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서한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체를 유기했으니 징역 30년까지도 나올 수 있다.
가석방으로 나온다 해도 20년은 감방에서 썩어야 될 거다. 그렇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 법의 심판?
“하…….”
서한은 썩소를 날렸다. 운동선수의 몸을 망가뜨렸으니 오기철은 죽어 마땅했다. 그래서 죽였고, 파묻었다. 그런데 강이준이 시체를 찾아낼 줄이야…….
역시 그 놈과는 지독한 악연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가족으로 엮여서는 안 됐는데.
서한은 눈에 띄지 않으려고 허름한 숙박업소에 들어와 현금으로 숙박비를 지불하고, 방안에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이제 인생은 완전히 끝났다. 법의 심판 따위를 받으며 뉘우칠 생각이 없다. 오히려 나에게 고통을 가중시킨 강이준과 윤수아를 직접 해치울 것이다.
결국 두 연놈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나를 파멸시키려고 작정한 거였을까. 윤수아. 네가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너를 보살펴줬음에도 불구하고?
강이준은 진즉에 죽였어야 했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예감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싫었으니까.
얼떨결에 수아를 놓쳐버린 게 후회스러웠다. 수아가 있어야 강이준까지 한 번에 잡을 수 있는데…….
서한은 비릿한 피 맛이 날 때까지 턱을 꽉 깨물었다.
“내일 기대해. 이 개새끼야…….”
***
다음 날. 이준은 집에 잠깐 들러 샤워를 하고 나왔다. 씻어도 께름칙한 기분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찬물을 마시고 있는데 신 비서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표님. 진짜 미국에 가는 거 맞죠?
“……가야지.”
-가야지, 가야지만 몇 번째 말씀하시고, 회사에는 왜 안 나오시는데요!
“곧 들어 갈게.”
이준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또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사건 담당을 맡은 조민식 형사였다.
“네. 형사님.”
-사체 발굴 작업 좀 전에 마쳤습니다. 오기철이 확실합니다. 충치가 심했던 치과 기록도 확인했습니다.
이준의 몸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갔다.
-10년이 돼서 DNA를 찾는데 시간이 꽤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운이 아주 좋았습니다.
“뭐가 나왔습니까.”
-그날 강서한이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습니다. 살인을 할 때 가죽점퍼에 피가 튀었는데, 그게 찝찝해서 옷을 벗어서 같이 묻은 것 같습니다. 옷을 뒤집어서 묻었는데, 안쪽에 핏방울이 거뭇하게 남아 있습니다. 강서한의 지문도요.
한국의 DNA, 지문 검사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성인인 전국민의 지문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하고 있는 나라는 OECD 국가 중 오직, 대한민국뿐이다.
DNA를 채취하고 분석하기까지는 2주 가까운 시간이 걸리지만, 정확한 지문이 나온다면 감식 결과는 하루가 걸리지 않기도 한다.
오기철과 강서한의 원한 관계는 확실했다. 지문을 바로 강서한의 것과 비교하면 되었으므로 수사는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그럼 지금 바로 구속 영장 신청할 수 있겠네요.”
-네. 협조해주셔서 대단히 빨리 수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준은 전화를 끊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잡을 수 있다. 이제 잡히기만 하면 된다. 강서한이 감방으로 들어가야 이준도, 수아도 발을 뻗고 잠들 수 있을 거였다.
***
주희는 내일부터 출근 예정이었다. 강서한의 해외 출장 일정에서 이번에는 제외됐다. 같이 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일주일 이상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빈둥거리며 강서한이 준 돈으로 쇼핑을 다녔다. 신발과 옷을 좀 샀는데, 벌써 돈을 다 썼다.
역시 재벌은 돈을 화끈하게 쓰는가 보다. 또 잠자리를 하면 돈을 주겠지? 흐뭇한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강서한을 좀 부드럽게 만들 수는 없을까. 아주 떡메로 떡을 치대는 것처럼 사람을 반쯤 죽여 놓는단 말이지.
조금만 힘을 빼달라고 수없이 애원했는데, 들은 척도 안 했다. 자기는 아랫도리가 얼얼해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나. 하긴 나도 그렇긴 한데.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
속이 훤히 비치는 슬립을 입은 주희는 거울 앞에 섰다. 항상 눈으로 확인하지만 제 몸매가 무척이나 마음이 들었다. 아주 화끈하게 S라인이었다. 남자들이 침을 질질 흘릴 만 하다니까.
주희는 제 가슴을 오른손으로 움켜쥐며 넘쳐나는 살결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무슨 맛이 나길래 남자들은 가슴을 그렇게 좋아할까.
