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미치겠네, 진짜……. 이 상황에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강서한이 협박이라도 했나. 도대체 왜 헤어지지 않겠다는 건데…….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운동에 퍼부었다고 생각했는데, 분노가 몸을 한바탕 휩쓸면서 온몸이 팽팽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이준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에 열이 올라서 펄떡거렸다.
창밖으로 도심의 야경이 휘황찬란했다. 복잡한 마음을 추스를 길이 없어서, 이준은 펜던트 열쇠고리를 손에 꼭 쥐었다. 수아가 떠나면서 남겼던 기도하는 천사였다.
정말 윤수아가 강서한을 사랑하는 걸까. 엄마를 차로 치었던 사람인데도?
두 사람의 사이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그 감정을 쉽게 유추할 수가 없었다. 가끔 강서한이 내미는 돈에 안락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진짜 마음을 주게 되었을지도.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강서한의 이혼 과정도 그렇고, 두 사람의 분위기만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조금도 존중 받지 못하면서 강서한을 사랑한다고? 윤수아는 자기를 학대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란 말인가?
폭력이 아니라, 말로도 사람은 부서질 수 있다. 자신을 가시로 찔러 피가 철철 나는 것을 즐기는 미치광이라면 몰라도, 그 상황을 사랑받는 것이라 착각할 수 있나?
누가 봐도 종속관계로 보였다. 무엇 하나 약점을 잡힌 사람처럼 수아의 존재는 미미했다. 진정 사랑하는 사이라면 동등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백 번 양보해서, 윤수아가 자기 학대를 일삼는 정신병자라고 한다면, 내가 그녀를 포기할 수 있는가.
이준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 중이었다. 네가 짓이겨져서 망가지는 것을 무심하게 볼 수 있는가…….
안 된다. 너의 눈물이 나에게는 피눈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퍽! 손에 쥐고 있던 물 잔이 거센 악력 때문에 깨졌다.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났다. 다친 손보다 마음이 훨씬 아팠다.
수아의 불행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이준의 얼굴이 된통 구겨졌다. 내일 네 얼굴이 어떤지 두고 보면 알겠지.
***
다음 날. 출근한 서한은 소파에 몸을 기대어 어젯밤을 떠올렸다. 헤어지자는 윤수아 때문에 몸은 잔뜩 화가 나 있었고, 정신상태는 극도로 날카로웠었다.
정주희와 몇 시간 동안 몸을 섞었더니 몸이 좀 이완됐다. 조금은 가뿐해진 상태였다. 서한이 목을 우두둑 돌리며 어깨 근육을 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로얄 백화점 아들 이재성이었다.
“어쩐 일이야?”
-그냥 전화 한 번 해봤지. 뭐, 별 일은 없고?
“별 일이야 있나.”
종종 술을 마시는 동갑내기였고, 재성도 여자를 꽤나 밝혔다.
-두 번째 결혼을 앞둔 소감은 어때?
“그럼 너도 두 번 가던가.”
-하하. 재혼은 생각이 없었는데, 너 보니까 살짝 고민되네.
“아가씨 하나 붙여 줘? 내가 안 건드린 애로?”
-안 건드렸다고 뻥치고, 건드린 애 주려는 거 아니야? 뽕을 뽑아 먹은 애로?
“씨발. 눈치 깠냐?”
-역시 양아치 새끼. 큭큭.
서한과 재성은 실없이 한참 웃었다.
-아, 그게 언제더라…….
재성이 뭔가 가물거리는 듯 말끝을 흐렸다.
“뭐가.”
-너희 동생 강이준. 우리 백화점에 왔었다던데. 2주 전쯤인가.
“그게 뭐 별 일이야? 싱겁긴.”
-아니, 우리 백화점 VVIP 고객이 직원한테 진상을 부리고 있었나 봐. 그 여자가 아름푸드 회장 딸이었나. 하여튼 기고만장해서 직원 하나 잡으려고 지랄을 떨고 있는데, 강이준이 나타나서 말려줬다더라고. 고객관리팀까지 와서 VVIP 자격 박탈하라고 하면서.
“우워. 강이준이? 큭큭. 그 새끼 되게 할 일 없었나 보네.”
-나도 그 생각 했었지. 근데 그 직원이 워낙 예쁜가 봐.
심심풀이로 듣고 있다가 여자가 예쁘다고 하니, 서한은 귀가 솔깃해졌다.
“그래? 얼마나?”
-보안팀 직원들이 다 꽂혀 있는 카페 직원인데. 분위기가 너무 차가워서 말 한 번 걸기 힘든 스타일이라고 하더라고. 20대 초반인데 완전 쌔끈하대. 큭큭.
“…….”
카페 직원이라는 말에, 날카로운 갈퀴가 서한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얼굴이 빠르게 굳어진 서한이 예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어디 지점 관리하지?”
-강남.
“…….”
