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95)

<외전11화>

수, 수건 달라는 게 이렇게 이상한 말인가. 왜 이 오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다 야하게 들리는 걸까. 

“아, 드, 드릴게요.”

지안은 집주인도 아니면서 수건을 가지러 욕실로 달려갔다. 기다란 남자가 현관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숨이 막혔다. 지안은 손을 떨며 수건을 내밀었다. 

“여, 여기요. 수건.”

“그래. 고맙다.”

“…….”

고맙다고 하는 저 눈빛 좀 봐봐. 고마운 눈빛이 저런 거라면 평생 듣지 않는 게 낫겠어.

잠시 후 태준의 친구들이 도착했다. 소희는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길용이 오빠. 수찬이 오빠. 잘 지냈어요?”

“별 일이야 있겠니. 소희 이제 대학생이구나?”

“침 질질 흘리면서 땅에 떨어진 거 주워 먹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스무 살이야?”

“수찬 오빠. 그걸로 그만 놀리시죠!”

“농담이야, 농담.”

길용과 수찬은 먹거리를 더 사들고 왔고, 거실에 술상이 차려졌다. 지안이 민정 옆에 앉아 보쌈 한 점을 먹고 있는데 민정의 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민정은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더니 울상이 되어 나왔다.

“나 가야 돼. 아, 짜증나…….”

“왜?”

“엄마가 지금 당장 오래. 가게 봐 달래.”

민정이네 집은 편의점을 하고 있었다. 민정은 이제 술을 먹으려던 참이어서, 대단히 신경질적이었다.

“알바생이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에 갔다나. 우리 엄마는 좀 이따 지석이 데리러 가야 되고. 에잇. 고3이 무슨 벼슬이라고 매일 데리러 오래…….”

“어쩔 수 없네. 다음에 보자.”

“네. 오빠들. 다음에 봐요.”

민정은 인사를 하고 나갔다. 민정이가 가 버려서, 지안은 기분이 꿀꿀해졌다. 그래도 한 캔 마셔볼까. 

아침에 짧게 잘라버린 손톱 때문에 맥주 캔을 따기가 어려웠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손톱을 맥주 캔 고리에 걸었다. 아앗, 될 것 같았는데…… 실패. 

승부욕이 은근 발동하면서도 약간 짜증이 났다. 진짜 조금만 더 들어 올리면 되는데…… 에잇.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지안은 태준과 눈이 딱 마주쳤다. 심장이 철렁했다. 딴 짓 하다가 들켰을 뿐인데 뭘 주워 먹다가 들킨 사람처럼 놀라버렸다. 

태준의 손가락이 난데없이 까딱까딱.

“?”

모두의 눈이 집중되고 말았고, 그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까딱거렸다. 내 맥주 캔에 그의 손이 안 닿았으면 좋겠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캔을 내밀었더니, 그는 한 손으로만 캔을 잡고 중지로 탁! 소리 나게 딴 후 돌려줬다. 이게 한 손으로 되나? 지안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때 게임광인 소희가 자랑하듯 말했다. 

“오빠들 있잖아요. 나 게임 모니터 샀어요. 최고급 사양으로. 이번에 장학금 탔다고 엄마가 선물로 사주셨어요. 30분 전에 도착한 신상이에요~~~”

“우와. 어디 거야?”

“뭔데뭔데. 보여 줘.”

수찬과 길용은 벌떡 일어섰다. 역시 대부분의 남자들은 기계를 좋아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집주인 남자 하나는 멀뚱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기계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 정말 난감했다. 머리가 빠른 속도로 어버버해지고 있었다. 

어색해진 지안은 맥주 한 모금을 꿀떡 삼켰다. 그랬더니 그도 바로 앞에 놓인 소맥잔을 꿀꺽 들이켰다. 맥주 광고처럼 선명한 목 넘김 소리에, 귀가 펑 트이는 기분이었다. 

눈이 절로 그의 성대를 훑게 만들었다. 목울대가 요동치며 움직여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그러다가 태준과 눈이 또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지안은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목소리도 콩알 만해졌다. 

“사, 사과 깎아야지…….”

“내가 도와줄까.”

“아니요!”

“…….”

지안은 날쌔게 주방으로 갔다. 내 집도 아니지만 차라리 남의 집 주방에서 일을 하는 게 나았다. 

사과를 깎는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리겠지? 지안은 일단 사과를 씻고, 칼을 찾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매우 집중해서 껍질을 최대한 얇게 깎아내고 있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몸에 뭐가 들러붙은 것 같은데 뭐지……. 거실 쪽을 흘긋거리니, 그는 소파에 앉아서 이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사람과 눈이 딱 마주치면 눈을 피할 법도 한데 저 오빠는 그런 게 없었다. 약간 더워진 지안은 몸을 90도쯤 틀어서 그의 시선을 등졌다. 

곧 축축하게 젖어 있는 야한 저음이, 능구렁이처럼 스르르 넘어왔다.

“사과는 잘 벗기고 있냐.”

“…….”

헉. 사과를 어떻게 벗긴다고 말하니……. 척추를 타고 서늘한 느낌이 쭉 흘렀고.

“앗!”

지안은 손에 쥐고 있던 청사과를 놓치고 말았다. 상반신을 탈의한 사과는 툭 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렀다. 

마치 축구공이 되지 못한 한(恨)을 푸는 것처럼 청사과가 싱싱한 연두색을 자랑하며 거실 바닥을 질주했다. 

