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95)

<58화>

아킬레스건이 파열될 때 퍽, 하는 파열음이 들린다. 운동 중에 한 번 파열된 적이 있었으므로, 그 소리가 서한의 귀에 더욱 적나라하게 꽂혔다. 

작정하고 칼이 깊게 들어왔으니, 회복이 불가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링 위에 올라가지 못할 거라는 끔찍한 예감과 함께 서한은 발목을 붙잡고 뒹굴었다. 이 개새끼. 일부러 아킬레스건을……. 서한은 절망 속에서 울부짖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을 기어 다니던 처절한 기억은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살면서 경험했던 가장 잔인한 기억이자, 쓰라린 고통이었다. 

그 후 수술이 잘 되었기에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링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뼈아픈 실수였다. 이제는 밖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 일이 없었다면 운동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도 귓가에 관중들의 환호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링 위에 오를 때 매번 전율했다. 

마약이라도 한 듯 몸에는 에너지가 넘쳤고, 어떠한 괴물이라도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을 자의가 아닌 타의로 끝내게 되었을 때……. 

실의에 빠졌던 그 감정을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는 없다. 죽고 싶은 마음을 이기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다. 

서한이 쓸쓸한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는데, 손에 쥐고 있던 폰이 울렸다. 이재성이었다. 

“어. 알아봤어?”

-응. 카페 블라썸 직원이었대. 윤수아.

“…….”

머리에 도끼가 박힌 것 같았다. 서한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윤수아라고…….”

-응. 근데 이걸 왜 알아보라고 한 거야? 강이준이 그 여자랑 잘 되고 있어?

“……아니.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해서.”

서한의 목소리는 기계음처럼 높낮이가 없고, 차가웠다. 서둘러 전화를 끊은 서한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근육이 제멋대로 뒤틀렸다. 

윤수아가 맞았다. 상상하는 최악의 그림에 한 발자국 다가섰고, 그 그림이 선명해지고 있다. 내가 정신병자인가…….

아, 상상은 정말 위험한 것이었다. 미친 시나리오는 끝도 없이 툭툭 튀어나왔다. 불안했다. 

증거라고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것들뿐이다. 강이준이 백화점에서 윤수아를 도와줬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의 유럽 여행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 

이 두 가지로 수만 가지 더러운 상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벌레만도 못하게 느껴진다. 

UF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내가, 격투기로 전 세계를 호령했던 내가, 이복동생과 약혼녀를 의심하면서 나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서한이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퍽! 증거를 찾아서 들이밀기 전에는 둘이 무슨 사이냐고 말을 흘려서는 안 된다. 그래야 두 연놈을 잡을 수 있다. 

살면서 딱 한 사람에게 느꼈던 지독한 열등감. 그걸 숨기고 싶어 스스로 강해지는 쪽을 택했다. 격투기로 최고의 타이틀을 달고도, 그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흐르는 피의 절반은 같을 텐데, 계모 안나희도 딱히 우아하진 않은데, 녀석은 달랐다. 이 집안사람이 아닌 것처럼 천박한 티라곤 없었다. 강이준이라면 치를 떨었건만 결국 종착역이……. 

서한은 턱을 꽉 깨물고 부르르 떨었다. 저 녀석과 끝장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수천 번도 더 했다. 

아버지가 이준에게 따스한 말을 건넬 때마다, 그윽한 눈빛으로 볼 때마다, 집안에 불을 질러서 몰살시키고 싶었다. 그러니 절대 강이준은 안 된단 말이다. 씨발…….

어디서부터 캐봐야 되지? 서한이 희번덕한 눈을 굴리고 있는데 똑똑. 

하, 서한은 숨을 여러 번 골랐다. 

“들어 와.”

주희가 쟁반에 차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제법 친밀하게 웃었다.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던 서한은 금세 성욕이 당겼다. 

이 폭발적인 에너지를 풀지 않으면 누군가를 때려눕힐 지도 몰랐다. 게다가 저 몸은 꽤나 쓸모가 있었다. 

어느 술집 여자보다 나았다. 경험이 많아서 모든 체위에 적극적이고, 자신의 힘을 잘 견뎌내며, 고통을 잘 참는다. 몸매도 아주 봐줄 만했다. 

“자작나무잎차예요.”

“…….”

주희는 며칠 전 그와 섹스를 하고는, 기절한 것처럼 뻗어서 푹 잤다. 아침에 강서한보다 먼저 일어나 통유리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을 만끽하는데, 펜트 하우스의 아침은 특별했다. 

