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위로 치솟은 눈썹이 살벌했다.
“윤수아. 똑바로 대답해 봐.”
“…….”
그가 알고 있다. 응당 치러야 할 대가와 벌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오고 말았다. 수아의 음성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잤지?”
“도대체 왜 그런 의심을 하는 거예요…….”
서한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춘천 별장.”
“…….”
춘천 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의심할 만한 행동이 뭐가 있었지……. 수아는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강이준과 함께 목공실에 있었구나……. 우연히 들어간 곳이었고, 갑자기 그에게 두통이 찾아왔다. 그러다가 둘이서 주저앉아 얼마간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또 빗속에서 손목을 한 번 붙잡혔던가. CCTV를 확인했을까……. 누가 봐도 의심할 만했다. 과거에 그랬던 사이였고, 감정은 현재진행형이었으므로.
눈꺼풀을 파르르 떨고 있는 수아를 보며, 서한은 매섭게 눈꼬리를 올렸다.
“이제 생각나나 봐? 둘이서 뭐했어?”
“……아, 아니요. 그런 일 없었어요…….”
기적은 능력 없이 성실하기만 한 사람에게는 찾아오지 않는지도 몰랐다.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없었기에 천박한 거짓말쟁이가 되어야만 했다.
“백화점에서 네가 모욕당할 때. 도와준 것도 강이준이라며.”
“…….”
수아의 두 눈은 애처롭게 일렁거렸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 그건 우연히…….”
“왜 그 새끼가 우연히 널 도와줬을까. 일부러 너한테 온 것일 수도 있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처음부터 강서한을 만난 것, 약혼식장에서 강이준을 만나고도 결혼을 그대로 진행시킨 것 모두 잘못된 선택이었다.
강서한이 끝까지 모를 거라 생각했나. 며칠 전에 강이준이 결혼을 그만두라고 할 때 그만뒀어야 했을까. 하지만 지안이가…….
강서한이 벌떡 일어섰다. 190에 가까운 키가 태산처럼 느껴졌다. 수아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몸에 힘이 잔뜩 실려 있어서 당장 때려눕힐 것 같았다.
수아가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따라잡혔다. 갑자기 팔이 올라온다 싶더니.
“엇.”
서한이 수아의 손에서 폰을 가로챘다. 찌를 듯 따가운 시선이 숨 막히게 했다.
“패턴 풀어.”
“…….”
“네가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으니까.”
“…….”
수아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폰에는 아무것도 없다. 강이준의 전화와 문자는 오는 즉시 지웠으니까. 수아는 다시 폰을 건네받고 패턴을 풀어서 그에게 건넸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서한이 수아의 폰을 샅샅이 뒤지다가 씹어 먹을 것 같은 눈으로 지껄였다.
“깔끔하게 다 지웠구나. 하는 짓은 더러우면서.”
“악!”
서한이 수아를 뒤로 확 밀어버렸다. 수아는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최근 들어 부쩍 마른 몸은 종잇장처럼 힘이 없었다.
깜깜해진 시야를 밝히려고 수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자연스럽게 강서한의 전 부인 오은경, 그녀가 떠올랐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사실대로 얘기해줬는데……. 결국 똑같은 신세가 될 거면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다.
서한이 수아에게로 술병을 힘껏 집어 던졌다. 단단한 유리병이 종아리뼈에 퍽 부딪쳤다.
“악…….”
수아가 턱을 꽉 물고 왼쪽 다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도끼라도 박혔다가 튕겨나간 것처럼 욱신거리고, 다시 눈앞이 캄캄했다. 힘이 빠져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서한이 귀신이라도 씌인 듯 악랄하게 소리 질렀다.
“이 쌍년아. 어디까지 갔어? 언제가 처음이야? 말 안 해!”
서한이 다가와 수아의 배를 확 걷어찼다.
“읍!”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수아는 배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곧 서한이 수아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으윽…….”
악력이 너무 세서 머리 밑을 불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수아는 바닥에서 질질 끌려 다니며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기만 할 뿐이었다.
“감히 시동생이랑 붙어먹어? 나를 뭘로 보고?”
“하, 하아…….”
“언제부터냐고! 네 가죽을 벗겨서 강이준 앞에 던져주기 전에, 대답하라고!”
“으윽…….”
서한이 던지듯 수아의 머리채를 놓았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수아는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찢어진 이마에서 뜨거운 피가 줄줄 흘렀다. 그 사이, 서한이 주방으로 가는 듯했다.
수아는 왔던 곳으로 기어가려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는 못했다. 서한이 수아의 머리채를 다시 붙잡았다.
“하.”
짧은 비명이 입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칼끝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수아의 눈꺼풀이 파들거렸다.
