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95)

<63화>

“내 말 안 들려? 지금 당장 차 세우라고!”

“사장님. 지금은 위험합니다. 자, 잠시만요…….”

서한이 위험할 정도로 숨을 가파르게 내쉬었다. 차에서 뛰어내릴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김 실장은 어쩔 수 없이 급하게 깜빡이를 넣고 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지금 빨리 보여줘 봐.”

“네. 알겠습니다.”

김 실장은 들고 다니는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켰다. 화면이 밝아지기까지의 시간이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김 실장은 문제 부분을 재생시켰다. 

“……도착하신 그날 밤 영상입니다.”

서한이 미간을 구부리며 상체를 바짝 끌어당겼다. 

“여기가 목공실 앞인가?”

“네. 그렇습니다. 목공실 안에는 CCTV가 없고요. 그 앞에 있는데, 강이준은 한 시간 전부터 목공실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별장을 나온 윤수아가 10시 52분에 들어갔고요.”

그들이 시간차를 두고 같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목공실 안에서 두 사람은 40분가량 함께 있었습니다.”

“…….”

영상을 확인하는 서한의 눈이 이글거렸다. 40분이면 무슨 짓을 벌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냥 우연히 윤수아가 이곳에 들어갔고, 어쩌다 대화를 나눈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는데……. 다음에 보시면 이 장면 말입니다.”

“…….”

영상은 비 오는 어두운 정원이었다. 목공실을 나온 수아가 정원을 지나고 있는데 이준이 달려와서 수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한의 눈밑이 파들파들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대치하고 있는 두 쌍의 눈동자에서 스파크가 튀는 게 보였다. 

흡사 연인들의 사랑싸움 같은 행동이었다. 둘은 빗속에서 몇 마디를 하다가 갈라졌다. 

“이 미친 것들을…….”

서한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이건 착각이 아니다. 병적인 상상도 아니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감정의 교류가 있다. 

형수와 도련님이 손목을 붙잡고, 대화를 나눌 일이 뭐가 있나. 없다. 잘못된 관계다. 

서한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 입술에 피가 배어났다. 김 실장은 큰일이 닥쳐올까 봐 간이 조마조마했다. 그의 성격을 아주 잘 알 건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였다. 

“사, 사장님. 출발할까요…….”

서한의 눈에 비정상적인 빛이 감돌았다. 목소리에는 과도한 호흡이 섞여 있었다. 

“집으로 가.”

***

수아는 간만에 집이었다. 그동안 병원에서 생활하느라 집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쓸고 닦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면회 한 시간을 위해 왔다 갔다 하는 두 시간을 겨우 빼고, 하루 종일 일을 했다. 서 있기가 힘들었다. 수아는 차가운 방바닥에 뻗어버렸다. 

결혼은 2주도 남지 않았고, 강이준은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었다. 이제 포기하려나 봐. 잘 됐지 그럼. 그래야지……. 

형제끼리 얽힌 상태로 결혼을 감행하려 하고 있으니, 더한 벌이 남았을까 봐 겁이 났다. 

지안이 때문에 일주일간 걱정 속에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총 다섯 시간은 눈을 붙였을까. 

수아는 쓰러진 노파처럼 잠이 들었다. 이십분쯤 잠이 들었으려나. 꿈에서 지안의 모습이 보였다. 

“지안아. 마스크 안 하면 큰일 나. 빨리 마스크 써.”


싸늘한 얼굴로 지안이 수아를 올려다봤다. 


“언니. 엄마 죽일 때 어땠어?”

헉, 수아는 몸서리치며 눈을 떴다. 불도 켜지 않은 방안에서 수아는 한기를 느끼며 덜덜 떨었다. 

세운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깨어 있었지만 의식은 꿈속에 붙잡힌 상태로 방황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꼬르륵 소리에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 오전에 베이글 한 조각을 먹고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결혼식을 생각하면 굶어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일을 하고 병간호를 하려면 쓰러지면 안 됐다. 

카페에서 저녁거리로 입만 대고 말았던 샌드위치를 싸온 게 떠올랐다. 조금 엉망이 되어 버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약을 먹듯 억지로 물과 함께 삼키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강서한이었다. 켁켁, 목이 막히는 듯했다. 수아는 가슴을 두드리며 입안의 음식물을 겨우 삼킨 후 전화를 받았다.

“네. 저예요.”

-어디야?

“집이에요.”

-부탁 좀 하자.

“……뭔데요?”

서한의 목소리가 굉장히 어둡고 낮게 깔려 있었다. 

