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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47/95)

<47화>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괜한 호기심에 열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는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몰랐다. 몸이 뻣뻣해진 수아가 주저하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할 말이 있어서요. 잠깐이면 돼요. 

“…….”

수아는 눈을 질끈 감고, 몇 초 사이에 수백 번 고민했다. 짐작하건데,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서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오히려 보호해줘야 될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러면 시간과 약속장소는 제가 정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대신 최대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이면 좋겠어요.

“알았어요.”

그 전화를 받은 후 당장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겁이 났다. 당연히 강서한 몰래 만나야 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강이준이 했던 말이 종종 떠올라서 가끔 몸서리 치곤 했었는데.

“맞아서 얼굴뼈가 내려앉았다고!”

한 번 들으면, 듣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무서운 말이었다.

“괜찮으세요?”

“……네.”

디자이너의 질문에 수아는 정신이 돌아왔다. 어쨌든 지금은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고, 피팅룸 밖으로 나갔다. 

“우와…….”

강서한이 박수까지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수아의 여성스러운 몸매가 극도로 부각되는 드레스였다. 

서한은 인어처럼 아름다운 곡선에 눈을 떼지 못했다. 반짝이는 비즈가 드레스 전체를 수놓았고, 등은 거의 골반 직전까지 드러나서 아찔했다. 

앞부분도 양쪽 허리가 비치는 시스루 스타일에, 가슴은 깊게 파여 있었다. 티아라를 얹고, 올림머리를 한 수아의 웨딩드레스 자태는 완벽했다. 

“윤수아. 진짜 예뻐…….”

그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이 몸의 가치가 아직 떨어져서는 안 된다.

“신부님. 너무 예쁘시죠? 이 드레스를 이렇게 완벽하게 소화하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여자 보는 눈이 있네, 내가.”

입이 귀에 걸린 서한이 다가와 뒤에서 수아를 껴안았다. 수아는 움찔하며 입에서 튀어나올 뻔한 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신랑님이 너무 좋아하시네요. 저는 못 본 걸로 해드리겠습니다.”

디자이너는 웃으며 자리를 피해줬다. 서한은 위에서 수아의 가슴을 노골적으로 내려다봤다. 

“하, C컵이구나.”

“…….”

서한의 허벅지 사이가 꼿꼿하게 서면서, 수아의 엉덩이에 불편한 느낌이 닿았다. 소름이 쫙 끼쳤다. 

경악스러웠지만, 곧 남편 될 사람인데 소리를 지르며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고 수아는 안간힘을 썼다.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요…….”

“뭐가 어때.”

서한은 조금씩 흔들리는 가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수아를 더 꽉 안았다. 

“매일 물고 빨고 아주 기절할 정도로 괴롭힐 거야. 그래서 지금은 아껴두는 거라고. 아씨, 꼴려 죽겠다, 진짜…….”

“…….”

결혼 후에 이 사람과 스킨십을 어떻게 하지. 어떻게 잠자리를 하지……. 수아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

다음 날. 카페에서 일을 하던 수아는 쉬는 시간에 강서한의 전 부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퇴근하면 8시쯤 될 것 같아요. 한국 병원 근처 괜찮을까요?]

[네. 최대한 눈에 안 띄는 곳으로 부탁드려요.]

[조용한 커피숍 위치 알려드릴게요.]

그녀는 숨어 있고 싶어 한다. 지금은 괜찮을까. 사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데…….

남의 일이 아니다. 곧 닥쳐올 지도 모르고. 걱정만 하고 있는데 지잉지잉, 폰이 진동했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기다리던 전화여서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어떻게 됐어요?”

-미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쪽에서 지안이와 항원이 일치하는 여성분에게 연락을 시도했는데요. 그 여자 분은 지금 임신 8주라고 하시네요. 아기를 기다리고 계세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아.”

수아의 입술 사이로 짧은 비명이 터졌다.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르고, 최소 1년 6개월은 골수 기증을 해주지 못할 것이다. 모유수유를 한다면 2년이 훨씬 넘어갈 거고.

-그래서 다른 공여자 분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어요.

“네…….”

다시 앞이 캄캄해졌다. 희망은 언제나 잔잔한 물결처럼 퍼지다가,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 하나에 잔인하게 부서진다. 

엎친 데 덮치고, 찢긴 곳이 터져서 벌어지고, 끅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고통에 학습될 즈음, 신은 놀리는 것처럼 지푸라기 하나를 내민다. 

