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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48/95)

<48화>

“윤수아 씨. 내가 왜 굳이 여기 나왔을 것 같아요?”

“…….”

그녀가 재차 되묻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질문의 의도를 모를 수는 없었다.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서예요. 강서한이 내가 당신 만난 거 알면, 이번에는 기어이 죽이려고 할 거예요…….”

“…….”

“그 사람, 의처증이 있어요. 같이 살면서 본색을 드러내더군요. 집 밖을 못 나가게 했어요. 병적으로 의심하고, 집착하고, 때려 부수고 그랬어요.”

“…….”

종종 느꼈다. 그의 말속에는 항상 가시가 있었고, 의심이 넘쳤다. 그녀가 거짓말쟁이였으면, 차라리 나쁜 사람이었으면 싶었다. 

“하청 업체 사장이랑 직원들 여럿 두들겨 팼어요.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도 있구요. 그거 전부 다 회장님이 돈으로 막았어요. 나는 거기서 빠져 나왔으니까, 나만 생각하자. 그 생각도 했었어요…….”

“…….”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음에는 당신이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병이 더 심해지고 있거든요.”

“…….”

수아가 무릎 위에 놓은 손을 동그랗게 말았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서, 내 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도 쉽게 내뱉는 말은 아닐 텐데, 말이 너무 무서웠다. 

“난 오랫동안 강서한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언니 병원비 때문이었어요.”

데칼코마니 같은 현실이었다. 수아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두드려 맞고 숨도 못 쉬던 날, 고맙게도 언니가 세상을 떠났어요…….”

“…….”

고맙게도. 적절한 단어는 아니지만 그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병원에 있느라 언니 발인할 때 가지 못했는데, 정말 언니한테는 미안하지만…… 눈물이 안 나더라고요. 그게 미안했어요. 언니가 그때 죽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을 지도 몰라요…….”

“…….”

“수아 씨. 살아 있는 사람을 죽는 것만큼이나 힘들게 한다면 어쩔 수 없어요. 가족도 버려야 해요. 나는 언니가 죽고 난 다음에 끝낼 게 아니라, 언니가 죽든 말든 끝냈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이 꼴은 되지 않았을 거고, 무슨 일이라도 하며 살 수 있었을 거예요.”

“…….”

예쁘던 얼굴이 폭행으로 인해 끔찍한 몰골이 되었을 때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수아는 그녀에게 자신의 모습이 겹쳐져서 연거푸 소름이 돋았다. 

“당신도 나 같은 상황일 거라 생각해요. 뭔가 큰 약점 하나쯤 잡혀 있겠죠. 일부러 그런 사람을 찾는지도 몰라요. 코너에 몰린 쥐새끼를 괴롭힐 때의 쾌감 때문에요.”

“…….”

“강서한은 약한 사람 괴롭히는 걸 즐기는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그 악마한테서 벗어나요. 나처럼 되지 말라구요.”

“…….”

“유산도 세 번 겪었어요. 폭행 때문에요.”

“…….”

수아의 입술에서 앓는 듯한 숨소리가 새어나갔다.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이, 임신 중인데도 그런 일이 있었다구요?”

“네. 그러니까 내 말 명심하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요.”

“…….”

숨이 가빠진 수아가 쌕쌕거리는 사이, 말을 마친 그녀는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아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봤는데, 이제는 그녀가 수아를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강서한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불행의 다음 순번은 당신이 될 거라는 눈빛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병원으로 걸어오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진절머리가 나는 말들이었다. 그녀가 당했던 심리적, 육체적 학대를 함께 겪은 것처럼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참지 못한 수아는 병원에 오자마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몇 번을 게워냈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우스운 것을 물었더랬다. 

“이혼할 때 위자료는 받았어요?”

“위자료 받을 생각으로 결혼하려는 거예요?”

“…….”

“몸이 이 꼴이 되고 나서 위자료가 무슨 소용이에요. 나 정신과 약 안 먹으면 잠을 못 자요. 사람이 무서워서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그 남자가 보여요…….”

수아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지 않으려 도리 짓을 했다. 입안을 헹구고 젖어드는 눈가를 훔치는데 강이준, 그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

다음 날. 이준은 출근하자마자 신 비서를 대표실로 불러 들였다. 

“신 비서. 윤수아에 대해서 알아본 건 어떻게 됐어?”

“네. 이제 막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준은 재킷을 스타일러에 걸어두며 말을 이었다.

“빨리 얘기해 봐.”

“강서한 씨와 윤수아 씨가 처음으로 만난 건.”

