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95)

<55화>

서한의 눈이 몇 시간째 시뻘겠다. 눈에서 열이 펄펄 올랐다. 조금 있으면 가족들 모임에 가야 했다. 서한은 눈을 감으며 호흡을 고르려고 애썼다. 수아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교복을 입어서인지, 수아에게는 베이비파우더향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따먹으면 안 되는 선악과에서 그런 향긋한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날뛰었다. 도덕을 배반하고 싶은 욕구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니까. 

선악과는 무슨 맛일까. 궁금했지만 19살 때 너를 바로 잡아먹지 않은 이유는, 그 풋풋함을 망치지 않은 이유는, 너를 불행에 길들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 눈은 유독 사람의 마음을 붙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눈에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담아보고 싶었다. 

슬픔에 젖은 아름다운 여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함을 가지게 하므로, 너를 통하여 나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악랄한 짓을 일삼는 것이 재미있다가도 곧잘 지루하게 느껴졌으니까. 

서한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떴다. 강이준이 그놈답지 않게 여행 중에 만난 여자에게 빠졌다고 했다. 여행지에서 원나잇을 한 여자라……. 

윤수아는 1년 전 프랑스 파리에 다녀왔고, 강이준은 이탈리아에 다녀온 걸로 알고 있다. 지역이 다른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기차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윤수아와 강이준, 두 사람이 작년에 유럽을 다녀왔다는 공통점 하나 때문에 서한은 살인자 같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신경을 거스르게 했던 모든 말들이 하나씩 생각나는 중이었다. 

“이준아. 형수한테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되겠니?”


나희의 타박하는 말투에, 서한이 빈정거렸다. 


“제가 내기 골프에서 졌잖아요. 그래서 형수라는 호칭은 언제 부를지 모를 일이고요.”


그때 이준은 의기양양 했다. 


“결혼하면 부르지 뭐.”

“오오.”

“결혼한다면.”

“…….”

그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순간 기분이 굉장히 더러웠다. 결.혼.한.다.면.이라고 들렸었다. 

할 테면 해 봐. 라고 덧붙일 것 같은. 게다가 날 언제든 깔아뭉갤 수도 있다는 눈빛도 자극적이었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웬 소설을 이렇게 막장으로 쓰고 있지, 왜……. 이건 아니지. 병이야, 병. 

전 부인 오은경을 의심했던 건 이복오빠 오세준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친남매인 줄 알았다. 남매지만 각별하구나 했다. 

그런데 이복남매라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세준이 은경을 좋아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이복남매인 주제에 왜 특별한 건데. 

다른 배에서 나왔으면 강이준과 나처럼 남보다 못한 사이여야 되는 거 아닌가. 오은경과 오세준은 남녀이기 때문에, 서로 이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냐고. 

은경을 괴롭힐 때마다 세준이 눈이 뒤집어져서 달려들었다. 더 화가 났다. 두 연놈들을 기어이 무릎을 꿇리고, 납작 엎드리게 만들고 싶었다. 

주먹질을 할 때마다 은경은 픽픽 쓰러졌다. 아니, 쓰러질 때까지 때렸다. 감히 누구의 눈을 속이려고 드는 건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것들…….

서한이 담배를 연거푸 피워대면서 시계를 봤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한의 눈밑이 파르르 떨렸다. 

정신 차리고, 그들을 감시해야한다. 감정을 드러내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결혼 전에 신부가 도망가거나 다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고.  

***

카페에서 퇴근한 수아는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곧 서한이 데리러 올 시간이었다. 

저번에 백화점에서 샀던 투피스를 입고, 그가 사준 구두와 액세서리를 착용했다. 평소와 다르게 화장도 진하게 했더니,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었다. 

강서한이 악랄한가. 내가 더 악랄한가. 어차피 우리 두 사람은 제법 어울리는 그림이려나. 

수아는 슬픈 얼굴로 피식거렸다. 윤수아. 네가 가야 할 곳은 지옥이야. 그러니까 구원을 바라지 마. 죗값을 치른다는 건 살아 있을 때 고통스러워야 의미가 있는 거야.

표정을 단호하게 고친 수아는 백화점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서한의 차에 올라타 고개만 까딱거렸다.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서한은 수아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오늘 화장 마음에 드네. 근데 목에 스카프는 뭐야? 아.”

