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수아가 칼끝을 보고 있었다. 아픈 건 두렵지 않다. 이렇게 하면 거짓을 믿어줄까. 진실이 아닌 거짓을. 그러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수아가 칼끝을 배가 아닌 제 목으로 겨누었다. 잘 세워진 칼날의 빛이 번뜩였다. 온몸이 처절하게 떨렸다.
그런 수아의 모습을 보고 있는 서한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찔러보라고 한 건, 떠보려고 한 거다. 그 마음이 어느 정도인가 궁금해서다. 그런데 목을 찌르겠다고?
너는 강이준에게 마음을 전부 내어준 건가. 나와는 어떤 스킨십도 끔찍해했으면서…….
수아와 처음 만났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첫눈에 반했었다. 어느 공간 속에 그녀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주인공인 어느 그림 속에 햇볕과 창문, 그 밖의 것들이 차례대로 들어와 박히는 느낌이었다.
광채 나는 깨끗한 피부와 인형 같이 커다란 눈은 기묘할 정도로 예뻤다. 매끈한 허벅지,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허리, 단정한 블라우스 속에 봉긋 솟아 있는 가슴을 차례대로 훑는데, 길고 가느다란 목에 불긋한 흠집을 내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얼굴은 10대의 싱그러움을 담고 있으나, 몸은 이미 성숙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처음을 찢었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쾌락에 몸을 맡긴 채 이성을 잃어가는 모습도.
윤수아의 호흡 한 번에 주변의 공기가 달달해졌다. 요즘 학생들 같지 않게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맨 얼굴에 기품이 흘렀다. 지워지지 않는 환영을 만들어 내가며, 수아는 머릿속에 각인되어 갔다.
아직도 수아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 심장이 거세게 뛰는데. 네가 감히…….
서한의 비틀어진 입매가 씰룩거렸다. 수아가 칼의 손잡이를 꽉 잡고, 자신에게로 힘을 가했다. 서한의 손이 칼을 쥔 수아의 손보다 더 빨랐다.
“으윽…….”
칼끝은 목이 아닌 쇄골 아래를 스치면서 살을 길게 베었다.
“하, 일반 칼로 자살은 힘들지. 피부를 뚫으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거든.”
“하아……”
베인 살을 따라 핏방울이 길게 맺혔다. 수아의 흰색 티셔츠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훨씬 더 비참함을 맛 본 서한이 이죽거렸다.
“강이준을 보호하려나 본데, 어림도 없어.”
“…….”
“진짜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어? 윤수아. 사랑하냐고.”
“…….”
수아는 피부가 찢긴 고통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대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걸 믿으라고?”
서한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수아가 다친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무릎을 꿇었다. 간절한 눈으로 그에게 애원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네가 날 지옥에 빠뜨렸으니까, 너도 지옥에 빠져 봐야지. 안 그래?”
“흐윽…….”
수아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서한은 제 손가락에 묻은 수아의 피를 보더니, 입안에 넣어 피를 맛 봤다. 비릿한 맛이 서한을 더 자극시켰다.
소름이 끼쳐서 수아가 얼어붙어 있는데, 서한이 흉측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기 천장 구석에 CCTV 보이지? 강이준한테 동영상을 보낼 거야. 금방 네가 당한 일들을 강이준이 본다면 어떨까.”
수아가 앙칼진 목소리를 냈다.
“미, 미쳤어요?”
“분명히 칼을 들고 날 찌르려고 올 거야. 그지? 그 놈을 살인자로 만들어 볼까, 아니면 내가 그 새끼를 죽일까.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강이준이랑은 끝장을 봐야 되거든.”
수아가 힘껏 도리질 하며 외쳤다.
“그 사람은 아무 상관도 없어요!”
“강이준과는 죽어도 그러면 안 됐어. 네 년이 배은망덕하게도, 건드려서는 안 될 걸 건드렸어.”
***
툭! 삽이 흙 속의 어떤 것과 또 충돌했다. 동물 뼈에 부딪쳤을 때의 소리였다.
거의 다 판 것 같았다. 이준은 숨을 죽이고 목장갑을 낀 손으로 흙을 몇 번 털어냈다. 그랬더니.
“하.”
사람의 두개골이 드러났다. 강심장이라 해도 백골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털끝이 쭈뼛 서면서 식은땀이 났다.
이준은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흙을 더 파냈다.
“후우…….”
완전히 부패된 두개골이 하얗게 모습을 드러냈다. 10년이 됐으니 백골이 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역한 냄새가 났다. 이준은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썼다. 백골에서는 DNA를 찾아내기 힘들다. 오기철의 시신이라는 정보가 될 만한 것이 나와 줘야 되는데…….
