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묘한 뉘앙스였다. 순간 느낌이 싸했던 이준은 피식 웃으며 감정을 철저하게 숨겼다.
서한의 눈빛이 평소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이런 얘기는 안주거리 정도의 흥미를 보여 왔는데 금방은 기를 쓰고 속을 찔러 보는 듯했다.
“왜 웃어?”
서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고, 이준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아니. 내가 변한 것 같아서.”
“변해?”
“뭐, 좀.”
“뭐가 변했다는 걸까…….”
서한이 궁금해 하며 말끝을 흐렸다. 애가 타는 듯 서한이 이준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여행이 그렇잖아. 지나치게 설레고, 뭐든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아…….”
서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곱씹었다. 의심이 아주 조금은 옅어지고 있었지만, 한 번 강력하게 꽂힌 의문은 이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을 거였다.
“다시 보니까 별로였나?”
“여행지에서 느꼈던 것처럼 강렬하진 않더라고.”
“그 여자는 혼자야?”
“그런가 봐.”
수아는 조금 전 ‘그 여자가 결혼이라도 앞두고 있어?’라는 서한의 질문에, 속으로 기함했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뻣뻣해진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네가 작년 5월에 교통사고 났었지?”
“그랬던가…….”
이준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서한의 질문 하나하나가 날이 서 있었다. 앞뒤 퍼즐을 맞추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눈치를 챘나. 그랬다가는 수아가 위험해지는데…….
눈을 굴리던 서한이 수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으스댔다.
“우리, 아이는 좀 빨리 가지기로 했다.”
“…….”
이준은 커피 잔을 들다가 멈칫했다. 잔 안에서 커피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서한의 말이 반갑던 강 회장은 자상하게 웃으며 수아를 쳐다봤다.
“좋은 생각이야. 수아가 많이 어린데 그런 생각까지 하고. 정말 기특하구나. 서한이가 빨리 마음을 잡고 가정에 충실할 수 있을 거야. 하는 일도 더 잘 되겠지.”
나희의 숨이 싸하게 흩어졌다. 손주가 생기면 강 회장이 서한에게 더 퍼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요즘 마음이 약해져서 이 양반 하는 짓이 눈엣가시였다.
서한에게 투자했다는 긴급자금의 규모를 듣고는, 며칠 밤을 끙끙 앓았었다.
나쁜 놈. 못돼 빠진 게, 필요할 때만 애비한테 살살 붙어서 알랑방귀를 낀다. 마음에 안 들 때는 애비의 뒤통수를 살벌하게 째려보는 놈이…….
어쨌든 이준이가 빨리 장가를 가서 손주를 낳았으면 좋겠는데 왜 저 녀석은 결혼 생각도 없어 보이는지. 이러다 강서한이 다 가져간다고!
나희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수아야. 이제 스물 둘인데, 생각이 이렇게 깊다니. 서한이가 복덩이를 데려왔네. 너희 둘을 닮으면 아이가 얼마나 예쁠까……. 고맙다, 수아야.”
이미 아이라도 낳은 듯 나희는 수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수아는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 와중에도 뭔가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까 차에서 내리기 직전 서한이 프랑스에 언제 갔었냐고 물었다. 조금 전 이준에게는 교통사고가 난 시기를 물었고.
강이준과 나 사이의 교차점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의심일까, 확신일까…….
오금이 저렸다. 오은경의 말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떠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희들이 오니까 집안 분위기가 너무 좋아진다. 신혼집도 이곳에서 가까우니까 언제든 저녁 먹으러 오고. 응?”
“네. 어머님…….”
“아버지가 손주 엄청 기다리시나 봐. 출근할 때 업어서 출근하시겠다는 말씀도 하셨어. 하하하.”
서한은 기세등등한 말투였다.
“노력해볼게요.”
나희는 응큼하다는 듯 웃었다.
“서한이 네가 노력한다는 말은 좀 무서운데? 수아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체격 차이도 큰데.”
“그러죠 뭐.”
“우리는 아들딸 구별 안 하고 예뻐할 거야.”
강 회장은 은근히 욕심을 내비쳤다.
“회사가 좀 커? 경영을 시키려면 아들이 괜찮지. 물론 딸은 키우는 재미가 있을 테고.”
“요즘 여성 CEO들도 많은 거 몰라요? 당신은 너무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똑똑한 딸이 나올지 어떻게 알아요? 수아야. 절대 새겨듣지 마. 아들이든 딸이든 다 좋으니까.”
몇 마디가 더 오갔고, 서한은 벽시계를 흘긋거렸다.
