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95)

<57화>

이준은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부터 줄곧 받지 않았다.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갔다. 앞이 캄캄해졌다가 노래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벌써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준은 문자를 보냈다. 

[강서한이 눈치 챘을 수도 있어. 헤어져.]

[강서한 손에 죽기 전에, 빠져 나오라고.]

강서한이 이상한 정도가 아니다. 교묘하게 웃는 눈동자 속에 섬뜩함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을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는 눈이었다. 아니면 의심병이 도졌거나. 확실한 물증은 있을 수가 없는데……. 

예전에 형수 오은경을 괴롭힐 때 이준은 집과 인연을 끊은 상태라 뒤늦게 잦은 폭행을 알게 됐다. 

수아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게다가 그 남자가 이준이라면, 강서한의 눈이 뒤집어지고도 남을 거였다.

어릴 때부터 적대적인 관계였다. 한 집에서 살면서,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맹렬한 증오가 가득했다. 

“하아…….”

이준은 한숨을 터뜨리며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흩날렸다. 어떡해야 되지. 수아가 당장 헤어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전면에 나서야 할까. 

그러면 강서한의 분노가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다치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수아는 절대 안 된다. 

윤수아. 대체 무엇 때문에 강서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데……. 

***

수아는 카페에서 물건을 정리하다가 잠시 숨을 돌릴 틈에 전화를 받았다. 조혈모 세포 은행 측이었다. 

“네. 기다리고 있었어요.”

-독일에서 기증자를 찾았습니다.

“지, 진짜요?”

-네. 20대 초반의 여성분께 연락을 했는데, 공여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수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분의 조혈모세포를 채취해서 검사했고요, 지안이와 유전자가 99.9% 일치하는 것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건강 상태도 아주 좋으시고요. 하루 빨리 조혈모세포 이식 진행할 수 있도록 병원 측과 스케줄 조율하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지안이를 살려줄 천사가. 극적으로 마음이 바뀌는 경우가 아니라면 또 한 번 조혈모세포 이식을 하게 될 것이다. 

수아는 잠깐 동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저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저를 미워하시고, 부디 지안이는 살려주세요. 

모든 불행은 죄를 지은 제가 짊어지게 하시고, 우리 지안이는 무탈할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간절한 바람이었다. 이제 이런 기도를 몇 번이나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예지력이 있는 걸까. 

우리가 마지막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끝이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지안이에게 다가온 희망만큼이나 수아의 절망 또한 같은 크기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젯밤 꿈에 강서한이 나왔다. 강이준과의 관계를 의심하며 칼을 들고 난동을 부렸다. 그러다가 서한의 칼에 찔렸다. 

칼끝이 피부를 가르고 뱃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오는 느낌이 끔찍해서, 새벽에 잠을 깼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너무 놀라 한참 동안 멍했다. 붉은 피가 낭자했던 상황이 잊히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죽을 짓인 건 확실하구나 싶었다. 시동생과 엮인 전적이 있다면, 이 결혼을 진즉에 멈춰야 했는데. 

과연 나는 어떻게 될까. 정말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건가. 그럼 지안이라도 살 수 있기를……. 문득 주변이 낯설었다. 수아는 사람과 사물을 천천히 둘러봤다. 

엄마……. 오랜만에 엄마를 불러. 그곳은 어때? 이곳보다 훨씬 나았으면 좋겠어. 그곳에서는 마음 편하게 지내길 바라. 못된 딸도 없으니까. 

엄마, 내가 아직도 많이 밉지……. 난 자꾸만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어.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데, 나의 성실함은 아무런 힘이 없네. 

우리 지안이 골수이식 받고, 회복할 때까지 곁에 있어줘야 하는데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엄마. 왜 이렇게 피곤하고, 하루가 길지…….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폰이 진동했다. 강이준이었다. 그를 줄기차게 무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곧 문자가 들어왔다.

[윤수아! 너 진짜 못 죽어서 환장했어?]

이 봐요. 살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기를 쓰고 살았는데도, 지금 나는 이 꼴이에요. 

[강서한이 우릴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내가 다 해결할게. 제발 강서한을 벗어나.]

수아는 폰을 덮었다. 한숨을 쉬며 처연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엄마. 불행에 길들여졌나 봐. 빠져나가지 못 하겠어……. 더 큰 불행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데도 자꾸만 무기력해. 

