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95)

<46화>

다음 날. 출근한 이준의 눈에 실핏줄이 서 있었다. 어제 수아와 실랑이를 벌였으나,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는 수아를 어쩌질 못하고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아가 버스에서 내린 곳은 주거지가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였을까. 근처에 큰 병원이 있었고, 작은 쇼핑몰이 있었는데. 병원이 눈에 띈 게 불안했다. 누가 아픈 건가……. 

수아가 남긴 천사 모양의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말끔하게 차려 입은 신 비서가 들어와 책상 위에 서류 파일을 올려놓았다.

“대표님. 오늘 결재하셔야 할 서류입니다. 이번 주 스케줄도 정리해 두었습니다.”

“…….”

분명히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두 손을 깍지 끼우고 있던 이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신 비서. 사람 뒷조사 좀 해 줘.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이준은 의아한 눈을 하고 있는 신 비서 앞으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부모님 댁에 갔을 때 강서한의 약혼식 앨범에 있던 수아의 사진을 빼내 왔었다.

“이름 윤수아. 로얄 백화점 7층에 있는 카페 직원이야.”

“네. 알겠습니다. 곧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잤어도 돼.”

“임신했어? 내가 네 옆에 있을게.”

이준의 말이 생각나서, 수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정신력으로 버티며 카페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퉁퉁 부은 눈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손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오늘도 단순노동을 자처했다. 

바닥을 청소하고, 쇼케이스를 닦고, 판매 상품 포장을 하고, 본사에서 온 물건을 나르고 정리했다. 네 시간 만에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점심으로 진하게 내린 커피와 머핀 하나를 들고 수아는 구석에 앉았다. 강서한의 전화가 여러 번 와 있었기에, 전화를 해야만 했다. 

꼴도 보기 싫고, 목소리도 끔찍했지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자마자 서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났어?

“일하느라 못 받았어요…….”

-화났냐고.

“…….”

그런 일에 화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아, 답답하네. 또 대답 안 하지.

“……화 안 났어요.”

이런 성격이 답답해서, 도리어 내 자신에게 화가 난다. 역시나 그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화제를 돌렸다. 

-드레스 맞추러 가야지. 몇 시에 마쳐?

“7시에요.”

-알았어.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전화를 끊고 나서 바로 사채업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가 들을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씨발년 윤수아 씨. 또 돈 안 보냈네요.

목소리가 얇고 높은 남자였다. 카랑카랑한 음성이 언제나 섬뜩했다. 잠도 못 잔데다, 가슴에 뜨끔 통증이 몰려왔다. 

-배때기를 갈라서 내장을 파내고, 잡채를 채워드릴까요, 씨발 채무자님아? 

“다, 다음 주 수요일에 월급 타요. 이자는 갚을 수 있어요…….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네?”

-야이 쌍년아. 너 지금 카페에 있지? 

수아는 울먹거리며 애원했다. 

“제발 찾아오지 마세요. 저 직장 잘려요…….”

-왜 남의 돈을 신나게 써놓고 안 갚냐고! 네 동생 저승 가기 전에, 네 년부터 파묻어 줄까. 어? 네 년은 산 채로 시체 위에 포갤 줄 알아, 이 쌍년아! 그 다음엔 네 동생이야!

“꼬, 꼭 드릴게요……. 다음 주 수요일에요…….”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사지가 벌벌 떨렸다. 눈도 따끔하고, 목 안도 아팠다.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참는 게 훨씬 더 힘들었다. 

누가 심장을 꾹꾹 누르는 것처럼 통증이 왈칵 또 왈칵 몰려왔다. 수아는 아침도, 점심도 먹지 못했다. 

***

서한은 사장실에서 뒷짐을 지고 창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장 자리가 주는 압박감이 상당한데,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좌불안석이었다.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더러운 느낌……. 오른팔이 되어 주고 있는 김 실장이 접대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김 실장. 급한 건 막았지?”

“네. 막았습니다.”

아버지가 긴급 지원을 해줘서 임원들과 직원들 월급은 해결됐다. 두바이 입찰에 성공하기만 하면 위상이 수직 상승할 거다. 그러면 어깨에 힘 좀 줘도 될 것 같은데.

“우리 쪽 말고 가능성이 높은 곳이 몇 군데 있지?”

“스페인의 ACS가 막강합니다. 그리고 유력한 곳이 미국의 시티메인, 독일의 호흐티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위빌드도 무시할 수 없고요.”

다들 건설에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이었다. 입찰 발표는 열흘쯤 남았다. 기다리는 방법 밖에 없지만 속이 타들어갔다. 

“알았어. 그만 나가 봐.”

“네. 알겠습니다.”

김 실장이 나갔다. 잠시 후 노크소리가 들렸고, 정 비서가 들어왔다. 오늘 원피스는 누드톤이라 벗은 건지 입은 건지 헷갈렸다. 

