톡 하세요.”
“그래.”
볼 일을 마친 오빠는 당당하게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나간 후 긴장이 풀린 지안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하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저 어버버하기만 했다. 혼자서 감당하기에 힘든 일이긴 한데,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다. 심장이 계속 쿵쾅쿵쾅 뛰었다.
***
그날 저녁 식사 시간. 지안은 밥상머리에 앉아서 이준을 슬며시 노려봤다.
형부는 왜 집에 사람을 불러서 샤워를 시키고 난리인가. 다른 집 수도 고장 나면 모조리 우리 집에 불러서 씻길 거야? 아예 목욕탕을 차리시죠?
“지안이 밥 맛 없어? 고기 구워줄까?”
“됐거든요, 형부.”
민준이 햇병아리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모는 왜 안 먹어? 어디 아파?”
“아니야. 먹고 있어.”
지안이 억지로 밥을 뜨려는데, 민준이 서툰 포크질로 오이를 찍어서 지안의 밥 위에 올려줬다.
“이모 오이 좋아하잖아.”
“…….”
폭풍 감동이 밀려왔다. 업어서 키운 보람이 있다.
“오구오구. 우리 착한 민준이 이모한테 오이 준 거예요? 이모는 민준이 덕분에 갑자기 밥맛이 돌아요. 근데 흙 밭에서 난 오이는 밥상에 올라오기 전에 샤워를 꼭 해야 되겠죠?”
“네. 오이는 샤워를 해야 밥상에 올라올 수 있어요.”
“근데 이 오이도 여기서 씻고, 저 오이도 여기서 씻고 그러면 우리 집은 집이 아니라, 오이 목욕탕이 되잖아요. 그죠?”
“아하하하. 저는 우리 집이 오이 목욕탕 되면 좋겠어요~~~”
“아니죠. 그건 좋지 않아요. 이모는 벗고 있는 오이 때문에 큰일날 뻔했거든요.”
수아는 지안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너 이번 달 용돈은 아껴 쓰고 있나 보네?”
“오구오구. 우리 민준이 밥 먹고 나면 이모가 동화 읽어줄게요. 다리가 짧아서 슬픈 어흥이 때문에 우리는 어제 눈물바다가 되었죠?”
“…….”
눈치가 이상했다. 수아가 이준을 흘겨봤다.
“당신. 지안이한테 또 용돈 줬어요?”
“……아니.”
“개념 없이 돈 쓰면 안 되니까, 계획에 맞게 소비하도록 내버려두라니까요. 자꾸 찔러 주지 마요.”
“…….”
이준과 지안은 딴청을 부렸다. 어쨌든 3일이 지났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지안은 방안에서 팔짱을 끼고 왔다 갔다 하며 폰만 봤다.
오빠. 글이 써져요? 라고 문자를 보내볼까 말까. 수백 번 고민했지만 위대한 작가님의 창작 활동에 방해가 될까 봐 그만 뒀다.
이 와중에 오빠의 맨몸 아래 깔렸던, 숨이 막히던 그 느낌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멍해졌다. 아, 변태는 나였어…….
지안은 주방에서 찬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지안아.
“뭐하니?”
-TV봐. 왜?
“아니, 그냥…….”
수화기 너머에서 오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안은 그들을 화면으로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왜. 너희 오빠가 왜.”
-별 거 아니야.
무슨 일이 있는 건데…….
“근데 너희 오빠, 글은 잘 써지신대?”
-몰라. 난 그런 거 안 물어 봐.
“……오빠는 계약금 많이 받지?”
-억대는 받을 걸.
“억?”
-응. 저번에 오빠가 계약금 받아서 페라리 산 것 같은데.
“…….”
실수로 꼭지를 한 번 빨았을 뿐인데, 페라리 한 대 값을 물어야 하나? 실컷 빨지 않았는데도…….
아니, 대한민국에서 무슨 이런 일이……. 아니, 나에게 왜……. 아니, 내가 뭘……. 차라리 넘어질 때 대가리가 터져서 죽었어야 했는데…….
지안은 아주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냈다.
“슬럼프 같은 건 없대?”
-예전에 한 번 온 적 있는데, 1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폐인이었지, 아마.
“…….”
창백해진 지안이 대충 전화를 끊고 넋을 놓고 있는데. 쥐고 있던 폰에서 소리가 들렸다. 깨톡. 감격스럽게도, 발신자는 태준 오빠. 심장이 심하게 벌렁댔다.
[지금 나올 수 있어?]
괴로워서 죽지는 않았군요. 오, 신이시여. 그를 지켜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안은 냉큼 답을 보냈다.
[네! 어디로 갈까요?]
[놀이터.]
[네. 바로 갈게요!]
지안은 방문을 활짝 열고 소리쳤다.
“언니!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올게!”
“웬일이야? 하기 싫다더니.”
수아는 단단히 밀봉한 음식물 쓰레기를 지안에게 줬다. 지안은 그것을 들고 냅다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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