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95)

<외전 2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른다. 간절한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오직 존재하고 있었던 것만 같다. 모아두었던 회사 연차를 쓰고 떠날 채비를 했다. 

그동안 지안은 훌쩍 커버렸는지 언니 없이 아주 잘 지낼 수 있다며 수아를 격려해 주었다. 

“이것도 가져가.”

“…….”

지안이 또 동전 지갑을 건넸다. 그 안에는 필시 지안의 전 재산이 들어있을 거였다. 이거 안 궁금한 사람 있음? 수아는 냉큼 지갑을 열었다. 

“우와…….”

사만 오천 원이나 들어 있었다. 얘가 돈 모으는 재주가 있네. 

“진짜 가져도 돼?”

“응.”

요 귀염둥이……. 벌써부터 돈으로 사람에게 감동을 주다니. 내가 잘 키웠어. 수아는 배시시 웃으며 만 원만 꺼냈다. 

“전부 받은 걸로 하고 만 원만 가질게. 고마워. 이 돈으로 귀여운 인형 사올게.”

엄마가 천사를 낳은 게 확실했다. 지안은 삼만 오천 원을 고이 동전 지갑에 챙겨 넣었다. 수아는 지안을 정희 이모네 집에 맡기고,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탄 순간 불행했던 모든 일들이 꿈처럼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당신도 날 잊지 않았던 거죠? 우리는 앞으로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석 달이나 늦었는지 심통이 차올랐다. 나만, 나만 이렇게 애달픈 건가. 만나면 꼬집어줄 거야!

운명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기분 속에서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 그가 있다. 이 바람과 공기 중에 그의 숨내음이 있다. 

미치도록 설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반했다던 모습이 아직 내게 있을까. 내가 너무 변한 건 아니겠지?

그는 비행기 표만 보냈지, 어디서 만나자는 말도 없었다. 그러니 공항 출입문이 열리면 그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런 순진한 기대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강이준은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나 1년 사이에 단발머리가 되었나, 머리를 빡빡 밀었나. 헤어스타일이 달라졌을 그를 상상하며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봤는데도 없었다. 

운동하기가 싫어서 먹기만 신나게 먹고 뚱뚱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어서 모든 남자를 눈여겨봐야 했다. 그래도 괜찮아. 근데 없다, 없어……. 초조했다. 이제 전화를 해봐야 되는 거 맞지?

통화 버튼을 누르려니 손끝이 떨렸다. 연결이 되지 않으면 어쩌지? 숙박업소도 예약해놓지 않았는데…….

신호음이 서른 번쯤 갔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가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꺼져버렸다. 

1년 뒤에 보자는 말. 의무감이었을까. 나만 기다려온 걸까. 그럼 비행기 티켓을 왜 보낸 거야? 혹시 무슨 사고가 생겼나.

전화를 몇 번 더 걸었고,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혼자 온갖 추측을 하느라 기력이 빠졌다. 그러나 해가 지고 있어서 공항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수아는 짐을 끌고 터덜터덜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파리에 처음 왔을 때 머물던 그곳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머니 사정은 여유롭지 않았다. 

그가 떠나기 전에 준 돈은 병원비를 제외하고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병원비도 갚을 거란 말이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우니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천장을 기어 다니는 쥐 소리는 더 잘 들렸다. 2년 사이 천장에 구멍이 난 건 아니겠지?

“흐익…….”

수아는 눈동자를 사납게 굴리며 이불을 꼭 덮어썼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다음 날. 조식으로 나온 빵과 오렌지 주스를 비장한 각오로 뱃속에 가득 넣고, 관광을 나섰다. 

괘씸해. 혼자서 아주 열심히 이 도시를 구경할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부재중 전화를 보고도 연락하지 않는 건데! 나타나기만 해. 정말 멱살을 잡고 욕을 퍼부어 줄 거야. 

수아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갔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드디어 그림 앞에 섰다. 

