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95)

<52화>

머리를 크게 다친 엄마는 뇌수술 후에도 깨어나지 못했다. 새벽 출근길에 차에 치였는데 무단횡단을 해서 병원비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쪼들리는 형편에 엄마가 자신을 위해 보험 같은 것을 넣었을 리도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지안은 희귀 난치병 진단까지 받았다. 

엄마가 임신했을 때 아이를 지우자고 했던 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 나 때문에 지안이가 아픈 건가.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은 19살이 혼자 겪어내기에 너무 잔인했다. 어떡해야 되지? 어떡해야 돼? 엄마, 제발 일어나……. 나 혼자 어떡하라고…….

한 번도 풍족한 적이 없었기에 돈이 무서운 줄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섬뜩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건강할 때 만 원이 넘는 옷 하나 사 입은 적 없는 엄마는 의식도 없이 몇 달째 누워 돈을 잡아먹고 있었다. 깨어나도 심한 후유증을 앓게 될 거라 했고, 지안에게도 새롭게 병원비가 들기 시작했다. 

우리 셋 전부 살 수 있을까. 아니, 셋 다 죽어야 하나? 셋이 모두 살기는 이미 불가능해 보였다. 산다면 누가 살아야 되지?

동생의 치료를 포기한다고 하자. 운 좋게 엄마가 깨어났지만 중증 장애를 앓는다면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누가 수발을 들 것인가. 나는 대학은 꿈도 못 꾸고 일을 해야 하는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된다는 생각에 꽂혀 있으니,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엄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동생을 살려야 했다. 

그러려면 일어나지도 못하는 엄마가 빨아들이는 병원비를 끊어야 했다. 엄마는 일반 병실 구석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달빛도 흐릿한 밤이었다. 수아는 호흡기를 떼어내려고 엄마 앞에 섰다. 잠든 엄마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가끔 닫혀 있는 눈동자가 움직이고, 눈꺼풀이 바르르 흔들려서, 엄마가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 일어나서는 안 됐다. 깨어날 확률도 희박했지만, 혹시 엄마가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셋 다 연탄이라도 피워놓고 죽어야 할 판이었다. 

엄마. 미안해……. 절대로 날 용서하지 마…….

제 자신이 악마 같았다. 수아는 숨을 죽이고 인공호흡기에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수아의 하얀 손이 경련하듯 떨렸다. 

그리고 십여 분 동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극도의 충격, 공포, 혼란, 광기, 그런 감정들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병실을 걸어 나왔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 앞마당이었고, 잠시 후 병원 측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수아는 3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신음했다. 

맞아. 내가 그랬을 거야. 나 말고는 그럴 사람이 없어. 내가 엄마를 죽였어……. 지안이가 알아서는 안 돼. 절대로……. 

그러니까 윤수아. 몸이 부서져도 끅 소리 내지 말고 강서한 옆에서 죽어. 

***

서한은 박경식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윤수아 협박하는 거, 그만 둬.”

-왜. 재미 들린 사람은 너 아니었어?

“하여튼 하지 마.”

-그러지 뭐.

서한은 할 말만 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남자가 생긴 건가, 정말? 서한의 눈이 갈팡질팡하며 굴러갔다. 

아니, 아닐 거다. 수아한테 남자가 생길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숨만 쉬고 사는 것도 벅찰 텐데……. 그럼 왜 갑자기 큰 결심을 한 거지?

희미하게 의심은 가는데 이런 의심조차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겁을 주기 위해서 온갖 개소리를 했다. 

결국 히든카드를 꺼내들었다. 이 카드는, 수아가 절대로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 같은 것이었다. 넌 내 옆에 있어야 해, 윤수아. 네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어쨌든 기분은 엿 같았다. 아무나 치고 박고 싸우고 싶었다. 한 놈을 잡고 끝장을 보고 싶다. 그러다가 큰 사고라도 치면? 하, 차라리 섹스로 푸는 게 나으려나. 

수아는 오랫동안 공을 들인 여자라 정성스럽게 탐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래서 겨우 참아왔다. 

폭압적으로 퍼붓는 섹스가 아니라, 고급 음식을 먹듯 음미하며 그녀의 처음을 마음껏 즐기고 싶단 말이다. 

지금까지는 고급 술집을 이용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가까운 곳에 정기적으로 성욕을 풀 데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비서 정주희가 딱이었다. 볼륨감이 끝내주는 가슴과 엉덩이에 머리를 처박고 욕정을 풀다 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

주희는 섹스가 고팠다. 안 한지 2주 밖에 안 됐는데 아래가 미끈해졌다. 배란일인가? 배란일에는 호르몬 때문에 성욕이 더 당긴다고 하던데…….

날짜를 생각하던 주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생리는 일정하지 않았다. 한 달씩 건너뛸 때도 있었고. 

