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강서한, 이 미친놈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집이 아닌 것 같은데……. 이준이 씩씩대며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러댔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어디야, 도대체! 이준이 받지 않는 전화를 50통, 60통째 하고 있었다. 수아를 더 괴롭히는 거 아닐까. 시체를 찾았다는 말을 하지 말고 조용히 경찰에 자료를 넘겨야 했나.
그런데 수아가 동영상 속에서 그 꼴을 당하고 있는데 눈이 돌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에 있다면 지체하지 않고 강서한의 등에 칼을 꽂았을 것이다.
내가 감방에서 썩는 건 상관없다. 각오한 일이다. 강서한이 발악하지 않고 곱게 잡힐 리가 없고, 강서한도 나를 죽이려 달려들 게 뻔하니까.
오기철의 시체로 협상하는 척이라도 해보려 했으나, 이미 타이밍은 지나버렸다. 눈썹을 사납게 치켜 뜬 이준은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
“이거 안 놔? 놓으란 말이야!”
서한은 수아의 목덜미를 끌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무균실 앞으로 보안요원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서한은 빠르게 정신이 돌아왔다.
병원 무균실에 처들어 왔으니 구속감인데다, 강이준이 신고까지 했다면 들어가는 순간 인생 종 치는 거였다.
그러나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질 서한이 아니었다. 달려온 3명의 보안요원들은 나름 거구들이었지만 서한에게는 한주먹거리도 안 됐다.
제일 먼저 달려든 남자는 팔 하나를 붙잡혀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처참하게 바닥에 꽂힌 후 배를 짓밟혔다.
“으윽!”
내부 장기에 타격이 갔을 법했다. 두 번째 남자는 연타로 주먹을 얻어맞고 턱이 꺾이면서 벽에 쿵 부딪쳤다.
남은 보안요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호신용 곤봉을 꺼내 휘둘렀으나, 휘두르는 폼은 이미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철로 된 곤봉은 서한의 킥에 튕겨져 나갔다. 곧 남자의 머리채가 잡혔고 서한은 무릎으로 그의 얼굴을 찍어버렸다.
끝난 게 아니었다. 바닥에 넘어진 남자 위에 서한이 올라탔다. 서한은 남자의 발목뼈를 관절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우드득 소리가 났다.
“아악…….”
발목이 부러진 남자는 신음을 내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뒤따라 온 간호사들이 기겁하며 경찰에 신고했다. 서한은 다시 수아를 끌고 나가려고 뒤를 돌아봤다.
“이리 와!”
수아는 빈 주사기 하나를 손에 몰래 쥐고 있었다. 수아는 잽싸게 서한의 목에 뾰족한 주사 바늘을 푹 꽂아 넣었다.
“윽. 씨발…….”
서한이 주춤하는 사이 수아는 있는 힘껏 복도로 달려 나갔다. 수아를 놓친 서한은 억울함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수아를 잡으러 가지 못했다.
곧 경찰이 들이닥칠 거였다. 서한은 아까 들어온 통로로 뛰었다.
“하, 하아…….”
수아는 가까스로 서한에게서 벗어났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두 손을 짚고 심호흡을 터뜨렸다.
통제구역인 무균실이 있는 3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곧 들이닥친 경찰들이 우르르 뛰어갔고, 의료진들도 상황을 체크하느라 고성이 오갔다.
지안이는 어떻게 됐을까. 다른 환자들에게 미안해서 어떡하지…….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지안이 보호자님. 괜찮으세요? 치료 받으셔야 되겠어요!”
간호사가 다가와 수아를 부축했다. 수아는 간호사의 몸에 의지하며 겨우 일어섰다.
“지안이는 어때요?”
“열이 아까보다 미세하게 올랐다고 들었어요.”
“…….”
내일 지안이는 골수이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른 환자들은요?”
“무균실이 1인실로 되어 있어서, 다른 환자들은 피해 없을 거예요. 놀란 분들이 있어서 조금 걱정되는데요. 어쨌든 지금 철저하게 멸균 작업하고 있어요. 보호자님은 응급실로 가셔서 상처를 치료하셔야 해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수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머리를 조아렸다. 무균실에 있는 환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친 셈이었다. 다들 아무 일 없어야 하는데…….
강서한이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 다행이지만, 그가 잡힐 때까지 끝난 게 아닐 것이다.
무슨 시체를 찾았다고 했는데? 그럼 살인을 저질렀다는 거잖아……. 어떻게 그런 일까지…….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이 연거푸 일어났다. 겨우 숨을 돌리자, 오금이 저리면서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수아는 스르르 정신을 놓았다.
“보호자님! 정신 차리세요!”
***
“영양실조에 과로까지 겹쳤습니다. 쇄골에 길게 베인 건 상처가 꽤 깊어요. 피를 제법 흘려서 어지러우셨을 겁니다. 다리뼈에 실금도 갔고요.”
“…….”
이준은 의사로부터 수아의 상태를 듣고 있었다. 처참했다. 영양실조는 잊어버린 지 오래된 단어였는데.
