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화>
“삼일 뒤에 수학 쪽지 시험 칠 때 50점 받을게요. 조금 열심히 공부해서요.”
“…….”
일부러 천재성을 숨겨놓은 듯한 말투였다.
“어쩌면 60점 받을지도 몰라요. 형부가 약속해주면.”
“…….”
지안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자꾸만 내밀었다. 지안은 처음으로 가져보는 든든한 남자 보호자가 너무나 좋았다. 아빠 같으면서도 아빠는 아니었다.
수아가 살짝 열린 문 사이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이준과 눈을 맞춘 수아가 빨리 약속하라고, 지안과 새끼손가락을 걸라고, 공부 좀 시켜보라고 지안 몰래 눈짓으로 압박을 줬다.
이준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안과 손가락을 걸었다. 지안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처럼 사르르 녹는 눈웃음을 지었다. 도장도 찍고 아주 행복해 했다.
순진한 지안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언니의 남편이 될 형부와 나중에라도 결혼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음 날 아침. 푹 자고 눈을 뜬 수아는 팔을 옆자리로 뻗었다. 응? 허전하다.
“내가 또 늦었어…….”
수아는 눈을 비비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이준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아침 준비하려고 했는데…….”
수아는 이준의 뒤로 다가가 넓은 등을 살포시 껴안았다. 단단한 등 근육에 볼을 비비다가 시선을 도마 위로 옮겼다.
이준은 버터를 바른 식빵 위에 햄, 토마토, 계란, 야채 등을 올려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 부지런한데요. 매일 나만 늦잠이네.”
“굿모닝.”
이준이 고개를 돌려 수아의 이마에 입술을 쪽 갖다 댔다.
“내가 더 일찍 일어나잖아. 내가 하면 돼.”
“잠이 많아서 미안해요. 그동안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어, 정말.”
“아침에 덮치려다가 참았어. 코를 곯기에 피곤한 것 같아서.”
“헐. 나 코 곯아요?”
“몰랐구나?”
“아. 창피해……. 심해요?”
“아니. 귀여워서 알람소리로 제격이야.”
“풉.”
이준이 수건에 손을 닦고 수아를 꽉 껴안았다.
“숨 막혀요…….”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도 행복한 일이라는 걸 매순간 깨닫는다. 심장이 서로를 향해 열심히도 뛴다. 수아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으며 이준이 말했다.
“가서 지안이 깨워. 너한테 혼나서 시무룩할 걸.”
“알았어요.”
수아는 지안의 방으로 향했다. 온통 분홍색인 지안의 방은 그의 배려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공주풍의 캐노피 침대 속에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지안은 웬일인지 일찍 일어나서 수학 책을 펴고 있었다. 푸딩이가 침대 주인 같았다. 쌔근거리며 배를 뒤집고 잠들어 있는 모양새가.
“일어났네?”
“으응…….”
공부 못한다고 어제 저녁에 지안을 혼낸 게 미안했다. 잠도 많으면서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하고 있다니. 건강 상할라. 또 걱정이다. 건강하기만을 바랐는데 왜 자꾸 욕심이 날까.
“언니. 오늘 연극 배역 정한대. 제목은 우리 마님.”
3주 후에 학예회 발표가 있다.
“조선시대 배경이야?”
“응.”
“일단 주인공에 손들어. 알았지?”
지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누구 할 건데.”
“돌쇠.”
“돌쇠?”
“응. 대사는 마님, 마님, 다섯 번 뿐이야. 돌쇠는 말을 잘 못해. 어렸을 때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서 말을 굉장히 늦게 배웠거든.”
“그런데 돌쇠를 하겠다고?”
병원에 오래 있다 보니, 안쓰러운 역할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리는 걸까.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그런데 지안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돌쇠는 얼굴에 수염 붙여야 돼. 그래서 하고 싶어.”
“…….”
풍성한 앞머리를 가지는 게 소원이라더니, 뜻대로 안 되니까 풍성한 수염을 붙이려고 하네. 도대체 여자애가 왜 그걸 하려는 거야…….
“애들은 얼굴에 수염 붙이는 거 싫대. 아무도 안 하려고 하는 역할이라서, 내가 하겠다고만 하면 바로 할 수 있어.”
“…….”
수아는 제 의견을 내세워보았다.
“언니는 지안이가 주인공 했으면 좋겠는데. 마님 역할.”
“…….”
“…….”
“…….”
지안은 수아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짧은 아침 공부를 마친 지안은 책상에서 일어나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다. 거울을 보더니 노란색 핀까지 머리에 탁 꽂았다.
“학예회 때 나 보러 올 거지?”
“…….”
이렇게 예쁜데 돌쇠라니……. 머리에 돌이 들었는지, 쇠가 들었는지 말은 지독하게 안 듣는다. 신경질이 났다.
“몰라. 언니 바빠.”
“치.”
수아는 윤돌쇠 씨의 방문을 쿵 닫았다. 그리고 이틀 후. 지안은 자신을 데리러 온 이준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신나게 뛰어 왔다.
