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이준에게는 그랬다. 경건해보여서 다가갈 수조차 없는 천사의 눈물 같았다.
닦아주지 못한 그녀의 눈물이, 이준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렸다. 이준이야말로 오랫동안 울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우주가 부서진 것 같다…….”
어느새 진지해진 서한이 이준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첫눈에 반한 거네. 절대 가벼운 감정은 아닌 거고. 그렇지?”
“…….”
이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한이 거슬리게 손가락을 탁자 위에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잖아, 문제가. 감정이라는 게 쌍방으로 느껴야 되는 거 아니야?”
“…….”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그쪽도 감정이 쌍방으로 보이진 않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이준은 참았다. 수아만 곤란해질 것 같아서였다.
“도망친 여자를 찾아내서 어쩌겠다는 건데. 남자가 있어도 빼앗겠다고?”
“…….”
“강이준. 그러다가 불륜이라도 저지르고 사회면 기사에 나는 거 아니야? 해진 그룹 차남, 간통으로 명예훼손죄 고발당하다.”
“…….”
서한이 실소를 터뜨리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가 널 다시 만나면 뭐라고 할까. 궁금해지네.”
“…….”
이준은 말없이 와인을 홀짝였다. 조금 전에 맛봤던 입술은 꿈에서 갈망했던 것만큼이나 짜릿했다.
기억상실로 그녀를 잊었던 1년 동안에도 꿈에서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역시 윤수아가 아니면 안 된다.
같은 속도로 뛰었던 두 개의 심장 소리는 착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쳐서 달려들었던 거다.
나를 기억해 내라고. 나는 머리가 망가진 순간에도 널 잊지 않았었다고…….
네 눈물이 심장 속에 파고든 순간부터 내 심장에는 슬픈 나비 한 마리가 박혀 있다. 날개가 젖어서 날지 못하는 나비. 울고 있는 가엾은 나비…….
잠시 후 수아가 자리로 돌아왔다. 눈치를 살피니, 이준이 더는 입을 열지 않은 것 같았다. 후, 숨이라도 쉴 수 있게 됐다. 서한은 혈색이 살짝 돌아온 수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일 드레스 보러 가는 거 잊지 않았지?”
“……네.”
서한의 손길이 수아에게 닿자마자 이준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수아만이 그 살 떨리는 긴장감을 몸으로 감지했다. 결혼식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그때 강 회장이 이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준이가 올해 서른둘이지?”
“네.”
테이블이 길어서, 강 회장과 나희는 이준과 서한의 대화를 듣지 못한 상태였다.
“너도 이제는 혼인을 생각해야 될 나이다. NW 투자금융의 장녀 한유나가 올해 스물여덟이야. 많이 배워서 참하고. 네 색시감으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희가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거들었다.
“피아노를 전공하거든. 이번에 귀국 독주회를 여는데, 우리도 이번에 초대되어서 얼굴을 비추려고. 이준아. 너도 가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볼래?”
“…….”
이준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 싫지 않은 건가 싶어서, 나희는 더 열을 올렸다.
“엄마가 저번에 봤는데, 진짜 예뻐. 미스 유니버스 나가서 3위 했어. 기사 검색하면 얼굴도 나올 거야. 연예 활동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쪽으로는 그만뒀는데, 하여튼 얼굴, 몸매, 지성 뭐하나 빠지지 않는다니까?”
“관심 없습니다.”
“싫으면 또 있어. 대연그룹 회장님 막내딸이 스물여섯인데, 빨리 결혼시키고 싶어 하시더라고. 그 집 막내딸도 한 미모 한다? 주위에서 연예인 시키라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회장님이 연예인은 딴따라라나 뭐라나. 회장님이 반대해서 연예인은 못하고, 지금은 미술관에서 큐레이터 하거든. 이준아. 대연 그룹 짱짱한 거 알지?”
이준의 눈빛이 단호했다.
“어머니. 관심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나희는 쌜쭉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붙였다. 수아는 얼굴에 찬물이라도 맞은 듯 멍하게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강이준에게 걸맞는 여자들은 뉴스에서나 듣던 대기업의 자녀들이었다. 하긴 내 주제에 강서한 옆에 있는 것도 감지덕지려나.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는 세 시간 만에 끝이 났다. 나희와 강 회장은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갔고, 남은 세 사람은 대리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아는 이준과 자꾸만 눈이 부딪쳐서, 지독하게 불편했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오늘따라 기사 배정이 늦었다.
서한은 와인을 제법 마셔서 기분이 거나해진 상태라, 수아의 어깨와 팔을 꽉 끌어안고 놔주질 않았다. 이죽거리고 싶은 본능도 참지 못했다.
“답도 없는 그 여자 찾지 마. 그 여잔 필히 딴 남자 꿰어 차고 있을 거야. 내 말이 맞아. 아무나한테 가랑이 벌리는 년.”
