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95)

<76화>

“엄마도 잠만 잤어요. 계속 자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럼 큰일나잖아요…….”

오직 언니 걱정뿐인 아이였다. 사이좋은 자매의 모습이 예뻐서, 이준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저씨가 좀 전에 의사 선생님 만나고 왔어. 언니는 진짜 피곤해서 자고 있는 거래.”

가슴이 두근두근. 지안이 연신 눈물을 닦아내며 조바심을 냈다. 

“진짜요? 진짜?”

“응. 아저씨 말 믿어.”

“애들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요. 나쁜 어른이에요.”

“거짓말 아니야. 언니가 일어나면 당장이라도 영상 통화 하라고 할게.”

“네. 고맙습니다…….”

아이는 인사를 잘 했다. 수아를 너무 빼다 박아서, 이준의 눈에 콕콕 밟혔다. 수아와 함께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뭐하면서 시간을 보내?”

“책 읽어요.”

“무슨 책?”

“우리 언니가 사다 준 책인데요.”

“주인공이 누구야?”

“음, 아기 때 병을 앓아서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고, 그래서 말도 못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그걸 다 이겨내고, 장애인들을 돕는 일을 해요. 엄청 멋있는 사람이죠?”

이준이 씨익 웃었다. 

“누군지 알겠다. 헬렌켈러?”

지안은 신이 나서 대꾸했다. 

“네! 그리고요! 물을 맞으면서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저는 너무 감동적이어서 소름이 돋은 거 있죠?”

무균실에서 창문만 보고 중얼거리다가 말동무가 생겼으니 지안의 기쁨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나도 그 장면 알아. 아저씨도 소름이 돋았었거든.”

“저는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쳤어요! 물은 영어로 워터예요! 더블유, 에이, 티, 티, 알!”

더블유, 에이, 티, 티, 알. 아닌데……. 그러나 이준은 열심히 맞장구를 쳐줬다. 

“오우, 영어까지. 그럼 헬렌켈러를 가르친 선생님 이름도 알겠네?”

“네! 알아요!”

“누구더라?”

“걸리번 선생님!”

“…….”

이 귀여운 녀석을 어쩌나. 이준은 키득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입매를 꽉 눌렀다. 공부를 썩 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준이 눈썹을 찡긋 올리며 되물었다. 

“설리번 아니고?”

“…….”

지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무안한 눈웃음을 지었다. 

“아, 언니가 말해줬는데. 또 깜빡했다…….”

여태껏 살면서 아이라는 존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이 녀석과의 대화는 매우 재미있었다. 

지안은 건강해지면 하고 싶은 것들을 줄줄이 나열하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이의 천진난만함과 주변을 밝게 물들이는 생기는 무균실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지안이는 꿈이 뭐야?”

지안은 좀 수줍어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언니처럼 풍성한 앞머리를 가지는 거요.”

“…….”

지금은 민머리 상태라 불가능하게 느껴지니까 그걸 꿈이라고 말하는 거겠지. 귀여운데 많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또 하고 싶은 건?”

“의사 선생님이 돼서, 아픈 애들 치료해줄 거예요.”

“오오. 멋있어.”

그럼 앞으로 공부는 1등만 해야 되는데. 설리번과 걸리버가 헷갈리고, 워터 스펠링을 엉뚱하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라고 말하려다가 이준은 싱긋 웃었다. 지안도 해사하게 따라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어떻게 알아?”

“아저씨도 참. 그냥 아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요?”

“큭큭.”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했는데, 왜 홍시 맛이 나냐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는 똑똑했다. 느낌상 공부 쪽으로는 별론데, 왠지 제 갈 길을 빨리 찾을 것 같았다. 웃고 떠드는 와중에 면회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진짜 우리 언니는 괜찮죠? 곧 일어나는 거 맞죠?”

“응. 진짜야. 약속.”

아이와 헤어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쉽고, 아련하고, 애잔했다. 이준은 지안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아저씨가 네 언니와 어떻게 해야 될까. 언니는 아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수 있거든…….

언니를 위해서라면 떠나는 게 옳은 것 같은데……. 근데 슬프다, 지안아. 이 상실감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

그 시간 수아가 깨어났다. 엄마 꿈을 여러 번 꾸었다. 그래서 자꾸만 잠을 잤던가 보다. 일어나 보니 현실이야말로 악몽 같았다. 

강서한에게서 벗어났지만 그가 죽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불안해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나의 책임이 크지 않을까. 어쩌면 전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창밖으로 내려앉은 어둠이 두려웠다. 강서한과 계획대로 결혼을 했다면, 내가 죽지 않았을까……. 강서한이 나 대신 죽은 건가. 