“그나마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얼굴에 손 안 대고 있는 거야. 이 쌍년아. 언제부터야. 오래 됐지?”
“아, 아니에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사채업자로부터 수많은 욕지거리를 듣기는 했지만, 칼로 협박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턱과 입술이 덜덜 떨렸다. 서한이 수아의 머리채를 더 힘 있게 잡았다.
“하윽…….”
피부가 뜯겨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서한이 정신질환자처럼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빗속에서 손목 붙잡고 무슨 얘기 했어? 그 새끼가 결혼하지 말라 그랬나? 아니면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자기랑 붙어먹자고 했어?”
“…….”
날카로운 것이 수아의 눈앞에서 빛을 반사시키며 번쩍거렸다. 감히 숨을 들이마실 수도, 내쉴 수도 없었다.
서한의 눈빛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게다가 서한은 이 모든 상황을 몰래 동영상으로 녹화하고 있었다. 강이준을 끌어들여서 끝장을 봐야 했으므로.
“네가 말을 안 하면 강이준을 죽여야겠네. 그럼 네가 실토를 하겠지.”
“…….”
수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강이준이 죽는 건 못 봐? 사랑하니까?”
“흐윽…….”
버석 마른 수아의 입술에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뭐라고 해야 강이준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그런 대답 따위는 있을 리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럼 네가 죽을래?”
“…….”
섬뜩한 목소리였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서한을 바라보는 수아 앞에 툭, 칼 한 자루가 떨어졌다.
“네가 그 놈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스스로 널 찔러 봐. 네가 결백하다면 그 정도 결단력은 보여줘야 되는 거 아니야? 사람을 믿게 하려면.”
“…….”
수아가 처량한 눈으로 칼을 보고 있는데, 서한이 희번덕한 눈을 들이밀었다.
“죽지는 않게 해줄게. 그 칼로 네 배를 갈라서 피가 철철 쏟아지면 병원에 데리고 가 준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식은 예정대로 치러야 하니까.”
“…….”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가느다랗던 수아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마치 꿈같았다.
지안이가 ‘언니도 그냥 죽어’ 라고 하던 그 꿈. 수아를 가장 슬프게 하던 그 상황.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수아가 더듬더듬 칼의 손잡이를 거꾸로 잡았다. 그리고 칼끝을 자신에게로 겨누었다.
***
-대표님. 도대체 어디서 뭐하는 겁니까! 사무실로 안 나오시고요!
답답해하는 신 비서의 목소리가 산 속을 울렸다. 이준은 정부 요원처럼 산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장비를 장착하고, 랜턴으로 바닥을 비춰가며 땅을 파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산을 2/3 이상 파헤쳤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이준이 대답했다.
“하는 일이 좀 있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요! 다음 주에 미국에 가는 일 만큼 더 바쁜 겁니까! 사무실까지 얻어놨는데 어쩌자고 이러시는 건데요!
산속은 칠흑같은 어둠이라는 말이 적절했다. 일주일 동안 이 짓을 하다 보니, 종종 보이는 산짐승들이 친근하기까지 했다. 공격적인 녀석은 없었고, 먹을거리를 하나씩 던져주면 그것을 물고 달아나기 바빴다.
-미국 진출하는 거, 그렇게 기다리셨으면서 지금 정신을 어디 쏟고 다니시는 겁니까!
이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너스 천만 원이 효과가 좋았네?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모르는 해외파견근무를 기다리고 있고 말이야.”
-돈 싫어하는 놈이 어디 있습니까. 하여튼 걱정이 되어서 제가 언성이 높았습니다. 이복 형 문제를 건드리고 다니시는 것 같아서요.
“내가 비서 하나는 잘 뒀네. 이렇게 대표 걱정을 다 하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건축사무소로 발돋움하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올 초에 사무실 허가 받으려고 뉴욕에서 그 고생을 하셔놓고요.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갈 거라니까.”
-네. 믿고 있겠습니다. 이만 끊습니다.
신 비서의 걱정도 알 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준은 땅을 끊임없이 팠다. 톡!
갑자기 소리가 이상했다. 일주일 동안 산을 엎었기 때문에 낫 끝에 뭔가가 걸릴 때 소리와 질감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이 오는 수준에 이르렀다.
낫에 돌이 부딪칠 때 챙~ 하는 소리와는 달랐다. 묵직하지 않았다. 느낌상 뼈였다. 동물 뼈를 파낸 적이 있었고, 다시 묻어주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었다.
들짐승의 사체라면 누가 묻어줄리 없으므로, 이렇게 단단하게 파묻혔을 리가 없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준은 낫을 팽개치고 삽을 꺼내서 땅을 파내려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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