이번에는 어쩌실 건가요. 우리에게는 마지막이 남아 있지 않아요. 

타인과 유전자가 일치할 확률은 2만분의 1.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00만분의 1. 

우리가 로또 1등을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일을 해야 했으므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목안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을 억지로 누르며 수아는 진한 커피를 마셨다. 

몇 시간 후 일을 마치고 수아는 약속장소로 향했다. 퇴근시간을 알고 있는 강서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와의 만남을 알게 된다면, 굉장히 싫어할 거였다. 둘러대야 했다. 

“네. 저예요.”

-마쳤어?

“아니요. 한 시간 더 일하게 됐어요.”

-왜 갑자기?

“손님이 많아서요. 본사에서 제품도 많이 내려왔구요.”

-마치고 병원에 가는 거지?

“네.”

-그래, 알았어. 

전화는 끊어졌다. 나쁜 일을 하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심호흡을 하며 카페로 들어온 수아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한 여자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한 채 구석진 장소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확실한 것 같았다. 다가가는데, 불안해서 맥박이 빨라졌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안녕하세요.”

수아는 맞은편에 앉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녀는 매우 어두운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까지 나오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그녀는 극도로 불안해 보여서, 흡사 쫓기는 사람 같았다. 수아가 다시 한 번 입술을 열었다. 

“저는 윤수아라고 해요.”

뒤늦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오은경이에요.”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예요?”

“…….”

이곳에 나오긴 했지만, 그녀는 뭔가를 망설였다. 불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아랫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결심한 듯 눌러쓴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마스크도 벗었다. 

수아는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서른 중반쯤 됐을까. 고운 외모를 타고났는데 피부도, 머리카락도 오랫동안 방치한 느낌이었다. 마치 10년 이상 격리를 당한 사람처럼. 

생기를 잃고 좌우로 굴러가는 눈동자를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여기까지 나오려고 정말 용기를 냈어요…….”

“…….”

“지금 내 얼굴, 어때 보여요?”

“네?”

“저 올해 스물여섯이에요.”

“…….”

열 살쯤 많아 보였는데 고작 네 살 차이였다. 강서한과 살면서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 얼굴 자세히 보실래요.”

“?”

수아는 의아한 눈으로 은경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살폈다. 피부와 머리카락, 분위기 등을 파악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얼굴이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1년 전 폭행 때문에, 얼굴 한 쪽 신경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어요. 코뼈랑 광대뼈, 턱뼈까지 부서졌어요. 치아도 오른쪽은 거의 망가졌구요.”

“…….”

수아는 신음도 내지 못했다. 완전한 절망이 눈앞에 닥쳐 있었다. 

“눈물이 흐를 때, 얼굴에 뭔가가 묻을 때 감각이 거의 없어요. 음식을 먹기도 힘들구요.”

“…….”

그녀는 말을 할 때 발음이 새고, 오른쪽 얼굴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오른쪽 얼굴만 죽어버린 듯했다. 어눌해 보였다. 

1년이 지난 지금 이 정도라면 그때는 어느 정도였을까. 끔찍하지만 당시에는 피떡이 되어버렸을 거다.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 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문제가 있었다 해도 폭행은 정당하지 않으므로. 

폭행이 주기적이었는가, 하는 질문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너무나 참혹해서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과거는 수아의 미래가 될 확률이 높았다. 

몸이 덜덜 떨려서 이빨이 부딪쳤다. 수아는 티 나지 않게 턱을 지그시 물었다. 

“큰 수술만 세 번 했어요. 교정도 쭉 하고 있어요. 처음엔 부러진 코뼈가 신경을 눌러서 숨도 못 쉬었고, 후각에 문제가 생겨서 냄새도 못 맡았어요.”

“…….”

“병원에서는 폭행으로 얼굴뼈가 이렇게까지 부서진 건 처음 봤다고 했어요. 교통사고가 아니면 얼굴에 여러 군데 복합골절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죽이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

죽이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어쩌면 그녀는 운 좋게 살아남았는지도 몰랐다. 그럼 나는 죽을 수도 있을까…….

수아의 눈동자가 슬픈 빛을 띠고 일렁거렸다. 도망칠 곳이 있어야 도움이라도 요청해볼 수 있을 텐데, 내몰리기만 하고 있었다. 

강서한을 만나지 않았다면 매우 아름다웠을 그녀는 한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씰룩이며 수아를 응시했다.

“내가 왜 보자고 한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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