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8화>
언니가 조카를 낳는 건 너무 기쁜 일인데, 기다려왔던 일인데,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나오면 나는 언니와 형부 사이에 절대 개입할 수 없게 된다. 개입해서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중2병은 사춘기와 함께 슬픈 짝사랑을 앓게 했다. 항상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겨주고, 학교에 데려다 주고, 학원 앞에 데리러 오는 건 형부였다.
아빠가 아니므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와 한 집에서 사는데, 언니의 남자인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 슬프고, 기구한 사연이었다. 그리고 못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언니한테는 종종 신경질이 났다.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언니가 해준 음식은 맛없다고 툴툴 대고, 별 것도 아닌 일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윤지안! 너 도대체 왜 이러는데!”
“형부 머리는 아침에 봐도 말짱한데, 언니 머리는 매일 떡져서 짜증나서 그런다, 왜!”
“뭐어?”
“자꾸 공부 가지고 건들면 나 집 나갈 거야!”
“내가 뭘 어쨌다구…….”
임신 중이라 감정의 기복이 심한 수아는 눈물이 글썽했다. 아침 준비를 하다 말고, 이준이 언성을 높였다.
“윤지안! 너 언니한테 버릇없게 이럴 거야?”
“형부는요! 제 맘 몰라요오……. 흐윽흐윽…….”
수아한테는 드세게 대들었던 지안이 이준의 한 마디에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아무도 내 맘 몰라……. 흑흑…….”
지안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아이였다. 혼자 드라마 <눈사람>을 찍고 있었다. 처제가 형부를 좋아하는 스토리인데, 오래된 mbc 드라마였다. 드라마 속 주인공인 지안은 토요일 아침부터 집을 나갔다.
“얘가 정말 왜 이래…….”
수아는 속이 타들어갔다. 지안의 감정을 수아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동생을 미워할 수도 없다. 부디 이 파란만장한 사춘기가 빨리 지나가기를 빌 뿐이었다.
친구랑 놀다가 오면 기분전환이 되겠지 싶어서 놔뒀는데, 지안은 저녁까지 폰을 꺼놓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다.
“내가 찾아볼게. 집으로 올지도 모르니까 넌 집에 있어.”
이준이 우산을 쓰고 지안을 찾아 나섰다. 지안은 집 바로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종일 소희네 집에서 잘 놀았는데 집에 들어가려니 좀 그래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윤지안!”
“어? 형부…….”
지안의 심장이 벌렁벌렁.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언니가 수십 통 전화한 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형부가 자신을 찾으러 와준 사실이 몹시도 기뻤다. 형부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주러 온 백마 탄 기사 같았다.
“여기서 뭐해.”
“형부. 저 찾으러 왔어요?”
“어. 그만 집에 가자.”
“…….”
그윽한 목소리가 너무나도 달콤했다. 지안은 눈웃음을 지으며 이준의 큰 우산 아래 들어왔다. 지안은 이준의 굵은 팔뚝에 제 팔이 닿자 움찔 떨었다. 얼굴을 붉히며 혼자 여자 짓을 하고 있었다.
“비 맞는다. 더 안으로 들어와.”
“…….”
닿는단 말이에요……. 지안은 개미 코털만큼 살짝 몸을 붙였다.
“쓰읍. 더 붙어. 어깨 젖잖아.”
“…….”
쓰읍, 할 때 미간을 좁힌 모습이 개멋있었다. 지안은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아, 형부 어깨는 완전히 젖었잖아요…….”
“난 괜찮아. 너 비 맞고 감기 걸릴라.”
형부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나를 보호하고 있다. 형부도 어쩌면 나를……. 지안은 미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갔다.
“형부. 향수 뭐 써요?”
“향수는 안 써. 스킨로션만 써.”
걸음걸이가 맞지 않아 팔이 콱 닿자, 지안은 보조개를 만들며 수줍어했다.
“아, 닿잖아요……. 형부…….”
“뭐 어때서.”
“…….”
뭐 어때서. 금방 형부의 말에는 감정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다. 난 설레는데. 너무 설레는데……. 별안간 정신이 돌아온 지안은 기분이 샐쭉해졌다.
따뜻했던 우산 속으로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지안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슬픈 눈으로 이준에게 물었다.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줘요?”
이준이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지안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이준이 대답했다.
“가족이잖아.”
“…….”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아팠다. 이준은 지안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자신의 몸은 비에 완전히 젖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지안은 더 헷갈렸다. 화도 났다.
