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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95)

<50화>

오은경 씨가 그랬어. 자기처럼 되기 전에 강서한에게서 벗어나라고. 그는 악마라고. 

그러니까 지안아. 언니는 강이준의 도움을 받아서 강서한을 떠날래. 돈이 필요해서 결혼을 결심한 거거든. 언니는 너무 몰랐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물어볼 곳도 없었으니까. 

그의 말대로라면, 그동안 갚은 돈이 원금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그러면 이자에 또 이자가 붙는 이 지독한 사채빚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는 거 아닐까?

선한 누군가가 큰돈을 빌려준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볼래……. 죽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면 충분히 갚아나갈 수 있지 않겠어?

내가 무탈하지 못하면, 그건 지안이 너도 마찬가지일 거야. 엄마 뱃속에서 나온 우리는 정서적으로 이어져 있잖아. 

용기를 내볼래. 언니에게 행복할 권리는 없을지 몰라도, 더 불행해지지 않을 권리는 있다고 생각해. 

거듭되는 고민 속에서도 강서한과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만은 뚜렷했다. 탈출구가 생긴 거다. 밀려 있는 설거지를 끝내고 잠시 쉬고 있는데, 강서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라고 받는 거 싫다고 했지. 너무 딱딱하다고.

“…….”

-아까 전화 안 받던데?

“일하는 중이라 계속 폰만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서한이 짜증을 냈다. 

-일은 언제까지 할 거야? 당장이라도 그만뒀으면 하는데? 한복도 보러 가야 되고, 예물도 찾아와야 되고, 신혼여행지 예약하는 것도 급하고. 내가 일이 바쁘니까 네가 일을 그만두고 낮에 일을 봐줘야 될 것 같다고.

“…….”

내가 불행해지는 걸 보고 있는 기분이 어땠어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침묵하고 있으니, 그의 목소리가 굵직하게 깔렸다. 

-또 대답 안 하면서 고집 부리지. 윤수아. 대답 좀 하자?

“……일은 그만둘 수 없어요.”

-하, 미치겠다. 진짜. 재벌가에 시집오면서 카페에서 알바를 하겠다고? 남들 눈도 있는데 이게 말이 돼?

“알바 아니에요. 제 직장이에요…….”

-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왜 이렇게 말대꾸를 따박따박 하고 있어?

“…….”

-아우, 진짜……. 나중에 보자. 백화점 앞으로 갈게.

“…….”

전화는 툭 끊어졌다. 가끔 강서한이 던져주는 돈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그런 돈의 유혹도 싫을 만큼 그는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행동으로 일관했다. 

무시하고, 폭언을 퍼붓고, 두려움에 떨게 했다. 오직 강서한 앞에서는 인형처럼 그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는 것만 가능했다. 언제나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런데 3년 동안 강서한이 날 지켜보고 있었는데 쉽게 벗어날 수 있을까. 강이준, 그 사람이 오히려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머릿속은 실타래가 엉켜있는 것 마냥 복잡한데, 시간은 빨리도 흘렀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아 씨. 수고했어요.”

수아는 가방을 챙겨서 카페를 나왔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또 해도 부족했다. 

하지만 더 불행해지지 않을 권리. 지안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으므로, 내게도 그런 것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되뇌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스포츠카 대신 까만색 세단이었다. 그의 존재처럼 압박감을 주는 큰 차를 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최고급 외제차에 오르는 모습을 누군가는 부러워하겠지만 수아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문을 열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서한이 수아의 위아래를 훑더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내가 사준 옷은 안 입어?”

“일할 때는 비싼 옷이 불편해서요…….”

“그럼 가방은?”

“…….”

설명하기가 곤란해서 수아는 입을 닫았다. 주 52시간을 넘겨서 일을 하면 안 되는데, 매니저에게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사정을 해서 초과 근무를 하고 있다. 

그런데 6개월 치 월급과 맞먹는 가방을 들고 다니면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어김없이 비꼬는 말투가 날아왔다. 

“가방은 돈 없어서 팔아먹었어?”

“…….”

차 안은 밀폐된 공간이라 숨이 막혔다. 

“하. 알았다. 알았어……. 버리든 팔아먹든 그건 알아서 하고. 얼굴 보려고 왔는데, 나 좀 보지?”

“…….”

수아는 명령을 받은 부하처럼 고개를 들어 서한을 잠깐 바라봤다. 더는 기회가 없을 거다. 오은경, 그녀의 말대로 벗어나자…….

수아가 허벅지 위에 놓인 두 주먹을 꼭 쥐는 사이, 차는 출발했다. 운전은 오늘따라 더 사나웠고, 클랙슨 울리는 소리에 수아는 움찔했다. 

“씨발. 왜 저딴 것들이 차를 끌고 나오고 지랄이야…….”

