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다음 날 무균실에서 이준을 떠올리고 있는 지안은 호기심에 충만한 눈이었다. 궁금해서 빨리 무균실에서 탈출하고 싶은데 말이야……. 이준과의 대화는 이랬었다.
“비밀번호가 있는 카드예요?”
“응. 번호는 언니랑 아저씨랑 처음 만난 날.”
“우와. 근데 우리 언니가 모르면요?”
“쓰읍. 알지 않을까…….”
“쓰읍.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하아, 알 텐데…….”
그는 병원 사물함에 카드를 넣어둘 테니 언니에게 전달해달라고 했다. 지안은 순진하게도, 손으로 쓴 생일카드인데 비밀번호를 누르는 자물쇠가 달려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책에서 그런 카드를 본 적이 있었다. 얼마나 멋진 카드인가. 그걸 받으면 언니는 얼마나 기뻐할까. 그러니까 건강해져서 빨리 무균실을 나가야 했다.
간이 안 돼서 끔찍하게 맛이 없는 멸균식이지만, 점심을 먹었더니 잠이 왔다.
지안은 손에서 책을 놓고 이불을 덮었다. 책이 두 권 뿐이라 헬렌켈러와 걸리버 여행기를 몇 번이나 읽었다. 그랬더니 요즘 꿈에서 자꾸만 헬렌켈러가 소인국과 대인국을 왔다 갔다 했다.
그 꿈이 다시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지안의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입가에는 행복한 웃음이 걸렸다.
헬렌켈러가 소인국에서 펌프로 물을 맞고 깨달음을 얻으려면, 개미처럼 작아진 지안은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열심히 발을 굴려야 했다.
대인국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헬렌켈러가 대인국에서 펌프로 물을 맞으면 너무 많은 물을 맞고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 그러니 지안은 쪼그려 앉아 우산을 씌워주고, 수건으로 몸을 꼼꼼하게 닦아줘야만 했다.
꿈속에서 헬렌켈러의 설리번은 바로, 지안이었던 것이다.
지안은 금세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병원 개인 사물함에 5억이 들어 있는 카드가 있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소인국이었다.
***
수아는 박은혜 수간호사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로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수간호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말로만 감사하다고 할 수 밖에 없어서 면목이 없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요…….”
“아니에요. 그걸 지켜내지 못했으면 저도 심하게 자책했을 거예요.”
그녀가 아니었다면 공여자의 조혈모 세포가 멀쩡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안은 꼼짝없이 죽었을 지도 모른다. 은혜는 팔과 어깨의 부상 때문에 전치 4주 진단을 받고 입원 중이었다.
“병원 사람들 전부 지안이 이식 결과가 좋았으면 하고 기도하고 있어요. 꼭 잘 되길 바라요.”
“수간호사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아는 그녀의 병실을 나온 후 다친 구급차 대원들에게도 인사를 하러 다녔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인사를 한 후 병실로 돌아가고 있는데. 띠릭, 지안의 피검사 수치가 전달됐다. 이게 지안이 수치가 맞나?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수아는 불안한 마음에 냉큼 주치의인 김 교수를 찾아갔다.
“선생님. 지안이 백혈구 수치가 이상해요.”
김 교수는 지안의 다른 수치도 확인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수치가 좀 더 빨리 움직이고 있네요.”
“그게 이상해서요. 원래 최소 일주일은 되어야 반등한다고 하셨는데…….”
골수이식을 하면 그 후 일주일 동안 면역력이 최악인 상태가 된다. 공여자의 조혈모 세포가 골수에 자리 잡기까지 대략 일주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잘 생착한다면 그때부터 피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데, 일주일이나 열흘이 지나야 호중구와 백혈구 수치가 올라간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5일째가 아닌가. 통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불안했다.
“어제 열이 37도에서 38도 사이를 오갔는데, 열은 잡혔고요. 언니가 괜찮은 걸 알고 나서, 지안이 컨디션이 확 올라가고 있어요. 좋은 징조라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숙주반응은요?”
“그건 100일까지 기다려봐야 되겠죠. 하여튼 지금은 지안이의 몸 안에서 공여자의 조혈모세포가 열일하고 있습니다.”
원래 선생님들은 섣불리 희망적인 얘기를 하지 않는 편인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훨씬 놓였다. 수아는 감사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복도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빗소리가 들렸다. 수아가 창문 앞에 섰다. 어제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오전까지도 줄기차게 내렸다.