“…….”

서한은 그저께 한 짓이 바로 떠올랐다. 목을 흠뻑 빨았었지 참. 

“내가 좀 심했던가.”

“…….”

서한은 잔인하게 비웃으며 차를 출발시켰고, 수아는 비참함에 치를 떨었다. 정적이 흐르는 차 안의 공기는 숨 막히도록 무거웠다. 

하지만 송곳보다 날카로운 그의 협박이나 자존감을 긁어내리는 비아냥보다는 견딜 만했다. 

잠시 후 차는 강 회장 댁에 도착했다. 주차를 한 서한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너, 프랑스에 다녀온 게 언제였지.”

안전벨트를 풀던 수아가 멈칫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작년인데도 모르겠다고?”

“계속 정신없이 바빴으니까요.”

서한의 예리한 눈동자가 무엇을 캐내고 싶어 하는 건지, 수아는 오싹했다. 왜 갑자기 이걸 물어보는 걸까. 무엇과 연관시키려는 거지? 막연한 불안함에 맥박이 빨라졌다. 

곧 서한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수아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림을 보며 서 있던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초조하던 심장이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쭈뼛거리던 수아는 시선을 내리깔며 인사했다. 

“……도련님. 안녕하셨어요.”

“네.”

수아를 본 이준은 고개를 까딱거리지도 않았다. 서한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감지하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주시했다. 

망상일까……. 윤수아에게 일부러 물어본 거지만 여행 시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책 사진 속에 날짜가 찍혀 있었으니까. 

강이준이 유럽을 다녀온 후 사고가 났던 시기와 일치한다. 대략 5월 중순. 묘한 우연인지, 묘한 악연인지 사람을 환장하게 한단 말이지…….

식사는 나희의 수다 때문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고, 티타임도 가졌다. 

“신부 드레스 사진 보여줄까? 내가 디자이너 선생님한테 몇 장 찍어서 보내 달라고 부탁해놨었거든. 근데 너무 예뻐서 혼자 보기 아까운 거 있지?”

나희가 서한과 이준에게 수아의 드레스 사진을 전송했다. 이준은 폰으로 전송된 수아의 모습을 봤다. 잠깐 확인만 하고 말았는데도, 수아의 모습이 눈에 새겨졌다. 

파리에서 수아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자태였다. 고와서 눈이 부셨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초상을 치르는 사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이준아. 예쁘지?”

“…….”

이준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틀 전, 분명히 수아는 동요하고 있었다. 강서한이 사채회사 대표라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그런데 왜……. 강서한이 무엇을 가지고 협박했을까. 저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가 도대체 수아의 무엇을 쥐고 있는 건가. 

윤수아. 너는 왜 불구덩이를 향해 기어이 발을 내딛는 거냐고. 내 손을 잡고 나오라고 했잖아. 기회는 지금 뿐인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까 드레스를 맞추기는 힘든데. 수아야. 이해하지?”

나희는 수아에게 애플망고를 권하며 물었다. 

“네. 하루만 입는 거니까, 빌려 입는 게 편해요.”

“서운할까 봐 그러지.”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두 사람 신혼여행지는 발리로 간다고?”

“네…….”

“발리 좋지. 정말 좋을 때야, 너희들.”

“…….”

결혼 자체는 감옥이 되겠고, 신혼여행은 감금이나 독방쯤 될까. 혼인신고는 죄수번호를 가슴에 박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형량을 채워야 강서한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의 죄를 강서한이 뒤집어쓰고 있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수아가 암울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한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여행 중에 만났다는 여자는 어떻게 됐어?”

“…….”

이준이 시선을 천천히 서한에게로 옮겼다. 서한 옆에 있는 수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린 것을 이준은 감지했다. 

“곧 찾을 것 같다고 했었잖아. 찾았어?”

“…….”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어.”

수아는 탁자 아래에 있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할지도 몰랐다. 

이것만은 가혹했다. 수차례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아서, 피가 마르고 또 말랐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남자가 있어도 빼앗을 거라며.”

“글쎄.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야.”

그때 서한이 뺨을 씰룩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그 여자가 결혼이라도 앞두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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