“형부우우~~~!”
감격의 포옹을 하고 허공에서 빙글빙글 몇 바퀴 돈 지안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가방에서 수학 시험지를 내밀었다. 기적적으로 수학 쪽지 시험에서 50점을 받은 거였다.
“이거 보세요. 저 50점 받았어요!”
“…….”
기대도 안 했는데. 이게 가능하구나……. 깜짝 놀란 이준은 잘못 채점된 것이 아닌지 샅샅이 살폈다.
딱 반 맞고 반 틀렸는데, 지안은 마치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금의환향한 장수 같았다.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하나는 아예 몰라서 아무렇게나 썼는데요. 운이 좋아서 맞았어요. 아하하하. 제일 뒤에 두 문제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둘 다 문제가 이해 안 돼서 읽다 말고 15, 15, 이렇게 답을 썼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맞았어요. 푸히히히.”
지안은 이준에게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이준이 지안을 또 안아 올리니, 지안은 빵긋 빵긋 웃었다.
“엊그제 언니가 낸 문제가 나온 거 있죠? 소름 돋게. 2시 45분은 3시가 되기 몇 분 전인가. 그거 15써서 맞췄지 뭐예요. 15분 전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큭큭큭. 저 이제 형부랑 결혼할 수 있어요~~~! 형부도 좋죠? 넹?”
“……아유, 잘했네. 우리 지안이.”
“형부도 좋아할 줄 알았어요. 아하하하. 언니랑 결혼한 다음에는 저랑 결혼해야 돼요. 알았죠? 제가 20살 되면요.”
“…….”
이준은 화제를 돌렸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제가 오늘 너무 신나서요. 생각해둔 게 있어요!”
“뭔데.”
“짜장 떡볶이!”
“콜!”
“콜콜콜!”
지안이 다리를 파닥거리며 기뻐했다.
***
저녁으로 짜장 떡볶이를 한 사발 잡수신 윤돌쇠 씨는 방안에 들어가더니 연극 연습을 시작했다.
“마, 마님……. 마님! 마,님!”
“멍멍!”
“마아님……. 마니이임…….”
“멍멍멍!”
수아는 방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를 콱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여자애가 저렇게까지 공부를 못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냐고, 지능이 약간 경계선에 있는 건 아닌지 학부모들끼리 수군댄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지안이는 아팠던 애였고, 부모가 없어서 신경써주지 못해 그럴 거라고 한 모양이었다.
얼추 맞는 말인데, 건너건너 그 말을 들었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서 주목받을 수 있는 예쁜 역할이기를 바랐다. 우리 지안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보여주고 싶은데 돌쇠 역할이나 맡아오고…….
수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굵은 목소리를 내느라 목이 말랐던지, 지안이 방에서 나왔다. 수아는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재밌어?”
“응. 돌쇠는 너무 착해서 소 같아. 음메~ 하는 소 말이야.”
벌써 캐릭터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말투였다.
“소 씩이나 돼서 참 좋겠다.”
“…….”
이준이 그러지 말라고 눈썹을 삐딱하게 만들었다. 수아는 좀 더 빈정거리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준과 수아의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고, 지안의 학예회 발표는 내일로 다가왔다.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 수아는 지안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네. 지안이 보호자님. 요즘 지안이가 연극 연습 제일 열심히 하고 있는 거 아세요?
“아……. 방문 닫고 들어가서 열심히 하기는 해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면 좋겠지만.
-지안이는 타인의 감정을 아주 잘 이해하는 아이예요. 그래서 돌쇠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지안이 때문에 감동 먹었거든요.
“왜요?”
-지안이가 저한테요, 선생님. 돌쇠는 마님이 시키는 건 다 하고요. 자기가 위험해질 수 있는데, 도망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아요. 그건 마님을 좋아하고 있는 거예요. 돌쇠는 아픈 사랑을 하고 있어요. 돌쇠는 마음이 넓은데, 그 마음을 꽉 채운 사랑을 하고 있지만 마님한테 말을 못하는 거예요. 라고 말하더라고요. 지안이는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특별한 아이예요.
“…….”
방안에서 목이 쉬도록 마님만 부르짖더니 돌쇠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게 되었나 보다. 어쩐지 약간은 먹먹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지안이가 연극을 살려내고 있어요.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지안이를 위해서 중요한 씬도 더 넣었어요. 대사도 더 넣었고요. 원래 마님을 5번만 하는데 8번으로 늘렸어요. 돌쇠 캐릭터 상 넣을 수 있는 대사가 마님 밖에 없어서 아쉬웠지만요.
“…….”
그래봤자 만두만두만두, 의미 없이 만두 8번 부르는 거랑 뭐가 달라……. 그래도 선생님이 지안이를 잘 챙겨주셔서 감사했다.
-내일 학예회 때 오실 거죠?
“그래야죠.”
-그럼 내일 뵈어요.
“네.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