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95)

<외전1화>

폰에 지안의 피검사 수치가 떴다. 수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치의 진료실로 쌩하게 달려갔다. 

“교수님! 정말 우리 지안이 거예요?”

“네. 오늘 호중구 2700 나왔네요. 다른 수치들도 다 좋습니다. 지금 당장 무균실에서 일반실로 옮깁시다.”

“우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후 병실에 지안의 학교 선생님과 친구 한 명이 병문안을 왔다. 여러 친구들이 오고 싶어 했지만 아직까지 조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가장 친했던 친구만 오라고 한 거였다. 

“아, 선생님…….”

지안은 목이 메어 말끝을 흐렸다. 30대 중반의 선생님은 단발머리에 지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미지였고, 통화할 때보다 목소리가 더 밝고 경쾌했다. 

“선생님이 지안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알아? 친구들도 지안이 엄청 기다리고 있어.”

“친구들이 저 안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릴 리가 있나. 지안이가 있어야 수업이 재미있는데.”

“히.”

지안이 눈물 맺힌 눈으로 활짝 웃었다. 지안과 친했던 한소희도 간만에 지안을 만나서 눈가가 젖어 있었다. 

“지안아. 걱정 많이 했어.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소희야.”

“보고 싶었어. 빨리 학교로 와.”

“나도 가고 싶어…….”

소희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지안에게 건넸다. 

“학교 친구들이 너한테 편지 쓴 거야. 우리 학교 학생들이 전부 다 썼어.”

지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전부 다?”

“응. 나랑 우리 반 반장 유민이가 며칠 동안 반마다 돌아다녔어.”

“아, 너무 고마워…….”

지안의 목소리는 울음 때문에 뭉개졌다. 옆에 있던 수아도 울컥해져서 눈가를 훔쳤다. 소희는 손바닥만 한 종이가방도 지안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곰돌이 인형이 들어 있었다. 

“네가 내 책가방에 달려 있던 인형 볼 때마다 귀엽다고 했잖아. 엄마한테 빨아달라고 했어. 깨끗하게 해서 가지고 온 거야. 우리 엄마가 곰돌이 엉덩이에 네 이름도 바느질 해주셨어.”

“…….”

“지안이 네가 빨리 학교에 와서 같이 수업도 듣고, 같이 놀면 좋겠어. 모두 잊지 않고 있어.”

“…….”

훌쩍, 훌쩍, 훌쩍. 병실에는 훌쩍이는 소리만 남았다. 네 사람 모두 훌쩍, 훌쩍, 훌쩍. 

그러다가 지안의 머리에서 노란색 비니가 벗겨졌다. 비니가 조금 컸는데 훌쩍이다가 흘러내린 거였다. 

“앗.”

머리가 시원해진 지안은 당황했다. 머리를 두 손으로 가리다가 급하게 비니를 다시 썼다. 지안의 벌건 얼굴 때문에 정적이 잠깐 흘렀지만 이내 선생님은 부드럽게 눈웃음 지었다. 

“지안아. 민머리가 너처럼 잘 어울리는 애도 없을 거야. 부끄러워하지 마. 귀여워.”

소희도 덧붙였다. 

“너 머리통 되게 예쁘다. 완전 동글동글해.”

“…….”

무안해하던 지안이 뒤늦게 배시시 웃었다.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그들이 떠난 후 지안은 스케치북을 읽었다. 

“언니. 애들이 나를 안 잊어버렸어…….”

수아는 또 눈물이 터진 지안을 꼭 껴안아주었다. 잊혀진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지안에게는 아픈 것만큼이나 걱정하던 일이었다. 

1학년 학생 모두가 빠짐없이 지안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써서, 스케치북은 빼곡했다. 지안은 눈물을 닦으며 방긋 웃었다. 

“꼭 학교로 돌아갈 거야.”

“그래. 잘 견뎌줘서 고마워. 지안아.”

우리의 슬픈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다니던 병원 횟수도 어느새 한 번으로 줄었고, 먹던 약도 거의 줄었다. 확신을 가져도 좋을 만큼 지안의 건강이 회복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머리카락이 잔디처럼 쑥쑥 자라났다. 볼도 통통해지고, 혈색은 무척이나 좋아졌다. 

***

1년 후.

“윤 주임.”

“네. 신 과장님.”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신영 과장에게로 걸어갔다. 

“기획안 잘 봤어. 이 시대를 살면서 크고 작은 갈림길에 서는 우리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하는 책. 이걸 만들어 보자는 거지?”

“네. 맞습니다.”

“흔해빠진 주제라는 생각 안 들어?”

“…….”

시니컬하던 신 과장이 뒤늦게 살포시 웃었다. 

“근데 요즘 유행하는 책들과 구성이 확실히 달라서 좋아. 흑과 백, 선과 악처럼 이중의 목소리를 내보자는 거잖아. 천사의 목소리와 악마의 목소리 이렇게.”