강남 로얄 백화점 카페 직원……. 카페가 10개는 넘을 것이고, 그 직원들이 100명에 가까울 텐데 왜 수아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서한의 숨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머리 밑의 모근까지 수직으로 서는 느낌이었다.
“……나 지금 회의 가 봐야 되겠는데.”
-알았다. 다음에 통화하자.
전화를 끊은 서한은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수아가 헤어지자고 한 이유가 강이준 때문인가. 아니, 그럴 리가……. 머리가 뺑 돌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경기 중에 명치를 맞은 것처럼 아팠다.
어디서부터 의심을 해야 되는 건지 막막했다. 강이준이 지나가던 길에 우연찮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윤수아를 보게 되었을 수도 있다. 당연히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을 것이고.
그런데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면? 강이준이 일부러 그곳에 간 거라면? 윤수아가 부른 것일 수도…….
순식간에 몸에 열이 올라서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머리는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윤수아가 아닐 수도 있는데 왜 내가……. 와, 이거 돌겠네. 진짜…….
두 사람의 조합은 꽤나 그럴싸했다. 강이준이라면 수아의 빚을 감당할 만큼 재력이 있다.
아, 저번의 자동차 사고……. 주택가를 벗어나자마자 강이준의 차가 불쑥 앞으로 끼어들었다.
시내 한가운데도 아니고,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니 빨간색 스포츠카가 내 것이라는 걸 알아보고 일부러 그랬을 확률도 있겠는데…….
소름이 돋으면서, 뒷목이 뻣뻣해졌다. 게다가 집안에 관련된 일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하는 녀석이다.
제 발로 집을 나가 몇 년 동안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녀석이 내 약혼식 이후로 열심히 집에 드나들고 있다.
약혼식 때 처음 본 윤수아에게 반했을까. 이 새끼는 나를 증오하니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거다.
춘천 여행까지 따라 온 게, 재산이 탐이 나서 이제부터 슬슬 아버지한테 잘 보이려는 의도인가 했는데. 다른 속셈까지 있을 수도 있단 말이지…….
이렇게 의심이 많은 내가 왜 그 생각은 못 했지? 돈만 생각하고 있었다. 돈에 눈이 멀어서 내 여자를 넘보는 미친놈이 있는 줄도 모르고…….
씨발……. 이런 의심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나서, 병적으로 나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윤수아가 아닐 수도 있다. 강이준이 우연히 윤수아를 도와줬을 수도 있고. 제발 미치지 말자, 강서한……. 아니야. 아닐 거라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기분이 더러워서 담배 생각뿐이었다. 서한이 담배를 꺼내 입술에 물고, 불을 붙였다.
뿌연 담배 연기를 흠뻑 빨아들이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곧 정 비서가 사장실 안으로 들어오며 투덜댔다.
“실내에서 담배 피우고 계신 거예요? 참나.”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서한이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연기를 깊숙하게 머금었다.
“무슨 일이야?”
“사장님. 프랑스에 가 보셨죠?”
“출장 때문에 두 번.”
서한은 접대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주희는 서한 옆에 찰싹 붙어 앉으며 윤기 나는 빨간 입술로 말했다.
“다음번에 프랑스에 출장 가실 때 저 좀 데리고 가시면 안 돼요? 저는 에펠탑에 너무 가보고 싶거든요.”
“뭐, 갈 일이 생긴다면.”
“사장님 일 하시는데 방해되지 않게 할게요. 낮에 열심히 일하고 밤에 파리를 돌아다녀보고 싶어요. 아, 사장님이랑 프랑스에 가면 진짜 좋겠다~”
“…….”
주희는 가지고 온 책 한 권을 펼쳤다.
“빛나는 프랑스라구요. 이 책이 초대박 베스트셀러인데요, 이번에 또 이벤트를 해요. 작년엔 이벤트에서 떨어졌는데, 어쨌든 책을 읽고 이천 자 내외의 리뷰를 쓰면 프랑스 왕복 티켓을 주거든요. 어마어마하죠?”
“…….”
“진짜예요. 이건 작년에 이벤트에 뽑힌 사람들 리뷰예요, 여기.”
“…….”
주희는 나 잡수시오. 라고 말하고 있었다. 바짝 상체를 당겨 앉은 주희는 손가락으로 봉긋한 제 가슴 바로 앞부분, 그러니까 책의 아랫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손가락의 위치가 제 가슴의 꼭지를 보라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을 바로 파묻어도 될 만큼 가슴골이 깊게 파여 있었다. 주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제 가슴을 더욱 내밀었다.
서한의 눈빛이 흐트러지며 주희의 손가락 끝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문득 익숙한 이름 세 글자가 눈에 띄었다. 윤수아.
서한의 눈매가 뱀처럼 가늘어졌다. 이상했다. 느낌이 아주 싸했다. 수아가 이벤트에 뽑혀서 프랑스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었는데.
혹시, 두 사람의 인연이 생각보다 오래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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