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서한이 아래를 보며 하하하 크게 웃었다. 조커 같은 서한의 웃음이 건물에서 메아리치듯 울렸다. 서한은 랜턴을 껐다 켰다 하며 옥상에 사람이 있음을 알렸다.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불빛을 확인한 이준이 건물 1층으로 들어섰다. 분명히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진 않았을 거다.
이준은 두리번거리다가 낡아빠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곧 도착했고, 이준은 꼭대기층을 눌렀다.
끼잉, 귀를 찢을 듯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는 움직였다. 아래를 보니, 오래된 발판이 삭아서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여차하면 발을 잘못 디뎌 추락하기 십상이었다.
전력을 끊어야 하지 않나? 폐건물인데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게 신기했다.
그 시간. 서한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에어타카를 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시 아킬레스건에 이상이 생긴 게 확실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칼로 쿡 쑤시는 듯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이준을 이기려면 처음부터 치명상을 가해야만 했다.
수아는 자꾸만 눈이 감겼다. 콘크리트용 못이 박힌 팔에서 피가 많이 흘렀다. 중요한 혈관을 건드린 것 같았다.
강이준, 당신이 여기 와서는 안 돼……. 정말 나를 만나서는 안 됐어…….
“윤수아. 기대되지?”
“…….”
“이걸 목 경정맥에 쏘면 죽을 거야. 총이랑 똑같은 거 아니겠어?”
“…….”
서한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수아를 보며 시시덕거렸다. 수아는 최대한 힘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요…….”
“하지 말라면 더 하는 놈이거든, 내가.”
서한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에어타카를 목에 쏴 버릴 것이다.
몇 초 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동시에 이준이 튀어나왔다. 바로 앞에 기다리고 있던 서한의 몸을 힘으로 밀고 나갔다.
“흐윽…….”
이준은 서한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을 거라 예감했다. 갑작스럽게 미는 힘에, 서한은 손에서 에어타카를 놓치고 말았다. 서한을 넘어뜨린 이준이 몸 위에 올라타 주먹질을 퍼부었다.
“윽, 으윽.”
서한이 가드로 머리를 보호했지만 그 중에 절반은 충격을 주고 있었다. 서한은 탈출 기술을 시도했다.
상체를 반쯤 비틀어 이준의 팔목을 힘 있게 붙잡았다. 다른 팔로 이준의 팔꿈치 위를 감으며 이준의 무게중심을 흐트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서한이 이준의 몸 위에 올라타 연타를 날렸다.
“윽, 아.”
이준도 빠져나오려고 틈을 보면서 다리를 서한의 몸통에 두르고 조였다. 그러다가 서한이 한쪽 무릎을 세웠을 때. 이준이 다리를 안쪽으로 걸고 또 스윕을 시도했다.
스윕이란 밑에 깔린 사람이 상위 포지션에 있는 사람을 넘어뜨리고, 반대로 올라서는 것이다. 두 사람의 목숨을 건 싸움이 치열한 경기 양상 같았다.
서한의 힘 때문에 스윕이 먹히지 않았다. 여전히 위치가 아래였다. 이준은 두 손을 서한의 갈비뼈 밑에 대고 허리힘과 함께 서한을 위로 올렸다.
서한의 몸이 조금 이동했을 때 이준은 두 다리를 서한의 옆구리 안에 넣고 다시 한 번 서한의 몸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몸을 롤링해서 서한의 등 뒤에 올라탔다. 단숨에 포지션이 바뀌었다. 기회를 잡은 이준이 옆구리에 서한의 목을 끼고 졸랐다. 강력한 길로틴 초크였다.
“으윽…….”
서한은 모든 격투기 기술에 능한 레전드 선수였다. 이준은 서한의 경기 동영상을 수천 번은 봤다. 서한이 기술을 걸어올 때 방어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연습해왔다.
그렇다고 서한이 만만할 리 없었다. 서한은 머리를 바닥에 박고, 몸을 반대로 돌렸다. 힘겹게 길로틴에 탈출했다.
바닥에서 몸싸움을 해보니, 강이준의 그래플링 기술이 워낙 좋아서 치고 박는 전면전으로 가야할 듯했다. 서한은 벌떡 일어나 가드를 올렸다. 이준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틈을 노렸다.
정말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서한은 링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흥분됐다. 마약이라도 한 듯 기분이 좋아졌다.
“하,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넌 날 못 이겨.”
“전성기 때 기량이었어도, 내가 이겨.”
서한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리는 말이었다.
“미친놈. 지랄하고 자빠졌네……. 야이 병신 새끼야. 뭐가 어째? 나, UF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강서한이야.”