엄마가 가슴이 상당히 컸는데, 그걸 쏙 빼닮아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엄마도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아빠와 이혼 후에 남자친구들이 상당히 자주 바뀌었었다.
어쨌든 주희는 새콤한 것이 먹고 싶었다.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마시는데, 평소와는 다른 맛이 났다. 조금 비릿한 냄새가 비위를 상하게 했다.
주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틀 전부터 속이 살짝 메슥거렸다. 술을 많이 먹었을 때처럼 울렁거리는데,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 살아서 그런가 보다 하는 중이었다.
오렌지 주스 한 모금을 더 마셔보려고 입에 갖다 댔다. 역시나 속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희의 눈이 재빠르게 굴러갔다. 생리 날짜가 불규칙한데 설마…….
강서한과 제일 처음 관계를 한 게 2주는 넘었으니까 어쩌면 임신일지도 모른다. 콘돔 따위는 낀 적도 없었다.
그의 집에 갔던 날, 강서한이 몇 번이나 사정을 했는지 셀 수가 없다. 임신이면 어떡하지?
주희는 옷을 대충 걸치고 약국에 임신테스트기를 사러 갔다. 임신이길 바라는 건지 아니길 바라는 건지 머릿속은 복잡했다.
“임신 테스트기 하나 주세요.”
“네. 4천원입니다.”
주희는 그것을 받아들고 빠른 걸음으로 집에 왔다. 후, 임신 테스트기는 일 년에 서너 번씩 하게 되는데, 이게 뭐라고 매번 떨리나. 아직 낙태 수술을 한 적은 없고, 사후 피임약은 세 번쯤 먹은 적이 있다.
임신이라면 강서한이 좋아할 리가 없는데……. 돈이라도 크게 줬으면 싶은 마음이다. 방을 휘휘 둘러보니 투룸이 너무 좁아서 숨이 막혔다. 드레스룸을 따로 만드는 게 소원이다.
일반 서민이 집 한 채를 사려면, 이십 년 이상은 안 모으고, 안 입고, 안 쓰고 해야 겨우 싼 집을 가질 수 있던데. 난 그렇게 못 산단 말이야.
강서한은 두 번 일을 치렀을 때 천만 원을 덥석 줬다. 낙태를 강요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기는 한데, 내가 언론에 우리 둘의 관계를 까발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한다면…….
한강뷰가 보이는 집 한 채가 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미쳤나 봐…….
입가에서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고 있었다. 혹시 아이를 낳아달라면서 자신의 펜트하우스를 주고, 한 달에 천만 원씩 생활비도 주는 건…….
“풉.”
망측한 웃음이 터졌다. 임신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희는 소변을 임신 테스트기에 묻혀 놓고 아까부터 틀어놓은 TV에 눈을 돌렸다.
-뉴스 속보입니다. 어젯밤 26일 오후 8시 40분경 서울 대정구 대정산에서 백골 시신이 발견되어 수사에 나섰습니다.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한 서울 성주경찰서는 전직 격투기 선수 강모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도주한 강모 씨를 검거하기 위해…….
주희의 눈동자가 사납게 흔들렸다. 뭐, 뭘 들은 거지? 전직 격투기 선수 강모 씨라면 강서한 아닌가? 다른 사람일 것 같지 않은데…….
주희는 서둘러 기사를 검색했다. 댓글을 보니 다들 강서한이라고 확신했다. 나쁜 인성 탓에 사고도 많이 쳤으니, 다른 인물은 고려하지도 않는 듯했다.
초조한 주희가 손끝이 저려서 주먹을 꽉 말았다가 쥐는 사이, 임신 테스트기는 흐릿한 두 줄이 생겼다.
“하아…….”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가까스로 화장실 벽을 짚었지만 주희는 주저앉고 말았다.
***
서한은 위치 추적 때문에 폰을 버렸다. 경찰들은 지금 회사와 집을 압수수색하고 난리가 났겠지.
도망 다녀봤자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카드 한 장 쓸 수가 없고, 차 번호도 알고 있을 테니. 이 괘씸한 것들……. 서한의 관자놀이에 푸른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아침까지 마신 술이 깨지 않은 상태였다. 서한은 팔굽혀펴기를 하며 몸을 적당히 펌핑시켰다.
이대로 조용히 꺼져줄 수는 없다. 어차피 난 끝났지만 너희들에게 지옥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고 갈 것이다.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줄게. 강이준, 윤수아. 두고 봐. 너희 둘의 목숨을 끊어줄 테니까. 그리고 또 하나 더 재미있는 일을 계획하고 있는데…….
서한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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