한눈에 그녀의 비범한 사이즈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가슴과 엉덩이는 주름 없이 팽팽했다. 게다가 가슴 부분은 펄이 반짝여서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한은 대놓고 가슴골을 보다가 색욕이 진한 시선을 들어올렸다. 아이라인을 길게 내뺀 정 비서가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책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부사장님. 이거 자작나무잎차예요. 간에도 좋고, 기관지에도 좋아요. 부사장님 술도 많이 하시고, 담배도 피우시니까 하루에 한 잔 정도 꼭 드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지.”

서한은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향이 괜찮네. 시원하고 상쾌한 것이.”

“그렇죠? 자작나무는 북유럽에서 많이 자라는데요. 이건 우리나라 청정지역에서 키운 거래요. 차로 만들려면 진짜 손이 많이 가는 거라서 귀한 차예요. 어제는 술 안 드셨어요?”

“적당히 마셨어.”

“적당히 마시는 거 참 힘들던데…….”

정 비서는 창가로 가서 낮은 선반에 팔을 짚고 상체를 숙여 밖을 바라봤다. 짧은 치마는 뒷부분이 더욱 들려서 팬티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엉덩이에 손을 넣어 보라는 유혹의 몸짓과 다름없었다. 서한이 정 비서의 몸매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훑는 동안, 정 비서의 혼잣말은 계속 됐다. 

“밤에 비가 오려나……. 우산도 없는데.”

“…….”

정 비서가 서한에게 몸을 돌려 눈을 맞추고 쌩글 웃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있어서, 가슴은 쏟아질 것처럼 아찔했다. 

“저도 술 좋아하거든요. 비가 오면 술맛 더 나는 거, 부사장님도 아시죠?”

“비가 술을 부르긴 하지.”

정 비서는 술보다 내 몸이 더 맛있을 거라고 광고를 하는 듯했다. 

“술에 젖어들고 싶네요.”

서한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음탕한 눈으로 물었다. 

“정 비서는 잘 젖나?”

“……네?”

어설펐다. 말을 알아들었으면서 모르는 척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서한은 정 비서의 속내가 보여서 피식 웃었다. 

“아니야.”

“근데, 우리는 회식 안 해요?”

“…….”

저 기집애를 잡아먹을까 말까. 그 전 비서와도 섹스 파트너였다. 넙죽넙죽 몸을 잘도 대주던 년이 나중에 10억을 요구해 와서 좀 곤란했었다. 

그런데 또 눈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이 기집애를 어쩌면 좋을까. 네 속셈은 뭐야…….

***

수아는 일을 마친 후 서한의 차를 타고 드레스를 보러 가는 중이었다. 

결혼, 드레스, 첫날밤, 임신……. 그 모든 단어들이 날카로운 칼끝처럼 목을 겨누고 있는 기분이었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감정은 버리자. 내 감정은 생각하지 말자. 언제 마음대로 살아왔다고……. 

그러나 마음 어딘가에, 뭔가가 남아 있었다. 목에 칼이 꽂혀서도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리는 생선처럼, 올가미를 벗고 싶은 욕구. 

전부 다 뒤엎을 자신 있어? 수아는 허벅지 위에 놓인 주먹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약한 손은 핏기 없이 하얗기만 했다. 

못할 거니까, 그냥 이렇게 살아. 엄마한테서, 지안에게서 넌 자유로워질 수 없어……. 

곧 청담동에 있는 아주 고급스러운 가게에 도착했다. CEO 느낌을 물씬 풍기는 세련된 여자가 수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서 오세요. 디자이너 최윤진이에요. 이야, 신부님이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몸이 길쭉하게 마른데다 볼륨도 좀 있으셔서요. 어떤 드레스를 입어도 피팅이 완벽할 것 같은데요?”

서한은 기분이 좋아서 말을 거들었다. 

“이왕이면 제일 화려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런 디자인으로 봐드릴게요. 신부님 자체가 디자이너들이 선호하는 완벽한 모델이라서요, 제가 다 기대되네요.”

수아는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지만, 수아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입을 뻥긋거리기도 싫어서 잠자코 있었다. 

결혼식 날 장례식처럼 까만 드레스를 입으라고 해도, 군소리하지 않고 입을 참이었다. 

“신부님. 이리 오시겠어요?”

수아는 그녀를 따라 가서 서너 가지의 드레스를 구경했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대충 처음 보여주는 것을 선택했다. 

피팅룸 안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라 일단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안이가 위급할 수도 있으므로 냉큼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강서한 씨, 약혼녀 되시죠?

목소리가 가느다란 여자였다. 

“네. 그런데요?”

-저는 강서한 씨, 전 부인이에요. 지금 그 사람과 같이 있어요?

그녀는 얼핏 겁을 먹은 듯한 말투였다. 수아도 왠지 두려워졌다. 

“아니요. 지금은 괜찮아요.”

-내일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

무슨 일일까. 수아는 폰을 꼭 쥐고 눈동자를 굴렸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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