안전벨트를 꼭 쥔 수아는 입술을 꾹 붙이고 오늘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잠시 후 차는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서한은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너 카페에서 일하는 거, 우리 집에서 탐탁지 않아 해. 이건 네가 고집 부릴 문제가 아니야. 나도 영 거슬리고. 그만 둬 당장.”

“…….”

서한은 아이를 구슬리듯 나름 부드럽게 말하려 애썼다. 

“내 말 잘 들으면 돈도 나오고 떡도 나와. 예뻐해 줄 거고, 동생도 치료해 줄 거야.”

“…….”

“윤수아. 말 좀 듣자. 어?”

“…….”

서한은 수아의 뺨을 손끝으로 훑었다. 차갑고 드센 손이 피부 위를 지나갔다. 솜털이 오소소 일어설 만큼 싫었다. 

단언컨대, 그와의 키스에 달콤함을 느낀 적이 없다. 키스마저 거부할 권리가 없었기에 꼭 필요할 때만 응했을 뿐이다. 우악스러운 손이 몸을 더듬을까 봐 언제나 얼어 있었다. 

서한이 수아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며 가까이 다가왔다. 수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하루 종일 준비했던 말은 너무나 좋지 않은 타이밍에 불쑥 나와 버렸다. 

“헤어져요.”

“…….”

금세 서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고, 칼날을 품은 눈빛이 번뜩였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 말을 되풀이하는 건 처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간절함을 실은 목소리였으나, 연약하게 떨렸다. 

“……헤어져요. 헤어지고 싶어요.”

“…….”

서한의 음성이 분노로 인해 탁하게 갈라졌다. 

“남자 생겼어?”

“아니요.”

서한이 곧바로 수아의 턱을 부서뜨릴 것처럼 쥐었다. 포악해진 서한은 당장 수아의 목을 조를 기세였다. 아니, 물어뜯을 것 같았다. 

수아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목을 조르진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서한의 걸걸한 목소리가 짐승처럼 사나웠다. 

“그럼 네가 무슨 수로 네 동생 병원비를 댈 건데. 사채빚은 어떻게 해결하고?”

“사채빚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아요?”

“…….”

살짝 궁지에 몰린 서한이 눈을 굴리며 씨발, 이라고 중얼거렸다. 턱을 꽉 문 서한이 수아를 매섭게 바라봤다. 

“나 말고 딴 놈이 돈 대준대? 아님, 벌써 가랑이 벌렸어? 빨렸냐고! 씨발!”

천박한 언어들이 쏟아졌다. 그의 이성이 탈주할까 봐 몹시도 겁이 났다. 

서한의 굵은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근육과 혈관이 불끈불끈 움직였다. 커다란 주먹이 얼굴로 날아올까 봐 수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오해하지 마세요. 남자 없어요…….”

“네가 감히 날 엿 먹여?”

“…….”

서한은 눈알이 아프도록 수아를 노려봤다. 수아는 쥐새끼처럼 달달 떨었다. 서한은 눈앞에 있는 머리통을 박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한참 동안 이를 갈았다. 

겨우 수아의 얼굴에서 손을 거둔 서한이 숨을 씩씩 내쉬었다. 얼어붙은 수아는 그의 숨소리마저 무서워서, 제 숨을 죽였다. 화난 서한은 몸이 더욱 커보였고, 수아는 작아져만 갔다.

“어떤 새끼야?”

“남자 없어요.”

“네가 스스로 결정했을 리가 없어.”

“다른 사람 없다구요.”

서한은 수아의 말을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헤어지려거든, 그 새끼 데려와. 둘이서 무릎 꿇고 싹싹 빌어. 살려달라고 내 눈앞에서 개처럼 기어. 멍멍 짖으라고!”

“…….”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아니. 그 새끼가 보는 앞에서 널 강간해볼까?”

“…….”

“그러고도 괜찮다고 한다면, 내가 그 새끼한테 널 양보할게.”

“…….”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니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악마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모근이 싸해질 정도로 소름이 올라왔다. 

“잤어, 안 잤어?”

필사적으로 부정해야 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뭐가 문제야!”

서한이 덩달아 고함을 질러서, 수아는 흠칫 떨며 대답했다. 

“배려 받지 못한다고 느껴요, 늘……. 당신의 장난감 같아요…….”

서한은 기가 막혀서 코웃음 쳤다. 

“저한테 주셨던 돈은 제가 꼭 갚을게요. 차용증도 쓰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반드시 갚을게요. 제발 헤어져주세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마구 흩날린 서한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 제발 헤어져달라고? 제발이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내가 너한테 아니었어?”

“정말 죄송해요…….”

“거짓말 하지 마. 너 남자 때문에 이러는 거 맞잖아.”

“아니에요.”

서한의 눈은 악랄함으로 미쳐 있었다. 

“그럼 처녀막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보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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