이준은 재빠르게 눈으로 수아의 상태를 살폈다. 팔은 피가 많이 흘러내렸고, 얼굴도 꽤 상해 있었다. 몽롱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어서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마음이 급했다.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널 이기는 게 목표였어. 이미 십년 전부터 가능했어.”
“하하. 그러니까 네가 오늘 내 손에 죽는다는 거야. 주제 파악을 못 해서. 상대를 잘못 골랐어.”
이준의 눈이 수아에게 슬쩍슬쩍 가 있다는 걸 서한은 알아챘다. 페이크 기술을 쓰며 거리를 좁히고 들어갔지만 이준은 몸을 뒤로 뺐다.
역시 강서한은 빈틈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완벽한 선수는 없다. 이준은 서한의 주먹이 깊게 들어올 때 뒤돌려차기로 서한의 옆구리 빈틈에 킥을 꽂아 넣었다.
“윽.”
서한의 중심이 흐트러지며 뒤로 주춤했고, 이준이 잽을 연타로 날렸다. 서한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충격이 쌓이고 있었다.
어차피 교통사고 때문에 발목에 무리가 간 상태여서 킥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겨우 이준에게서 벗어난 서한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쇠 파이프를 손에 쥐었다.
서한은 쇠파이프를 몇 번 휘두르면서 다음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에어타카는 강이준 뒤편에 있어서 멀었다. 차라리 주사기와 윤수아가 더 가까웠다.
서한은 눈치를 보다가 쇠파이프를 이준의 몸통으로 던졌다. 옆에 떨어져 있던 주사기를 들고 잽싸게 수아에게로 갔다.
서한은 의식이 가물거리는 수아의 목에 주사기를 갖다 댔다.
“심정지 약이야. 물러서.”
“…….”
이준이 경악하며 걸음을 멈췄다.
“동물들 안락사할 때 쓰는 약이거든.”
“아, 안 돼……. 찌르지 마…….”
도화지처럼 얼굴이 새하얘진 수아는 금방이라도 목숨이 꺼질 듯했다.
가누지 못하는 목을 서한에게 그대로 내어준 채 게슴츠레한 눈을 끔뻑였다. 서한은 이준을 보며 악랄하게 웃었다.
“윤수아가 자기 엄마 죽인 거 알아?”
“…….”
처음 듣는 얘기에, 이준의 눈동자가 커졌다.
“머리를 다친 엄마가 깨어나지도 않고 병원비가 무섭게 쌓이니까, 자기 엄마 인공호흡기를 떼어냈다고. 19살 때 이 기집애가.”
“…….”
수아는 발가벗겨진 것만 같았다. 두 눈에서 처연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였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무서운 년이야, 윤수아가. 정나미가 뚝 떨어지지 않아?”
“…….”
서한은 이준의 감정이 흔들리기를 바라며 잔인한 말들을 내뱉었다. 이준이 차마 듣기 힘든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서한은 두 사람의 마음을 갈라놓은 것 같아서 시끄럽던 속이 진정됐다. 서한이 씨익 웃고 있는데.
“그걸로 협박했어?”
“…….”
이준의 음성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이 개새끼야…….”
“…….”
이준은 턱을 꽉 물었다. 목이 메었다.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리고, 얼마나 자신을 괴롭혔을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누구도 이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함부로 손가락질 할 수 없다. 형제부모라 하더라도, 다른 이의 삶을 완전히 부서뜨리면서까지 목숨을 연명해야 할 권리는 없다.
서한의 미간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물론 거짓말이다. 윤수아가 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걸 이해한단 말이지……. 왜. 도대체 왜…….
수아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히든카드인데 동생 지안도, 강이준도 이해한다…….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 화르르 불을 지폈다.
나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괘씸해서 두 연놈들을 찢어발기고 싶은 이 감정은 부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진짜 오늘이 마지막인지 자꾸 어릴 때의 기억이 스쳤다. 빌어먹을……. 서한의 부리부리한 눈이 시뻘게졌다. 계획을 바꾼 서한이 이준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 뒤에 에어타카가 떨어져 있어. 일단 그걸 바닥에서 주워.”
이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대답했다.
“수아는 살려 줘. 난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얼마든지.”
“약속해. 수아는 병원에 빨리 데려다 준다고.”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하라고!”
“…….”
이준은 뒤를 돌아 바닥에 있던 에어타카를 손에 쥐었다. 서한은 수아의 목을 찌르고 있는 주사기 뒷부분에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이준, 그걸 네 왼쪽 가슴에 쏴. 그럼 수아는 살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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