“언니한테만 잘 해주고, 저한테는 어느 정도 선만 지켜도 되잖아요. 그런데 형부는 어릴 때부터 저한테 아빠처럼 잘해줬잖아요! 아빠도 아니면서!”
“…….”
이준이 한숨을 훅 내뱉었다. 언젠가부터 지안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민한 시기니까 이러다 말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는데.
“수아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자랐지만, 너는 아버지가 없는 정서적 외로움을 느끼지 않길 바랐어. 내가 아빠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어.”
“…….”
형부는 아빠처럼 잘해주고 싶었는데 혼자 착각한 거구나. 아빠가 없어서 몰랐잖아…….
너무 고마운 말이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턱을 꽉 깨물고 곱씹을수록 형부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미친 거 알지만, 더욱 욕심이 나서 억지를 부리고 싶었다.
“금방 형부가 그랬잖아요. 우린 가족이라고.”
“어.”
“그럼 날 사랑하는 거죠?”
이준이 지안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사랑해. 가족으로서.”
지안이 물고 늘어졌다.
“그럼 똑같네요. 나랑 언니랑 똑같이 사랑하는 거예요. 똑같은 마음으로요.”
이준은 차갑게 들릴 지도 모르는 말을 기어이 내뱉었다.
“아니. 언니는 사랑해서 가족이 된 거고, 넌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
앞뒤를 바꾼 말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너는 여자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절대로 언니처럼 사랑을 받을 수는 없었다. 형부의 철벽같은 발언에, 미친 중2병이 화르르 도졌다.
“제가 20살이 되면 저랑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약속했으니까 20살이 되면 저랑 결혼해요! 5년 남았어요!”
“…….”
지안이 자신에게로 향한 우산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때였다. 번개가 쳤다. 멀지 않은 하늘에서 번쩍번쩍 금이 갔다. 고막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도 들렸다.
쿠구궁 쾅!!! 쾅쾅쾅!!! 마치 천벌을 받는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소름이 돋은 채로 서 있는데.
“지안아! 윤지안!”
“…….”
고개를 돌리니, 우산을 쓴 수아가 부른 배를 안고 뛰어 오고 있었다. 언니가 다 들었을 텐데. 어떡하지……. 언니한테는 들켜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지안의 얼굴이 더 하얘졌다.
그런데 수아는 비를 맞고 있는 지안에게 달려와 우산을 씌워주며 차가워진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손이 아주 따뜻했다.
“밥은 먹었어?”
“…….”
“…….”
“…….”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살인의 추억>이 따로 없었다.
송강호가 살인자로 추정되는 박해일을 한낱 애처로운 인간으로 보는 듯한 그 질문. 그 대사 하나에 드러난 인간애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던가.
감히 형부를 욕심내고 있는데 그런 질문을 받으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미안하고 또 창피했다.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떡볶이 해놨어. 주먹밥도.”
“…….”
“비 맞고 감기 걸리겠어. 빨리 들어가자. 응?”
“아흑흑흑…….”
지안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너무 나쁜 기집애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언니가 날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아는데…….
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정말 미쳤나 봐. 언니, 미안해……. 나 너무 못됐지…….
그날 밤. 빗속에서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던 지안은 끙끙 앓았다. 비를 많이 맞기도 했고, 마음을 정리해야 된다는 생각에 심리적으로도 압박이 컸다.
“어머. 지안아! 정신 차려 봐…….”
자기 전에 수아가 지안의 방에 들어와 보니, 지안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열이 높았다. 결국 지안은 응급실로 실려 갔다. 정신이 돌아온 건 링거를 거의 다 맞았을 때였다.
그때까지 수아는 지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지안은 죽을죄를 진 것처럼 미안했다. 천사 같은 언니를 두고 내가 형부한테 무슨 말을 했던가.
희미하게 눈을 뜬 지안을 보며 수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안아. 괜찮아. 넌 이제 중2야. 열다섯 살. 네 나이 때는 그럴 수 있어. 이해해. 인생을 길게 보면, 그런 마음은 아주 잠깐이야. 나중에 너한테 꼭 맞는 좋은 남자친구가 생길 거야. 물론 20살 넘어서 남친이 생기면 좋겠고.”
“…….”
“하여튼 지금 일은 나중에 키득거리면서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될 거야. 언니는 너한테 실망하지 않았어. 아무 걱정하지 마.”
“…….”
언니. 정말 지금 이 마음이 추억이 될까. 나도 간절히 그러길 바라는데 과연 그렇게 될까……. 지안은 불안한 듯 눈꺼풀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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