그리고 지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게, 제일 두려워……. 지안이가 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까 봐…… 날 경멸하는 지안의 눈을 보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워……. 

수아가 몸을 웅크리고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댔다. 

***

출근한 서한은 폰만 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왜 윤수아는 강이준을 보면 얼어버리는 것 같지. 꼭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내성적이고, 붙임성이 없는 성격 때문이 아니라, 둘 사이에 뭔가가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해보지 않았던가. 

두 사람은 서로 극도로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했었다. 과거에 인연이 닿았었다면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다. 제발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런 일은 없었어야 한다…….

강이준의 눈에서 항상 살벌한 기운이 스친다. 이걸 감지할 수 있는 건 의심이 많은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파이터로 살았기 때문이다. 

파이터는 짐승이어야 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금수(禽獸)말이다. 사실 링 위에서만 파이터였던 건 아니었다. 링 밖에서도 싸움을 일삼고 살았다. 

누군가가 등에 칼을 꽂을 것 같은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면 일격에 당한다. 아킬레스건이 파열됐을 때처럼. 

서한은 선수 생활을 하면서 이미 아킬레스건에 문제를 달고 살았었다. 하지만 링 위에서 쓰러지겠다는 각오로 견뎠다. 인기는 부와 명예를 가져다줬고, 그것에 깊게 중독되어 있었으므로.

그 사건이 생기기 1년 전, 술을 마시다가 싸움이 났었다. 오랜 친구 오기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거느리고 다니는 똘마니정도랄까. 기철은 언제나 기를 죽이고 무시해도 쌩글거리며 굽신대던 녀석이었다. 돈 몇 푼 쥐어주면, 담뱃불을 손바닥으로도 껐다. 

훈련 없이 쉬던 기간이었고, 그 날은 기철이 데리고 온 기집애들이 제법 쌔끈했다. 무리들은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 

흥이 오른 서한은 여자들에게 술을 맛있게 제조하면 지금 당장 삼백만 원을 준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중에 미연이라는 여자가 탁자 위로 올라가 스트립쇼를 하기 시작했다. 

겉옷을 모두 벗고 속옷만 남은 미연이 흐느적거리다가 마침내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벗어버렸다. 모두 환호하면서 술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미연은 가슴 사이로 술을 흘려 은밀한 곳에 잔을 대고 술을 모으더니 서한 앞으로 대령했다. 술집에 다녀서 남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곧바로 아는 여자였다. 

서한은 흡족하게 껄껄껄 웃다가 술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삼백만원을 탁자 위에 뿌렸다. 꺄, 신이 난 여자는 알몸에 돈을 쩍쩍 붙이고 탁자 위로 기어와 서한에게 키스를 했다. 

흥분한 서한은 알몸의 여자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지금 당장 이 여자의 몸에 제 것을 박아 넣고 싶었다. 같이 있던 녀석들에게 다 나가라고 지시했다.

그때였다. 눈이 뒤집어진 기철이 술병의 목을 잡고 서한에게 달려들었다. 그 여자를 전부터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술병은 서한의 몸에 스치지도 못했고, 서한도 돌아버려서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기철은 서한에게 한주먹거리도 안 됐다. 피떡이 되었다. 

고환 하나가 터지고, 오른쪽 발목과 무릎이 으스러졌다. 이미 최고의 스타였던 서한은 무리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기사가 나가지 않도록 돈으로 막았다. 

기철은 합의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돈에 눈이 먼 기철의 부모가 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로부터 대략 1년 후였다. 몇 번이나 수술했지만 기철의 다리는 회복이 안 됐다. 평생 다리를 절고 장애인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분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기철은 복수를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서한과 붙어 다녔기에 서한의 비훈련기간과 동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날 기철은 칼을 들고 잠복했다. 서한은 평소보다 더 많이 취해 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며 비틀거렸기에 계획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기철은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그러다가 어느 어두운 골목, 서한이 지갑을 떨어뜨려서 몸을 숙이다가 바닥에 콰당 넘어졌을 때 기철은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한의 아킬레스건에 칼을 힘껏 찔러 넣었다. 

“으윽…….”

서한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굴렀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