그래야 빨리 강서한을 감방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오싹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던 이준이 다시금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조금씩 흙을 파내니 어깨 부분과 팔의 뼈가 드러났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사진과 동영상을 번갈아 찍으면서 증거를 남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개골만 보고도 달아날 텐데 이준은 침착하게 뼈를 파내고 있었다.
혹시나 경찰의 손에 넘어갔다가, 아버지의 입김으로 일이 그릇될까 우려한 탓이었다. 어쨌거나 아들이 한 짓이니, 부모는 살인조차 덮어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아버지는 모를 것이다. 진즉에 알았다면 시체를 이리 두지는 않았겠지.
끈질기게 대퇴골, 슬개골, 그 아래 종아리뼈를 지나 발목과 발가락뼈까지 내려왔을 때였다.
“아.”
이준이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검은 가죽이 보였다. 이준의 손이 빠르게 그 부분의 흙을 헤쳤다. 역시나.
“하아…….”
강서한의 가죽점퍼가 나왔다. 어깨부분에 징이 박혀 있는 특이한 가죽점퍼인데, 겉멋에 든 강서한이 한때 즐겨 입던 옷이었다.
세상에. 놀랄 일이었다. 사람은 썩었는데, 구더기가 들끓었을 텐데, 화학 약품 처리된 가죽은 썩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옷이 강서한의 것이라는 것만 확실하게 밝혀지면, 오기철을 죽였다는 증거가 될 거였다.
그때 이준의 폰으로 동영상이 도착했다. 강서한이 보낸 동영상이라 기분부터가 아주 더러웠다. 그것을 재생시켰더니.
“네 첫 남자가 혹시, 강이준이야?”
서한이 던진 술병에 수아가 맞아서 다리를 다쳤다. 수아는 머리채를 잡혀 끌려 다니며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럼 네가 죽을래? 네가 그 놈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스스로 널 찔러 봐.”
몸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이준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이미 수아의 불행은 시작되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이준이 턱을 아프도록 꽉 깨물면서 서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릿하게 웃는 목소리로 서한이 전화를 받았다.
-봤어?
“야이 씨발 새끼야! 넌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분노에 찬 목소리에, 고요한 산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서한의 비아냥이 귀에 꽂혔다.
-하하. 기대되는데?
“개새끼야! 너 지금 어디야!”
-윤수아. 스피커 폰이니까 한 마디 해. 강이준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봐. 보고 싶었다고 해 보라니까, 이 쌍년아?
머릿속이 저릿할 정도로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준의 입술에서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야이, 개새끼야……. 너 집이지? 내가 갈 테니까 딱 기다려…….”
-내가 기다리던 바야.
“오기철 시체 찾았어.”
-…….
정적이 흘렀다. 서한의 침묵 속에 파들거리는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뒤늦게 서한이 말을 더듬었다.
-……뭐, 뭐라고?
“대정 중학교 뒷산에서.”
-…….
이준이 또박또박 말에 힘을 주며, 협박했다.
“지금부터 수아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넌 감방에서 30년은 썩게 될 거야.”
-…….
“아직 경찰에 안 넘겼어. 그러니까, 수아 놔 줘.”
-…….
갑자기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시체가 10년 만에 나타났으니 당황했을 것이다. 이준은 다급했다. 백골을 대충 덮어놓고 어디인지 표시를 한 다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악! 씨발! 이 씹새끼를!”
서한이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고 발로 찼다.
테이블 밑에 몸을 숨긴 수아는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았다. 무서워서 질식할 것 같았다. 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심장은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댔다.
“강이준 이 개새끼! 찢어 죽일 거야! 가죽을 벗겨서 불태울 거야, 이 미친 새끼!”
서한의 눈이 휘휘 돌아갔다. 이 새끼는 진짜 흥정하려는 게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해도 날 엿 먹이고 감방에 처넣을 생각이겠지.
강이준이 찾아낼 줄이야……. 십년 동안 아무도 몰랐는데. 네가 윤수아랑 나를 끊어내려고 내 뒤를 캤단 말이지.
그 정도로 네가 윤수아를 사랑한단 말이냐. 목숨이라도 내놓을 건가? 그래, 목숨을 내놔 봐. 일단 윤수아부터 질근질근 밟아주지……. 너도 똑같이 고통스러울 테니.
수아는 두 귀를 막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귀를 막고 있었지만 광분한 상태로 지껄이는 서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수아. 네가 죽어도 하기 싫은 두 가지가 있을 거야. 첫째. 네 동생한테 엄마를 죽인 사람이 너라는 사실을 알리는 거.”
“…….”
“그리고 둘째. 나랑 자는 거.”
“…….”
수아의 귀에서 두 손이 절로 떨어졌다. 몸서리 치고 싶도록 피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핏기가 싹 가신 수아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둘 중에 더 싫은 게 뭐야? 그렇다고 하나만 하겠다는 건 아니야. 더 싫어하는 것부터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