와인을 한 잔 마실까. 마트에서 사온 게 있었다. 투명한 와인 잔에 붉은 와인을 따르고 한 모금 넘겼다. 

“싼 게 비지떡이네.”

주희는 미간을 찡그리며 와인 잔을 놓았다. 거실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허리에 손을 얹고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며 가운을 어깨에서부터 스르르 내렸다. 

목, 쇄골, 어깨가 차례대로 드러났고, 압도적으로 풍만한 가슴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주희는 제 가슴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터질 듯한 것이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살결이 넘쳤다. 분홍 돌기는 색도 예쁘고 빨기 좋게 큰 편이었다. 

가슴이 막 발육할 때는 또래들보다 큰 가슴이 싫어서 부끄러웠다. 상체를 펴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다니면서 꽁꽁 싸매기 바빴다. 

하지만 남자를 만나면서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남자들은 여자의 가슴에 환장하는 종족이었다. 가슴골만 보여도 눈이 게슴츠레해지고, 침을 질질 흘렸다. 

덜렁거리는 가슴을 빨고 싶어 미치는 남자들을 보면서 큰 가슴이 무기이자 권력이 된다는 걸 일찍 깨닫게 됐다. 

넓은 골반도 콤플렉스였는데 지금은 옷을 벗으면 남자들이 반쯤 이성을 잃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클레오파트라가 된 것 같았다. 

주희는 샤워가운을 완전히 벗었다. 굴곡이 아름다운 제 나체를 보며 만족한 웃음을 짓고 있다가 돌연 시무룩해졌다. 얼굴도 빠지지 않는데…….

왜 강서한은 넘어오지 않을까. 사생활도 문란하기로 유명하면서. 

“아, 정말 짜증나…….”

중학교 때 TV에서 강서한의 UFC 경기를 자주 봤었다. 그때는 아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선수였으니, 간첩도 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상대방을 때려눕힌 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링 위에서 소리를 지르던 모습은 짐승 그 자체였다. 

그때는 툭툭 불거진 근육과 넓은 어깨가 징그러웠는데 지금은 알 것 다 아는 성인이다 보니, 침대에서는 어떨지 매우 궁금했다. 

얼마나 정력적일까. 밤새도록 하는 게 가능한가? 강서한을 생각하니 다시 허벅지 사이가 찌릿해졌다. 

오늘은 정말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은 날이었다. 늙은 영감 말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미친놈이면 좋겠는데.

주희는 다시 가운을 입고 싸구려 와인을 홀짝였다. Rrrrr~~~ 발신자를 확인한 주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어, 강서한이었다. 주희는 음, 목을 가다듬은 후 목소리 톤을 올려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어쩐 일이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뭘요.”

-섹스는 잘해?

“네?”

-올라타는 쪽이야, 깔리는 쪽이야?

“…….”

아, 이 남자 좀 봐. 주희는 기가 막혔다. 

“사장님. 질문이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에요?”

그가 피식 웃는 듯했다.

-젖가슴 다 드러내놓고 출근하는 네가 더 노골적인 거 아니고?

“…….”

사실이라 찔리기도 했지만, 직설적이어서 자존심이 퍽 상했다. 

“굉장히 무례하시네요.”

-몸으로 보상할게. 좋아서 질질 울게 해주겠다고.

“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주소 찍을 테니까, 집으로 와.

“뭐라구요?”

틱, 전화는 끊어졌다. 뭐야, 정말……. 주희는 기분이 나빠서 폰을 소파에 툭 던져버렸다. 

사적으로 걸려온 전화는 처음인데 속을 뒤집어 놓네. 아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짜증이 난 주희는 남은 와인을 가득 입에 넣었다. 조금 전보다 더 맛이 없었다. 

저급한 와인에서 왠지 늙은 남자의 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주희는 잔을 탁 소리 나게 놓았다. 그때 띠릭, 문자가 왔다. 

[강남구 도곡동 블루나인 7동 펜트하우스]

블루나인 펜트 하우스? 강남에서 비싸기로 손에 꼽히는 곳이었다. 세련된 파란 빛이 강렬하게 반짝이던 펜트 하우스였다. 

그 근처를 지나면서 저 곳은 어떨까, 막연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나야 저런 곳에 살 수 있겠지 싶었다. 

심장이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주희는 살고 있는 투룸을 둘러봤다. 원룸은 죽어도 싫어서 투룸으로 왔지만 월세 70만원을 감당하기는 조금 버거웠다. 

대여섯 개 가지고 있는 명품 가방은 더 이상 자존감을 높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더 장만하고 싶다. 작은 방에 옷이 빼곡하지만 입을 만한 것도 없고. 

구두도, 액세서리도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월급으로 한 달만 버티는 인생,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오래 고민할 것도 없었다. 주희는 당장 야한 속옷을 꺼내 입었다. 가슴 가운데만 겨우 가리는 브래지어와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티팬티였다. 

그리고 색기가 흐르도록 화장을 한 후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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