“괜찮으니까 존칭 빼고 편하게 말해.”

“네. 강서한과 윤수아가 처음 만난 게, 윤수아가 19살 때입니다. 윤수아의 어머니인 장미숙을, 강서한이 차로 치었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사연에, 이준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장미숙은 뇌수술을 하고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다가 상태가 더 나빠져서 몇 달 후에 사망했습니다. 강서한은 벌금 700만원 약식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준이 답답해서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징역도 아니고, 그것밖에 안 나와? 혹시 무단횡단이야?”

“네. 무단횡단이라서 치료비도 못 받았습니다. 그 후로 강서한이 윤수아를 금전적으로 간간이 도와주면서 인연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윤수아에게 14살 차이 나는 동생이 있는데,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아…….”

환장할 만한 이야깃거리였다. 이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재생 불량성 빈혈인데 중증이고요. 윤수아의 골수를 이식했다가 한 번 실패했습니다. 지금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수혈을 받지 않으면 한 달도 못 버틴다고 합니다.”

“…….”

그녀가 짊어진 가난은, 제 살갗을 파고드는 가시 덩굴이었다. 

“1년 전부터 윤수아에게 빚이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는데요,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채빚이 1억 가까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윤수아가 쓴 사채 캐시프리의 대표 박경식과 강서한이 매우 절친한 사이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쁜 느낌이 훅 스쳤다. 이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고, 신 비서는 조심스럽게 보고를 이어갔다.

“3년 전 박경식이 회사를 설립하기 직전, 강서한이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매각했는데 그게 50억 정도 됩니다. 그 돈이 캐시프리의 투자금으로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박경식은 허울뿐인 바지사장 노릇을 하고 있고요. 등록되지 않은 대부업체인데, 규모가 작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강서한이 불법 사채업까지 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여기 윤수아의 대출 기록입니다. 이것 빼내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서류를 받아든 이준이 눈살을 된통 찌푸렸다. 이럴 수가…….

“이게 뭐야. 대충 계산해 봐도 이자가 500%가 넘는데?”

“네. 맞습니다. 무등록 업체인데다 연체이자까지 대출금으로 포함시키는 전형적인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불법 추심은 말할 것도 없고요.”

“…….”

2021년 하반기부터 현행법상 대부업체의 법정금리는 최대 20%이다. 이를 초과하면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그 전에 계약된 것이라면 법정금리는 24%를 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연이자가 500%라니. 

“윤수아가 돈 때문에 숨통이 조여져서 죽기 직전이 되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막아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수아가 빚에 허덕이는 걸 일부러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준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하, 씨발…….”

강서한은 윤수아를 쥐구멍으로 몰아넣고, 자신에게로 올 수밖에 없도록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이 개새끼……. 인간이라는 말도 아까웠다. 끝장을 내야 하는데…….

이준의 두 주먹에 힘이 실려서 굵은 핏줄이 펄떡거렸다. 턱을 꽉 물고 있던 이준이 수아와의 첫만남을 떠올리며 질문했다. 

“윤수아가 파리엔 어떻게 온 거야?”

“어떤 출판사에서 이벤트를 했는데요.”

신 비서는 수아가 파리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

병실의 불이 꺼졌다. 창밖으로 시린 달빛 한 줄기가 들어와 노곤해져 있는 지안의 얼굴을 비췄다. 아이의 혈색이 더욱 파리해져가고 있었다. 

얼마 동안 지안의 얼굴을 더 볼 수 있을까. 지안의 심장이 얼마나 더 버텨줄까. 힘들지, 지안아…….

사실 언니도 힘들어.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지안이가 떠나면 언니도 따라갈게. 그러니까 우리, 더 이상 노력하지 말까…….

희망은 사람을 웃게 하고, 절망은 사람을 울게 하고, 체념은 눈물마저 말려버린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싶은 날이었다. 눈이 가물가물하던 지안이 수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언니. 얼굴이 왜 하얘?”

“…….”

“나는 피를 못 만들어서 그런 건데. 언니는 왜 그래…….”

“……언니 하나도 안 아픈데?”

수아가 퍼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니바라기인 지안이 잠에 취해 웅얼거렸다. 

“내가 대신 아플게……. 언니는 아프지 마…….”

“…….”

또 엄마 같은 말……. 수아는 목이 메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갈비뼈가 도드라지는 작은 등을 연신 쓰다듬으며 또 다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했던 불온한 생각들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잠시 지쳐 있을 뿐,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니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부디 우리를 죽음으로서 구원하지 마시고, 살아 있는 동안 삶속에서 구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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