안녕 베아트리체. 2년 만이구나……. 또 그녀 앞에 서니, 이상하게 서러운 감정이 차오르면서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음, 오늘은 널 보러 온 게 아니고, 그 사람을 보러 파리에 왔어. 베아트리체. 나만 그 사람을 그리워했나 봐. 못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거 있지…….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 앞으로 영영 못 보면 어떡하지? 

결국 눈물이 흐르면서 흑, 입 밖으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너무도 굵고 단단한 팔이 뒤에서 수아의 상체를 안았다. 달콤한 목소리도 귓가를 적셨다. 

“후, 찾았다…….”

“…….”

뭐, 뭐야……. 이준의 상큼한 체향이 수아를 옭아맸다.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이 남자의 냄새. 달려왔는지 그의 숨소리가 쌕쌕거렸고, 심장이 쿵쿵쿵 빠르게도 뛰었다. 

이준의 팔을 꽉 붙든 수아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봤다. 함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당신은 알까. 못 만나는 줄 알고 걱정 했다구요…….

“왜 또 울고 있어.”

이준이 수아의 눈물을 엄지로 닦았다. 

“뭐예요. 전화도 안 받고…….”

“신분증, 휴대폰 전부 소매치기 당했어.”

“…….”

“미안해. 늦어서.”

“…….”

아, 그랬구나. 수아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야속하게 이준을 바라봤다. 멱살을 잡고 달랑달랑 흔들며 욕을 할 수가 없었다.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조금 까무잡잡하게 그을려서 건강하게 보였고, 몸은 더욱 근육질로 다듬어진 듯했다. 이렇게 잘 지냈으면서 1년하고도 석 달이나 지나서 연락할 건 뭐야. 

“어쩐지 여기 있을 것 같았어.”

“…….”

“여기서 하루 종일 기다려볼 작정이었어.”

“…….”

정말 희한하게 우리에게는 파리가 동네 마트인 것만 같다. 이 많은 관광객들 중에서 자꾸만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 서로가 별처럼 반짝이는 존재인 것이다. 

“나 안 보고 싶었어?”

“…….”

가슴을 졸였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풀리는 건 아니었다. 

“몰라요.”

“어?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데.”

그가 팔을 더 조여 왔다. 단단한 가슴 속에 파묻혀 있으니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했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왜 석 달이나 늦었어요?”

“아예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열일했어. 그러다가 늦었단 말이야.”

“연락이라도 해 주지…….”

“어쭈. 너도 문자 한 통 없더라.”

“…….”

그 마음을 알기에 수아는 말없이 이준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나 같았겠지. 괴물 같았던 시간들이 우리를 더 파괴시킬 수 없도록 일상 속에서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의 따스한 체온이 심장 안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서로의 체온을 하나로 포개고서. 

항상 그의 손을 잡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커다란 손을 잡고 루브르 박물관을 나오는데 자꾸만 심장이 뛰었다. 

볼을 간질이는 바람 속에서 수아는 그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바라봤다. 이 손을 절대로 놓지 않을 거다. 

행복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수아의 시선을 느낀 이준이 고개를 돌려 싱그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곧 이준의 입술이 수아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었고, 이내 말캉한 속살이 입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달콤하고 촉촉한 타액을 나누며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머금을수록 갈증이 났다. 몸은 짜릿해지고, 사랑은 불타올랐다. 이준이 짜릿한 목소리로 고막 앞에서 속삭였다. 준비해왔던 말이었다. 

“연애하고 결혼할래. 결혼부터 하고 연애할래.”

“…….”

결혼부터 하고. 그 쪽에 방점이 찍혀 있는 말이었지만 수아는 조금 튕겨보고 싶었다. 

“연애부터. 읍!”

살짝 눈빛이 사나워진 이준이 수아의 입술을 막았다. 한바탕 입안을 휩쓸던 이준이 중얼거렸다. 

“밤에 다시 대답해.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어야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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