밤에 그 풍경들을 내려다보는 것과 아침에 내려다보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밤에는 감상에 젖어서 그저 동화 속 나라에 온 것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면, 아침에는 발아래 있는 것들이 나에게 바짝 엎드리고 있는 것 같아서 희열이 느껴졌다. 

내가 그들보다 우월해서 이 꼭대기에 있는 것만 같았다. 잠들기 전에는 이곳에 와본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이곳을 차지하고 싶어서 끙끙 앓을 지경이었다. 

주희는 상념에서 빠져 나와 서한을 응시했다. 재산이 몇 백억쯤 되겠지? 내가 그것의 일부를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결혼할 여자는 안중에도 없이 섹스를 잘 하냐고 묻지 않았었나. 도덕적 개념은 말아먹은 것이 분명하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제부터 튕기는 게 먹히지 않을까……. 주희는 최대한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잠시만.”

서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게슴츠레해진 눈빛이 수상해서, 주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서, 설마 이곳에서 덮치는 건 아니겠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주희는 짧은 치마에 가슴 부분이 꽉 끼어서 터질 듯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주희가 엉거주춤하게 뒷걸음질을 쳤고, 서한이 빠르게 다가와 주희를 벽에 밀어붙였다. 놀란 주희가 가슴을 들썩였다. 

“사, 사장님…….”

“왜.”

서한이 주희의 눈을 태연하게 바라봤다. 손은 이미 치마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주희가 서한의 거친 손을 저지하려고 붙잡았다. 

“사장실에서 이러시면 어떡해요…….”

“문 잠그면 되잖아.”

서한이 손을 뻗어 사장실의 문을 잠갔다. 

“그래도 이건 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주희의 성욕은 빠르게 이성을 지배해나갔다.

서한과의 잠자리를 떠올렸더니 아침부터 몸이 달아올랐다. 혼자 흥분해서 미끈해지는 아래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블라우스 단추를 풀 여유가 없었던 서한이 주희의 블라우스를 확 뜯어버렸다.

“어!”

단추가 몇 개 뜯어져서 바닥에 굴렀다. 봉인되어 있던 가슴이 터져 나오면서, 풍만한 살결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서한은 제 바지 버클을 풀고, 일을 치를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리고 주희의 팬티를 확 끌어내렸다. 

“어머…….”

아무 힘없는 빨간색 실크 팬티가 발목에 대롱대롱 걸렸다. 서한은 주희를 뒤로 돌게 하고, 다리를 적당히 벌리게 했다. 탐스러운 엉덩이가 가슴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서한은 한 팔로 주희의 가슴을 움켜쥐고, 주희의 엉덩이 사이에 제 것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주희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투덜댔다. 

“아, 너무 급하잖아요…….”

“제대로 서 있어 보라고, 쫌.”

정말 순식간이었다. 

“읍!”

“이미 흥분했으면서 뭘 그래.”

“흐응. 으읏…….”

허리짓을 하는 서한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입에서는 본능적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씨발. 그 연놈들을……. 이 개 같은 것들을…….”

“누, 누굴 말하는 거예요? 윽! 헉! 읍!”

“죽여 버릴 거야…….”

주희는 힘을 버텨내지 못해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서한이 주희의 목을 이빨로 사납게 물면서 경고했다. 

“똑바로 서.”

“하윽…….”

그래도 주희가 서한의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지곤 했다. 서한은 주희의 팔을 이끌더니 책상에 두 팔을 짚게 하고 밀어붙였다. 

그저 더 깊게 들어가려고 전투를 치르는 듯했다. 굴착기로 막힌 곳을 뚫어내려고 온힘을 쏟아 붓는 미친놈 같았다. 키스도 없었다. 

너무 아픈데, 그 와중에 미치게 짜릿했다. 가슴이 정신없이 덜렁거렸다. 사장실에서 이 짓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훨씬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분풀이 밖에 안 되는 행위라 굴욕적인데, 몸이 쾌락으로 찢어져도 좋을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이렇게나 따로 놀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용돈을 얻기 위해 주로 나이 든 남자들을 만났다. 늙은 고사리 같은 남자들. 살결에서 오래된 나무 냄새를 풍기는데, 변태적이지만 힘은 없었다. 

온갖 기묘한 자세를 원하면서 지가 먼저 푹 고꾸라져버리고 마는 그들. 그들이 채워주지 못한 것을 서한이 채워주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과 체력으로. 

“하, 하응, 어응, 앗,”

“웃기지 마. 아직 안 끝났어. 죽여 버릴 거야, 이 잡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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