“시간이 꽤 됐네요. 이제 그만 일어날게요.”
“그래. 내일 출근해야 되니까 너희들도 일찍 가서 쉬어야지.”
서한과 수아가 일어섰다. 아이 얘기를 하는 내내 얼굴이 굳어져 있던 이준이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며 뒤늦게 일어났다. 서한은 차키를 보니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물건인데?”
“누가 준 거더라고.”
“누가? 여자야?”
“어. 여행하다가 만났던 여자.”
천사 모양의 펜던트 열쇠고리를 그 여자가 남기고 떠났다던가. 서한은 이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열쇠고리 좀 줘 봐.”
“왜.”
수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갔다. 옆에 버튼처럼 튀어나온 것을 돌리면 그 안이 열린다. 그 속에 편지가 들어있단 말이야……. 아직 강이준은 발견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서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이준은 일단 열쇠고리를 건넸다. 서한은 그것을 유심히도 살폈다. 손끝으로 펜던트를 천천히 만질 때 수아는 숨도 쉬지 못했다.
다행히도 서한은 펜던트를 열지 못했다. 수아가 날숨을 조용히 뱉어내고 있는데, 서한이 열쇠고리를 이준에게 건네며 미간을 좁혔다.
“기도하고 있는 천사라……. 어쩐지 누굴 닮은 것 같은데.”
“…….”
무슨 뜻이지……? 수아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킬까 봐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한은 희미하게 불량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말이야.”
“…….”
그 말에, 이준은 척추에 소름이 올라왔다. 오늘따라 강서한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말하지 않고, 뭔가를 생각하면서 말하고 있다.
평소처럼 발끈하면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고,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준은 서한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누굴 닮았는데.”
서한이 응수하듯 이준을 빤히 보며 대답했다.
“글쎄. 그걸 잘 모르겠네.”
“…….”
서한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살고 싶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
강이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정말 신물이 났다. 그러니 안 되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어서 목구멍까지 말이 올라오는 걸 겨우 참았다.
말로 내뱉는 순간 더더욱 내가 자격지심에 절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
언젠가는 강이준을 넘을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약한 녀석이 강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역겨웠다.
어릴 때부터 영민함으로 긴장하게 했고, 어느새 훌쩍 커서 나와 똑같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
프로선수가 될 것도 아니면서 프로들과 같은 강도로 운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나를 쓰러뜨리고 싶었을 테지.
녀석은 운동을 하면서 타고난 끈기가 빛을 발했다. 몇 년 만에 눈높이와 체격이 같아졌고, 프로선수들과의 스파링에서도 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보는 눈빛에 경멸이 넘쳤다. 예전처럼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재벌가에서 피를 나눈 형제도 피 터지게 싸우는 판국에, 사이 나쁜 이복형제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유일한 경쟁자, 모든 면에서 앞서는 우월한 동생. 그게 강이준이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윤수아의 첫남자일지도 모른다…….
씨발. 내가 왜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서한은 관자놀이가 욱신거렸지만, 억지로 웃었다. 덕분에 표정이 기괴했다.
***
집에 돌아온 서한은 알콜도수가 가장 센 위스키를 꺼냈다. 머리에 불이 붙었으니, 속에도 불을 질러야 잠들 수 있을 거였다.
서한은 얼음도 넣지 않고, 독한 술을 연거푸 세 잔 들이켰다. 몸이 홧홧해진 서한의 눈이 번뜩였다.
궁금한데, 미치게 궁금한데, 행여나 끔찍한 상상이 들어맞을까 봐 확인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술을 두 잔 더 마신 후 결국 서한은 폰을 손에 쥐었다. 로얄 백화점 강남지점 본부장 이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하냐.”
-지금 나가는 중인데. 올래? 여자애들 물 좋다는데.
“그건 됐고, 알아봐 줘야 될 게 있어.”
-뭔데.
“이준이가 백화점에 왔을 때 누굴 도와준 건지 알 수 있나? 어느 카페 직원인지. 이름도 말이야.”
재성이 서한의 심기를 슬쩍 건드렸다.
-그거야 뭐 별 거 아닌데. 그게 왜 궁금하실까. 강이준이라면 치를 떠는 놈이.
서한은 주먹을 꽉 말아 쥐고, 목을 우두둑 꺾었다.
“그거까지 말해야 돼?
-……아니. 어쨌든 지금은 다들 퇴근했으니까, 내일 출근해서 알아볼게.
서한은 전화를 끊은 후 몸을 비틀었다. 두 사람을 직접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괴로운 기다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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