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대략 한 시간 후. 사장실을 나온 주희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
허벅지 사이에 따끔한 통증과 근육통 때문에 주희는 또 신음했다. 몸이 이상하다, 정말. 약에 취한 것처럼 끊임없이 절정을 느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주희는 한참이나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런데 행위가 끝나고 나니, 허무함과 스치스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몸이 그의 발정을 받아내는 쓰레기통이 된 것과 다름없었다.
정말 구제불능이다. 좋다고, 소리를 얼마나 질렀는지. 자존심도 없니…….
몸은 뻗기 직전이었다. 사장과 이 짓을 한 것 때문에 월차를 쓸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억지로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데 내선전화가 걸려왔다.
“네. 사장님.”
-잠시 들어와.
뭐지? 설마 또 하자는 건 아니겠지. 오늘은 더 이상 못한다. 정말 가랑이가 찢어져서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주희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의 열기가 곳곳에 남아 있는 듯했다.
벽에서, 책상에서, 소파에서……. 낯뜨거운 행위를 떠올리던 주희의 얼굴이 또 발그스름해졌다.
서한은 거만하게 의자에 기대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희를 한 번 흘긋거린 서한이 건조하게 말했다.
“계좌번호 하나 써.”
“네?”
서한이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빨리.”
뭔지 알 것 같았지만 주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계좌번호를 썼다.
“그럼 나가서 일 봐.”
“……네. 알겠습니다.”
주희가 돌아서려는데, 서한이 눈에 힘을 주고 주희를 바라봤다.
“입은 무거울 거야. 그지?”
“그럼요.”
은밀한 관계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의 옆자리를 당당하게 꿰어 찰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콩고물이 떨어지기를 바랐다. 좀 덩어리가 큰 콩고물 말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주희는 꾸벅 인사를 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책상에 앉자마자 서둘러 폰을 확인했다. 계좌에 돈이 들어 왔으려나.
어? 들어왔다. 이게 얼마야. 백만 원인가? 아, 아니. 어머나. 천만 원이었다…….
헉! 손을 바쁘게 움직여서 다시 세어 봐도 액수는 같았다. 이렇게 큰돈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동안 남자들한테 받은 돈은 30만원 안팎이었다. 인심이 좋은 남자가 50만원을 건넨 적은 있지만 주희가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갈수록 돈은 적어졌다.
어린 나이가 주던 매력이 반감되는 거였다. 필요한 건 더 많아지는데,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배설 같은 행위였지만 강서한과 몸을 섞은 일이 살면서 가장 잘한 일처럼 느껴졌다.
즐기면서 큰돈도 들어오니 일석 십조였다. 어디선가 돈 냄새가 나는 듯했다. 주희는 코를 벌름거리면서 향긋한 돈 내음을 상상했다.
사장실 안에서 담배를 물고 있던 서한은 김 실장에서 전화를 걸었다.
-네. 사장님.
“지금부터 윤수아를 미행해서 누굴 만나는지 전부 보고해. 내가 오늘밤부터 일주일 동안 해외 출장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해외 출장이 잡혀 있었다. 홍콩에서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한 미팅이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다녀와야 하는 일정이었다.
일주일 동안 그것들이 매일 같이 만나면 어떡하지. 잠자리를 했을까. 설마……. 머릿속에서 남녀의 격한 정사가 펼쳐지면서 서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퍽! 소파를 힘껏 내리친 서한이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강이준과 엮이기라도 하면 워낙 예민해지니까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무턱대고 잡아 족치면 결혼이 엎어질 수도 있다. 결혼은 어떻게든 원래대로 치러져야 한다. 살아서는, 윤수아를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까. 증거를 잡아야 하는데…….
서한은 부리부리하게 뜬 눈알을 휘휘 굴렸다.
***
다음 날. 수아는 주치의인 김 교수를 통해 지안의 조혈모세포 이식 스케줄을 들었다.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공여자가 아주 적극적이시구요, 지안이 상태도 좋지 않은 만큼 최대한 빨리 이식 스케줄을 잡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9일 후에 특별 항공편으로 공여자의 조혈모세포가 공항에 도착할 거고요, 저희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병원으로 싣고 올 겁니다. 지안이는 내일부터 무균실에 들어가서 항암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큰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한 번 해보셨으니까 잘 아실 겁니다. 주의사항은 이식 전문 코디네이터를 만나서 이식 과정과 리스크에 대해 다시 말씀 들으실 겁니다. 간호사가 따로 준비해야 될 물건도 말해줄 거고요.”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다.
“오늘 검사 결과는 다 괜찮아요?”
“엑스레이, 심전도, 이비인후과 검사, 호흡기 검사, 핵의학과 검사 등 전부 양호합니다.”