이준이 사납게 눈썹을 구겼다.
“그만하지, 이제?”
“어쭈, 뭐야……. 형한테 눈 치켜뜬 것 좀 봐라. 수아야, 저 놈이 저렇다니까.”
“…….”
서한은 껄렁하게 웃으며 또 시답지 않은 소리를 했다.
“아, 수아는 내가 처음이었어.”
“…….”
“처음에 아프다고 징징대더니, 이제는 아주 요부 흉내를 낸다? 요즘 내 위에 올라타서 소리 지르고, 울고 아주 난리도 아니야.”
“…….”
그의 거짓말에, 수아는 모멸감이 들었다. 발가벗겨진 창녀가 된 기분이었다. 감정 따위는 없는 무생물 취급에 넌덜머리가 났다. 수아의 눈과 코 주변이 벌게지고 있었다.
“네가 아까도 차에서 더 해달라고 하지 않았어?”
듣다 못한 이준이 눈에 힘을 주고 매섭게 일갈했다.
“사람이 옆에 있잖아. 그런 얘기는 안 하는 게 예의라는 것도 몰라?”
“예의? 무슨 예의? 결혼할 사인데.”
부들부들 떨던 수아가 서한을 힘껏 밀어냈다. 가방을 손에 꼭 쥐고, 땅만 보며 인사했다.
“저 그만 택시타고 갈게요.”
“왜. 화났어?”
“…….”
서한이 수아의 손목을 붙잡자, 수아는 서한의 팔을 탁 쳐내고 그를 노려봤다. 더는 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눈이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뛰다시피하여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수치스러웠다. 이런 모욕도 결혼값에 포함되어 있는 거겠지. 입술을 질끈 깨물어도 떨림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눈물이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만하라는 말도 못하고. 바보 같이……. 그걸 강이준이 다 들었어…….
수아는 울면서 버스에 올라탔다. 택시를 타고 다닐 여유가 없었다. 수아는 뒷자리에 앉아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창가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쐬었다.
애초에 자존심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관계지만 사람을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는 강서한 때문에 마음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있었다. 장난감도 다친다는 걸 그 사람은 알까.
“기사님. 저 버스 좀 따라가 주세요.”
이준은 택시를 타고 수아가 탄 버스를 쫓았다. 이준 또한 심장이 유리처럼 박살난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정사는 절대로 떠올리기 싫은 일종의 금기였다. 으스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얼굴에 잿물이라도 뿌려주고 싶었다.
두 사람의 섹스는 일방적이고, 폭압적인 관계가 아닐까. 수아는, 나의 수아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로 강서한과 몸을 섞을 것이다.
그러고도 그 새끼 옆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준은 어떻게든 수아를 붙잡기 위해 무작정 따라가고 있었다.
수아는 20분쯤 후 버스에서 내렸다.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병원이었다.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 한쪽을 붙잡았다.
몸을 돌려 얼굴을 확인한 수아가 경악했다. 강이준이었다. 이 남자가 왜…….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목이 꽉 메어, 말이 흔들렸다.
“……따라온 거예요?”
이준의 눈빛이 단단했다.
“잤어도 돼.”
“…….”
수아의 투명한 눈동자에 물기가 맺혔다. 도대체 왜 나 같은 여자한테……. 감당하기 힘든 감정 때문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수아는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수도 없이 잤어요! 숱하게!”
“괜찮아.”
그게 왜 괜찮은 건데……. 이제는 미안해서, 악이라도 써서 그를 떼어내야 했다. 수아는 씩씩대며 정신 나간 여자처럼 길거리에서 고함쳤다.
“그 사람 없이 나 못 자요! 당신과 자는 것보다, 그 사람이랑 자는 게 훨씬 좋아요! 그래서 결혼하는 거라고! 나 좀 미치게 하지 말란 말이야!”
“…….”
상당히 모욕적이고, 배신감에 치를 떨 만큼 이준에게는 잔인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이준은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허공을 보며 숨을 고르던 이준이 천천히 수아의 두 눈을 응시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 수아의 심장이 쿵 하고 박살났다. 이준의 목소리는 빈정거림 없이, 진실했다.
“혹시 임신했어? 애 아빠 필요해?”
“…….”
“내가 네 옆에 있을게.”
“…….”
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억지로 만들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지면서, 가슴 속이 물기로 출렁거렸다. 그의 감정에 동요된 수아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신 때문에…….”
수아는 이준의 셔츠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겨우 참았던 눈물이 또 터질 것 같아서 뒷말은 하지 못했다.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데 울음을 참아야 했다. 턱을 꽉 물고 수아가 비틀거렸다.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심정이야…….
죽어서, 두 번 다시는 세상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을 보기 위해서 몇 번이라도 다시 태어나고 싶은 심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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