-집에 뭘 놔두고 왔는데 급해. 나 지금 공항에서 바로 사무실로 왔거든. 집에 있는 서류 좀 들고 사무실로 와 줄래?

아, 이런 거라서 다행이었다. 

“네. 그럴게요. 지금 당장 움직일게요.”

-알았어.

전화는 끊어졌다. 그의 부탁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수아는 샌드위치를 다시 넣어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어지러워서 잠깐 앞이 캄캄했다. 

수아는 벽을 짚고 호흡을 고르다가 시야가 또렷해진 후에 몸을 움직였다. 

[도곡동 블루나인 7동 펜트 하우스. 밑에 있는 경비한테 말해뒀어.]

[네. 필요한 서류는 어디 있어요?]

[트레이닝 룸 옆에 있는 서재. 책상 첫 번째 서랍 열면 빨간색 파일.]

[네. 빨리 갖다 드릴게요.]

좀처럼 택시를 타고 다니지 않지만 수아는 급하게 택시를 탔다. 

***

서한은 술을 마시면서 핏발이 선 눈을 굴렸다. 이것들이 춘천별장 목공실에서 40분간 같이 있었다. 

섹스를 한 게 분명하다. 꼭 침대가 있어야 그 짓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당연히 그 전부터 그런 관계였을 것이고……. 

언제 처음 만났을까.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언제까지 관계를 이어갈 생각이었나. 아마 결혼해서도 몰래 만날 생각이었겠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들. 날 등신으로 봤단 말이야? 감히 이것들이……. 

퍽! 서한이 술잔을 악력으로 부서뜨렸다. 손바닥에서 선홍색 피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마음이 찢어지고, 머리가 불타오르는 이 더러운 기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약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면 내 아이인지, 강이준의 아이인지도 모를 뻔했네. 하하하, 서한이 희번덕한 눈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섹스 파트너? 아니면 사랑하는 사이인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너희가 지은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될 거야. 

윤수아. 네가 날 지옥으로 끌어내린 거야. 알아? 너도 지옥을 경험하게 해줄 거라고……. 

그 시간. 수아는 30분 만에 그가 사는 곳에 도착했고 경비로부터 무사히 통과했다.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아는 꼭대기층으로 향했다. 

띵. 엘리베이터는 그의 집 안으로 도착했다. 신기해서 두리번거리다가 통유리가 보이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센서 때문에 복도의 불이 하나둘씩 켜졌다 꺼지고, 거실에 다다랐을 때 수아는 흠칫 놀랐다. 

거실에 놓인 원목 테이블에 서한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손에 글라스 잔을 들고 있는 그는 통유리로 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 금방 집에 왔어요?”

“……아니.”

“…….”

분위기가 음산했다. 술을 제법 마신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에 있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을까. 

“서류는 안 급해요?”

“…….”

서한은 대답도 없이, 잔에 남은 술을 다 마신 뒤 술을 또 가득 따랐다. 사람이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는 게 이상했다. 

뭐지.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냥 멀뚱히 서 있으라고 사람을 부르지는 않았을 텐데. 숨을 죽인 수아가 겨우 입술을 떼어냈다. 

“그럼 왜 집으로 오라고 했어요?”

“…….”

술을 마시고 내뱉는 불규칙한 숨소리에서 그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아는 긴장되어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뒤늦게 그가 손을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 손 다쳤어요?”

“…….”

처음으로 서한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가가려던 수아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어서 멈칫했다. 

살기가 가득한 눈이었다. 서한이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는데, 그 삐딱한 눈빛이 수아의 몸을 뚫어버릴 기세였다. 

“내가 이상한 걸 봤는데.”

“…….”

수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 다가온 걸까. 힘겹게 나온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뭘요.”

“글쎄. 뭘까.”

“…….”

이 넓은 공간에 증오의 감정이 온통 도사리고 있었다. 서한이 침묵하는 몇 초 동안의 시간이 하룻밤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네 입으로 먼저 말해 봐.”

“…….”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을 기회를 한 번이라도 줘 보려는 거야. 거짓말은 질색이라서.”

“…….”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사진 한 장 남긴 적 없으니까 끝까지 잡아떼면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쓸데없이 꽂힌 의심이기를 바라야만 했다. 

아이를 원하면 군말 없이 아이를 낳고, 웃으라면 웃고, 저주를 내리면 견디고, 그가 원하는 대로 살자. 

“뭘 말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수아에게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서한이 껄껄껄 실소를 터뜨렸고, 수아는 오금이 저렸다. 이윽고 칼날이 박혀 있는 듯한 시뻘건 눈이 수아를 응시했다. 

“네 첫 남자가 혹시, 강이준이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