조금 전 수아에게 걸려온 이준의 전화를 의료진이 받았다. 덕분에 이준은 수아의 위치를 알게 된 거였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어났던 난동에 대해 들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서한이 도주했으므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몸서리 처졌다.
“무균실에 있는 동생은 괜찮습니까?”
“지금 안정되고 있습니다.”
그 녀석이 궁금해진다. 수아는 아픈 동생 하나를 위해 모든 불행을 짊어지려 하고 있다. 수아에게 그토록 소중한 존재이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가 나간 후 이준은 수아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렇게 마음 놓고 바라보는 게 1년 만인가. 귀하디 귀한 시간이었지만, 수아를 보고 있는 마음은 한없이 괴로웠다.
아까 동영상에서 엉망이 되어 끌려 다니고, 제 가슴을 칼로 찔러야 했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나 때문에 네가…….
그 집요한 놈은 나와 관련됐다는 걸 알고 있으니 끝까지 널 괴롭힐 거야. 감방에 처넣어도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놈의 숨을 끊어놔야 하지 않을까. 너와 네 동생이 편하게 지내려면…….
눈꺼풀이 파들거리던 수아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힘없이 굴러다니던 눈동자 속에 이준의 모습이 박혔다. 꿈인가 싶어 여러 번 깜빡여 봐도, 강이준이었다.
당신에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꿈에서도 기도했거든요. 우리 지안이와 당신, 두 사람만은 무탈하기를요.
“정신이 좀 들어?”
“…….”
수아는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좀 더 누워 있지 그래.”
“아뇨. 제가 많이 잤어요?”
“아니. 한 시간 밖에 안 잤어.”
“아. 그럼 내일이 지안이 골수이식인데……. 지안이는요?”
“괜찮대. 주치의가 말해줬어.”
“다행이다…….”
수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
“그 사람은요?”
“…….”
이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준에게 연락이 올 거라는 사실이었다. 윤수아를 다시 괴롭힐 거라는 것도.
“신변보호요청 해놨어. 경찰이 항상 널 따라다닐 거야.”
“…….”
지금쯤 경찰이 사체 발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초조해진 강서한이 또 무슨 짓을 벌이는 건 아닐까.
수아는 서한이 했던 말들이 떠올라서 흠칫 몸이 떨렸다.
“강이준 이 개새끼! 찢어 죽일 거야! 가죽을 벗겨서 불태울 거야, 이 미친 새끼!”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강이준이랑은 끝장을 봐야 되거든.”
끔찍했다. 수아가 이준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두려움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단 둘이 만나지 마요. 절대로. 당신에 대한 증오가 엄청 났어요. 어떤 식으로 도발해도 응하지 말구요.”
“…….”
“대답해요. 얼른. 정말 위험해요. 또 누군가를 죽일 지도 몰라요…….”
“……알았어.”
이준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수아는 미덥지 않은 눈이었다.
“약속해요.”
“알았어, 약속.”
이준이 단단한 눈빛으로 수아를 응시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수아는 그를 빤히 보던 것을 멈추었다. 오롯이 바라보는 저 눈동자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떨리고, 설레고, 아팠다. 언제나 강이준의 모든 것이 수아를 들었다 놨다 했다.
“많이 아팠지?”
“……괜찮아요.”
흑요석처럼 까만 이준의 눈이 수아를 애틋하게 바라봤다. 예쁘던 얼굴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고작 스물 둘인데.
“미안해.”
“뭐가요.”
“전부 다.”
“…….”
1년 동안 기억상실로 널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가 널 빨리 찾아냈다면 지금쯤 이런 상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못 다한 말들이 이준의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서걱거렸다. 뱉고 나면 한없이 초라해지는 말들이 있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딱 그랬다.
“파리. 생각 나?”
“…….”
들숨을 쉬던 수아가 멈칫했다. 생기를 잃은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 이내 가슴에 물기가 가득 고였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어느 유명한 시의 한 구절처럼 파리를 생각하면 언제나 목 끝까지 서러움이 차올랐다.
가난한 자에게 사랑은 더 지독한 열병을 불러오는지도 몰랐다. 무엇하나도 쉽게 가질 수 없었기에, 사랑에 대한 간절함은 부유한 자의 수백 배쯤 되는 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생이 반짝거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요동칠 때의 떨림도 알아버렸다. 스며든 그리움에 밤마다 열병을 앓으면서 돈과 사랑을 저울질해야 했다.
그러니 가난 때문에 사랑을 쉽게 포기한다는 말은, 가짜다. 적어도 피를 토하는 심정인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침묵을 가르고, 이준이 말을 이었다.
“다음에 같이 파리에 갈 수 있을까…….”
“…….”
질문도 아니었고, 전혀 희망적이지 않은 쓸쓸한 말투였다. 강서한과의 파혼은 이대로 진행되겠지만 아직도 우리 두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
배운 사람에게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도 도덕과 윤리라는 건 참 무서운 거였다.
수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슬픈 눈으로 이준의 손끝만 바라봤다. 여전히 떨리고, 설레고, 아픈 와중에도 저 따뜻한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