“저번에는 심장에 무리가 갈까 봐 걱정된다고 하셨었는데, 그것도 괜찮아요?”
“네. 심장이 항암제를 견디기에 충분합니다.”
수아는 안심이 되어 살짝 웃었다.
“아, 다행이다……. 항암제는요?”
“싸이톡산입니다.”
“아.”
수아는 짧게 신음하며 이내 실망했다. 이번에도 제일 센 항암제다. 환자들 사이에서 무시무시하다고 소문난 녀석. 머리카락은 다 빠질 예정이었다.
보호자들은 환자가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데, 환자들은 온몸에서 털이 빠지는 것에 심한 충격을 받는다. 지안이도 마찬가지였고.
좀 더 얘기를 나눈 후 진료실을 나왔다. 수아는 복도 끝에 있는 창문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잠깐 현기증이 일었다. 걱정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는데다, 일만 하고 있으니 체력은 바닥이었다. 또 한 번의 골수이식…….
정말 감사하게도 독일에서 공여자가 나타났다. 몇 달에 걸쳐도 될까 말까한 일이 마치 우리를 위해서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착착 진행되고 있다.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병원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알까.
선택 장애 때문에 저녁 메뉴를 선정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가성비 좋은 물건을 검색해서 쇼핑하며, 주말에는 뭘 할까 고민하는 일. 그런 것들이 우리가 누리고 싶은 보통의 일상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안과 잠깐 동안 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를 무균실로 보내야 한다. 수아의 한숨이 무거웠다.
창밖의 하늘은 우중충했다. 짙은 회색빛 구름이 높은 건물 머리에 바로 닿아 있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또 강이준 당신 생각이 나……. 이제 확실하게 깨닫고 있어요. 우리는 절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요.
나는 그때 프랑스에 가서는 안 됐어요. 염증이 느껴지는 이런 삶에서 미치도록 탈출하고 싶었을 거예요. 고작 스물 하나에, 어서 빨리 쉰 살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그거 알아요? 오래된 서점에서 당신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순간, 하루라도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이 싹 달아났어요.
내 안에서 날갯짓을 하고 싶어 하던 나비가 피아노 선율에 되살아나더니, 다시 나를 톡톡 건드렸거든요.
그 덕분에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진정한 나로 살고 싶은 열망이 강하게 꿈틀거렸어요. 당신은 깡통 같던 내 몸에 숨결을 불어넣어줬어요. 그때 난 생기가 돌고, 설레었어요.
이제는 슬프게도 그런 감정이 나를 죽이고 있어요……. 예전처럼 박제된 심장으로 살아가고 싶을 지경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
윤수아. 돈으로 구할 수 있으면 돈으로 구할 거고, 법으로 구할 수 있으면 법으로 구할 거야. 그것도 안 되면 주먹으로라도 널 구할 거라고. 두고 봐.
윤수아와 강서한 사이에 분명히 뭔가가 있다. 강서한이 언제든 수아를 괴롭힐 수 있는 약점을 쥐고 있는 것 같은데…….
대표실에 앉은 이준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불법 대부업 정도로는 쓰레기 이미지만 가중시킬 뿐 타격을 줄 수 없다. 비자금도 상당히 만들어 놓고 있을 게 뻔한데 배임 횡령?
그걸로도 감옥에 오래 못 넣는다. 이것저것 다 붙여 봐도 고작 2,3년 될까. 재수 없으면 집행 유예로 끝나고 말 거다.
이준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결혼은 3주도 남지 않았기에, 1분 1초가 급했다. 강서한을 보내버릴 수 있는 강력한 카드…….
강서한에게 나름 큰 사건이 뭐가 있었을까. 이준이 책상 위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이준이 갑자기 호흡을 멈췄다.
오기철. 기철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강서한의 아킬레스건을 끊었던 놈. 그놈 때문에 운동을 못하게 됐다고 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복수를 다짐했었는데, 가만히 내버려뒀을 리가 없다.
나쁜 생각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이준은 냉큼 내선 전화를 걸었다.
“신 비서.”
-네. 대표님.
“강서한 친구 중에 오기철이라고 있어. 대정중학교 동창이야. 53회 졸업생. 오기철이 어디서 뭐하는지 알아봐 줘. 지금 당장.”
-네. 알겠습니다.
정황을 추측해보건대, 악랄한 방법을 썼을 것 같다……. 그게 어느 정도일지 감이 오지 않아 털끝이 쭈뼛 섰다.
이준이 창가에 서서, 셔츠 윗 단추를 풀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내선 전화가 울렸다. 신 비서였다.
-대표님. 알아봤습니다.
“뭐가 이렇게 빨라?”
-오기철 실종됐습니다.
“…….”
느낌이 아주 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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