대기 중의 먼지가 씻겨 내려갔는지, 잔잔한 바람결에서 맑은 냄새가 났다. 이 바람 속에 그의 숨 내음도 섞여 있다면 좋았을 걸.
만나지는 못 해도, 같은 땅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힘이 될 텐데……. 언젠가는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같은 것도 살아갈 이유가 될 것이고.
떠났을 거다, 이제. 그 일을 겪고서 어떻게 그 사람을 만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처음부터 안 되는 거였어.
“흑.”
머리는 끝내 가슴을 설득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아가 입을 틀어막고 복도에 쪼그려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무슨 꽃 좋아해?”
“봄에 피는 아기별꽃 좋아해요. 너무 작고 귀여워서요. 길가에도 많이 피어 있거든요. 우리 언니도 그 꽃 좋아해요.”
“언니도……. 아기별꽃. 이름이 예쁘네.”
이준은 지안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병원비는 충분하겠지. 시간이 얼마 없어서 당장 융통할 수 있는 돈만 넣어뒀는데.
한국 상공을 벗어나니, 날씨는 쾌청하기만 했다. 한국에서 멀어질수록 정리되지 못한 마음은 부피가 커졌다. 미련이 징그럽도록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이제 같은 땅을 밟지도 못한다. 우연히 마주칠 수도 없다. 칼로 제 목을 찌르려 했던 동영상 속 수아의 모습이, 이준을 미치게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잊혀져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항상 그걸 만지고 계시네요.”
“…….”
잠에서 깨어난 신 비서가 말을 건넸다. 역시나 이준은 기도하고 있는 천사를 만지고 있었다.
“부적 같은 겁니까?”
“뭐, 그럴 지도.”
이준은 쓸쓸한 눈으로 천사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쩌면 수아를, 아니 지안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타원 속에 천사가 조각되어 있는 열쇠고리는 그 옆에 튀어나온 긴 버튼이 있다. 손에 쥐고 있다가 매일 그걸 눌러보는데, 아무 기능이 없다.
비행기는 존에프케네디 국제공항에 착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승무원의 알림방송을 들은 이준은 천사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다가, 실수로 뭘 잘못 건드렸다.
버튼이 옆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면서 타원이 반으로 갈라졌고, 안이 열렸다. 이게 누르는 게 아니고 돌리는 거였구나……. 이걸 몰랐다…….
그런데 그 속에 곱게 접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것을 펼쳐보니, 정성을 들여 써내려간 수아의 편지였다. 이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편지는 아주 오랜 시간 후에 발견하거나 끝내 발견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무 가여울 것 같아서 편지를 남겨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할게요. 난 곧 떠나겠지만,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제가 가르쳐드린 한국 이름과 폰 번호는 전부 거짓이에요.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내게는 삶의 선택권이 없어요. 지금으로서는 그래요. 그러니 부디 당신은 일상으로 돌아가서 나 대신 무탈하게, 또 행복하게 지내주었으면 해요.
나는 오랫동안 차가운 비를 맞고 있었어요. 늘 혼자였던 내가 당신을 만나 잠시 우산을 쓰고, 빗속을 함께 걸으며 황홀한 꿈을 꾸었어요.
나를 젖게 하고 추위에 서럽게 했던 비가, 그 빗소리가, 음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당신이 내게 나누어준 온기로 인해 빗방울마저 따뜻하게 느껴졌답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혼자 비를 맞아야 해요. 이건 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고, 이게 당신을 떠나는 이유예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웃지 마세요. 당신은 내 심장 속으로 걸어 들어온 유일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영원히.
유한한 삶을 사는 주제에 감히 영원을 약속할 수 있는 이유는, 저는 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선물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저에게 다른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요.
간절히 바라건대, 다음 생에는 당신을 원없이 사랑하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반짝거렸어요. 빛과 같은 추억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의 행복을 빌게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하는 일 뿐이거든요. -애니-]
편지를 다 읽은 이준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가슴은 환희로 가득 채워졌다. 흘러내린 눈물을 슥 닦으며 이준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시간. 지안의 면회를 다녀온 수아가 병실로 들어섰다. 띠릭, 창문 선반에 올려둔 폰에서 문자 소리가 났다.
수아는 폰을 확인하려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은 어느새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떠 있었다. 무지개를 얼마 만에 본 거지…….
수아가 맑은 눈동자 속에 무지개를 담으며 문자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강이준이었다.
[1년 뒤에 보자. 누구도, 상처 없이.]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