사과는 거실 끝에서 끝까지 구르다가 벽에 쿵 부딪치고는 멈췄다. 지안은 못 먹게 된 사과를 안타까워했다.

“어머. 어떡해…….”

하지만 천재 작가님의 시선은 남달랐다. 

“우리 예쁜이, 전치 24주 나오겠는데.”

“?”

그는 사과를 보고, 우리 예쁜이라고 했다. 

“갈비뼈 10개 아작 났을 거고, 쇄골 골절, 개방성 골반골 골절, 복합 개책골절에 비장도 세 조각쯤 났겠고, 췌장도 수습되려나. 떨어질 때 자세 보니까 대장이 심각하게 터졌을 텐데. 하트만 수술 밖에는 답이 없네.”

“…….”

그는 의학소설을 쓴 적이 있다고 했다. 죽을죄를 진 지안은 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트만 수술이 뭔데요?”

“인공항문 수술.”

“…….”

“인공항문 만들고 뱃가죽에 구멍 내서 배변 줄 밖으로 뽑아야 되는데, 저 정도면 장애등급 나올 수도 있겠다.”

“…….”

사과에 인공항문을 달다니……. 내가 웬만하면 욕 안 하는데. 에라이, 미친놈아…….

사과님을 사과 박스에 태우고 병원에 가야 되는 건가. 수액으로 사과즙을 달고? 

그는 미쳐 보이지 않으려고, 대단히 노력하는 미친놈 같았다. 

지안은 하도 얼이 빠져서 잠깐 고개를 저은 다음 물티슈를 뽑아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태준이 도와주려고 일어섰다. 

“내가 할게.”

지안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요! 앉아 계세요, 제발!”

“…….”

너무 큰 소리를 내 버려서 그가 좀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오빠가 엉덩이를 보이면서 바닥을 닦으면 진짜 토할 지도 모른단 말이야! 

지안은 엉금엉금 기며 바닥을 닦으면서도, 아직 등장하지 못한 딸기를 걱정하게 됐다. 늘 딸기는 꼭지를 따고 씻어서 반으로 갈랐었다. 만약에 딸기를 반으로 자른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 예쁜이. 두개골을 반토막 냈으니까 전치 40주.’

또 초록색 꼭지를 따면…….

‘우리 예쁜이. 머리 가죽을 벗겼네. 피부이식 해야 되니까 전치 50주.’

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바닥을 다 닦은 지안은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딸기님의 초록색 헤어를 그대로 붙인 채 흐르는 물에 씻기만 했다. 씻은 딸기를 채에 받쳐 물기를 빼고 있는데.

응? 주방 조명 나갔나? 왜 이렇게 어두워? 동시에, 알싸하게 싱그러운 향이 주방을 점령했다. 불안해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헉! 어느새 위험한 이 오빠는 바로 뒤에 와 있었다. 그가 뭔가를 내밀었다. 응?

“아, 내 정신 좀 봐…….”

바닥만 닦고 사과를 주워오지 않았던 거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그의 작가적 관찰력은 정말 견디기 힘들 만큼 뜨거워서 정신이 없었던 거다. 

지안은 반쯤 헐벗은 아찔한 사과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머리도 깍듯하게 숙였다. 

“고맙습니다.”

마치 경찰 총장 앞에서 표창장을 받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고마울 일은 아닌데, 그가 가까이 있으니 뇌가 고장난 거였다. 

그리고 떨어진 사과를 주워줬으면 볼 일이 끝났을 텐데, 그는 지안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왜 안 가니, 왜……. 나한테서 왜 안 떨어지고 있니, 너는…….

그의 자존감 있어 보이는 눈매와 정교하게 떨어지는 콧날이 거실 조명 때문에 입체적으로 도드라졌다. 

맑은 피부와 집요한 눈빛은 흡사 야한 초능력을 가진 뱀파이어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그는 주변을 힐긋 살폈다. 거실에 둘 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가 얘기했나?”

“뭐, 뭘요…….”

“…….”

“…….”

긴 침묵이 때려 박혀서, 지안의 심장이 콩콩콩 뛰었다. 실수로 수술대에 오른 것만 같았다. 

딱히 아픈 데가 없는데, 의료진이 배 한가운데에 빨간 소독약을 넓게 바르고 있는 것처럼 몸이 심하게 뻣뻣해졌다. 뭐지? 뭘 얘기했다는 거지? 응?

긴장이 최고조에 도달할 때쯤. 태준의 약간 홈이 파진 아랫입술이 슬며시 벌어졌고, 지안의 세상은 또다시 10배 느리게 재생됐다. 

그는 1초의 시간을 1/10초씩 쪼개서 촤라락 펼치는 마법을 부리는 남자였다. 시간이 느려진 틈을 타고, 19금 장인의 쌔끈한 숨소리가 지안의 고막 앞에서 에로틱한 바람을 일으켰다. 

에로는 에로인데, 보통 에로가 아니었다. 모텔에서 월세로 살고 있는 노총각이 옆방에서 나는 소리를 엿듣다가, 정말 아무 한 것도 없이, 맹세코 지 팬티에 손 한 번 못 올려보고, 허망하게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르는 초강력 에로였다. 

지안의 달팽이관이 신음, 또 신음하며 부르르 떨고 있는데. 공기반 소리반인 그 끈적한 음성이 기습적으로 훅, 치고 들어왔다.

“너한테, 풋사과, 향이 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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