“네. 결국 인간은 선(善)에 끌린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추진해보자.”

“네. 고맙습니다!”

수아는 활짝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금방 타놓은 커피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수아가 빵긋빵긋 빵빵긋. 

이제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할 일이 없어서 멍 때리는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다. 히히. 

인스턴트 커피도 기분 좋게 마시면 최상의 원두로 뽑은 커피만큼 맛있다. 배고플 때 물에 밥을 말아 김치랑 먹기만 해도 꿀맛인 것처럼. 

강이준 씨. 나 출판사에 취직했어요. 제 리뷰가 뽑혔던 ‘드림’ 출판사예요. 블라인드 채용 덕분에 고학력자가 아니지만 당당하게 뽑혔답니다. 

일한지는 6개월째예요. 3개월은 잡무만 도맡아 했었고요, 이제는 일다운 일을 하고 있어요. 멋진 편집장이 될 거예요. 경력을 쌓아서 다음엔 글을 쓰고 싶거든요.

지금은 어떤 종류의 책을 출간할 것인지 기획안을 짜고, 출간까지 서포트 하는 일을 해요. 되게 보람 있어요. 엄청. 책을 실컷 볼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요. 

그런데 강이준 씨. 당신은 뭐하는데 연락이 없어요? 응? 1년하고도 두 달이 넘어가고 있잖아요. 하루하루 피가 마르고 있단 말이에요!

수아는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1년 뒤에 보자고 해놓고, 그는 연락이 없었다. 물론 연락처를 알고 있지만 전화를 해보지는 않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것들에 대해 무뎌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종종 그 사건들이 떠올라서 진저리가 났다. 

그러니 과거가 발목을 붙잡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지런히 순간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이라는 시간은 그것들을 다 건너뛰고 남자와 여자로 만나기에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럼 3년은 괜찮은가? 아니면 5년? 그것도 짧다면 10년? 

적당한 시간이라는 건 없다. 정해진 답도 없다. 어떻게 해도 뻔뻔하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 내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또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그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날 잊고 지낼까 봐 겁이 났다. 

강이준 씨. 난 한 순간도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숨을 들이마시고 내려놓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해요. 

우리는 어디서 만나게 되는 거죠? 1년 뒤에 보자는 말은 무슨 뜻이었어요? 당신이 나에게 찾아온다는 거예요? 난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첫눈이 오기 전에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

수아와 지안은 납골당에 와 있었다. 수아는 엄마의 유골함에 있는 사진을 찬찬히 어루만졌다. 

“엄마. 우리 지켜보고 있지? 지난 달 운동회 때 우리 지안이, 달리기 계주 선수였어. 얼마나 잘 뛰던지…….”

지안이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엄마. 내가 마지막에 뛰어서 역전했어. 우리 반이 2등이었는데, 내가 옆 반 애를 추월해서 우리 반이 1등 했다니까?”

“엄마. 지안이 빨간 털모자 어울리지? 내가 뜨개질한 거야.”

“응. 언니가 떠줬어. 친구들이 다들 예쁘대.”

두 자매는 엄마가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동안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전했다. 한참 후 납골당을 나오니 점심을 먹어야 될 시간이었다. 

“지안아. 칼국수 먹을까?”

“좋아.”

수아와 지안이 조그마한 가게로 들어섰다. 가게는 작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쓸고 닦은 티가 역력했다. 테이블과 의자에서 윤이 났다. 

“칼국수 두 그릇 주세요.”

인심이 후해보이는 할머니가 되물었다. 

“한 그릇은 양념장 뺄까? 애한테는 간이 셀까 봐 그러우.”

지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양념장 빼면 싱거워서 싫어요.”

“꼬맹이가 미각이 제대로구먼.”

주인 할머니는 귀엽다며 웃었고, 수아는 지안을 살짝 흘겨봤다. 

“넌 아직 애라서 짜게 먹으면 안 되는데.”

“…….”

지안은 딴청을 부렸다. 병원에 있을 때 너무 싱겁게 먹다가 사는 게 싱거워질 뻔했다는 아이다.

언제 아팠던가 싶을 정도로, 우리의 대화는 평범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안쓰럽지 않고, 툭하면 슬프지도 않다. 

“앗, 눈이다! 첫눈이야!”

두 손을 마주 잡은 지안이 황홀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수아도 흩날리는 눈을 멍하게 응시했다. 첫눈이 오기 전에 만나고 싶었는데……. 

가슴이 아렸다. 찢긴 살결에서 피가 맺히는 듯한 싸한 아픔이었다.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심장은 강이준만 떠올려도 조용하게 전율한다. 당신은 정말 날 잊었어요? 나는요…….

그때였다. 띠릭 문자가 왔다. 폰으로 뭔가가 도착했다. 그것은, 누군가가 보낸 프랑스 비행기 티켓이었다. 수아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첫눈과 함께 그가 오고 있었다.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 원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