모든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된다. 나는 또 큰 죄를 지었고, 이제 어떤 벌이 내려질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지안이는 어떻게 됐지? 강이준도 다쳤는데……. 

“아.”

일어나려다가 팔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병실로 강이준이 들어왔다.

“깼어?”

“…….”

수아는 눈으로 그의 전신을 빠짐없이 훑었다. 

“다친 데는요?”

“견딜만 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잘못됐다면 나는 미쳐버렸을지도 몰라. 수아가 안도하며 숨을 내려놓았다. 

“지안이가 걱정해. 영상통화 좀 해.”

“네. 그럴게요.”

수아는 무균실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안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언니!!!!!

이산가족 상봉 같았다. 전화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지안의 목소리에, 수아는 활짝 웃었다. 단번에 시름을 놓게 하는 밝은 얼굴이었다. 

“언니 이제 일어났어. 그동안 면회 못 가서 미안해. 지안이 잘 하고 있지?”

-응. 내 걱정은 하지 마. 나는 책 읽으면서 잘 있어. 하도 읽고, 또 읽어서 머리가 완전 똑똑해지겠어!

“내일은 꼭 면회 갈게. 지안이 너무 너무 보고 싶어.”

이준은 수아가 통화하는 모습을 눈에 가득 담았다. 가슴에 잔잔한 물결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수아의 웃는 모습을 본 게 파리에서 이후 처음이다. 

수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꿈에서도 너를 위해 살겠다고 숱하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저 웃음을 지켜주려면…….

곧 눈물겨운 영상통화는 끝났다. 그가 빤히 보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수아는 어색해서 입술을 꾹 붙였다. 너무 큰 사건을 겪어서,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며칠 동안 잤더니 머리카락이 엉망일 것 같았다. 수아가 손을 뻗어 침대 위에 있는 머리끈을 손목에 감았다. 머리를 묶으려고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데. 

“나, 내일 떠나. 미국으로.”

“…….”

“언제 돌아올지는 몰라.”

“…….”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다. 수아는 머리카락을 묶지 못했다. 손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무슨 행동을 하려던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버려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수아는 팔목에 감긴 머리끈을 보며 눈만 끔뻑였다. 

“엄마 호흡기를 뗀 건 네가 아니라 강서한이었어. 그 말을 하고 떠났어.”

“…….”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수아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이준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죄책감에서 벗어나.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

수아가 속눈썹을 파들파들 떨며 오래 전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 자신이 그랬던 거라고 믿고 있었다. 강서한이었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크게 가벼워지는 건 아니었다. 엄마의 호흡기를 떼어내려고 마음을 잠깐 먹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두 사람의 거리는 침묵만큼이나 무겁고 멀었다. 수아는 한참 만에 입술을 열었다. 

“오늘이 마지막인 거네요.”

“어.”

매일 그를 밀어내고 결혼을 준비했으면서, 그가 떠난다는 게 왜 이렇게 감당이 되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심장이 자꾸만 서글프게 떨렸다. 숨 쉬는 방법을 잊고 있었다. 눈가가 달아오를 것 같은 수아는 불안정한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

이준은 희미하게라도 웃고 싶었는데 웃어지지 않았다. 수아가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 이게 아니었을까. 

나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났고, 그 충격은 네가 고스란히 겪게 되지 않았나. 그러니 어떻게 내가 너를 더 욕심낼 수 있을까. 

울컥, 목 안이 뜨거워진 이준의 음성이 흔들렸다. 

“미안해.”

“…….”

그가 왜 미안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수아는 목을 가다듬고만 있었다. 

“잘 지내.”

“…….”

그가 담백한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수아의 귀에,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박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병실 밖으로 발자국 소리가 사라졌다. 동시에 수아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형이 죽었다. 해진 그룹이 크게 흔들릴 거라고 했다. 벌써 매각, 파산이라는 말들이 나왔다. 

잠시 후 창문을 통해 그가 병원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아는 창문에 손을 뻗어 멀어지는 이준을 더듬었다. 

아직도 그의 뒷모습만 봐도 심장이 콩닥거린다. 좋아한다는 말도 해보지 못했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가슴속에 품은 사랑의 감정까지 가난한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 뜨거웠고, 간절했다. 이준이 사라진 뒤에도 수아는 오랫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곧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에 부딪친 빗방울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억지로 삼켜낸 천 마디의 말이 혈관을 타고 돌면서, 수아의 몸을 아프게도 찔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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