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95)

<44화>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수아는 잽싸게 이준의 소매를 당겨서, 비상구 계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둡고 음침한데, 작은 창문으로 달빛 한 줄기가 들어왔다. 잘생긴 그의 얼굴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져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졌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얼굴인가.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함께 나눈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비상구 계단 앞으로 남자 발자국이 가까워졌다. 몸이 뻣뻣해진 수아가 당황한 눈만 굴리고 있는데, 기회를 포착한 듯 짐승의 눈을 한 이준이 수아를 양 팔로 벽에 가두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점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수아는 숨을 죽이고 머리를 차가운 벽에 바짝 붙였다. 이준이 수아의 귓바퀴 앞에서 속삭였다.

“잊었다고, 날?”

“…….”

등 뒤에 있는 문을 강서한이 열까 봐 온몸의 세포가 곤두섰다. 이준의 강렬한 눈빛에 잡아먹힐 것 같았지만, 문 뒤에서 서성대는 발소리 때문에 이준의 두터운 가슴을 힘껏 밀어낼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 몸을 섞을 때마다 느꼈던 감미로운 체향은 그대로였다. 이 향을 맡으면서 누추한 현실을 완전히 잊어갔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의 얼굴이 눈앞이었다. 달빛을 가린 까만 실루엣이 향기를 머금고 어른거렸다. 

“잊었으면 기억해 내.”

“…….”

“다시 기억해내서, 새겨 넣으란 말이야.”

“…….”

이준이 한 손으로 수아의 턱을 들어 올리더니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감쳐물었다. 야금야금, 할짝할짝 대는 혀와 입술 때문에 아찔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어두워서 청각은 예민하게 되살아났다. 부드러운 숨결이 코 주변을 간지럽혔다.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사이, 그를 그리워했던 불면의 밤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눈을 감으면 그가 보고 싶어서, 지안이처럼 엉엉 울고 싶었다. 당신의 입술을 흠뻑 빨아들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준은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수아의 허리를 끌어당기면서 혀를 입안으로 덥석 집어넣었다. 

“흐읍.”

사납게 수아의 입안을 헤집으며 몸을 탐욕스럽게 더듬어갔다. 

윤수아. 네가 파리에서 갑자기 떠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이 입술을 물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이 뺨을 만지고 싶어서, 널 껴안고 싶어서 얼마나 널 찾아다녔는데……. 너는 미워지지가 않는다. 너만 보면 갈증이 나. 죽어도 널 가져야겠어. 

지금 여기가 어딘지, 왜 이곳에 와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수아는 이준을 받아들이고 말았을 거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수아가 이준의 가슴팍을 꼬집으면서 버티다가 철썩, 이준의 뺨을 때렸다. 문 뒤의 서성거림이 사라진 뒤였다. 어둠속에서 수아가 이준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미쳤어요?”

“…….”

이준이 맞은 뺨은 신경도 쓰지 않고,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수아의 타액을 음미했다.

“내가 처음부터 너한테 미쳐 있는 거 몰랐어?”

“내가 우스워요? 정신 차려요. 나 당신 형이랑 결혼하는 여자예요.”

이글거리는 눈은 사악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너 결혼 못해. 내가 막을 거니까.”

수아가 말에 힘을 주며 눈을 부라렸다. 

“미친놈처럼 굴지 말아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준의 눈썹이 삐딱하게 치솟았다.

“하. 그럼 어쩔 건데. 강서한한테 말이라도 할래? 곧 시동생 될 강이준이 너한테 집적댄다고?”

“협박하는 거예요? 내가 못할 줄 알아요?”

이준이 수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해. 지금 당장 가서 해.”

“…….”

“아님, 내가 할까?”

“…….”

끝장을 볼 것 같은 이준의 눈빛 때문에 수아는 목이 졸리는 것만 같았다. 숨이 가빠졌다. 결국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수아는 비상구 계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보같이 괘씸한 마음은 금세 까마득해지고, 쿵쿵 쳐대던 그의 심장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에게 빨렸던 입술은 황홀했던 촉감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쌓이고 쌓인 그리움, 그 이상으로 그의 입술과 숨결은 달았다. 눈물이 툭 쏟아질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애써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입술만 보였다. 입술 위에 심장이 놓인 것처럼 입술이 달싹거렸다. 또 멍해지고, 가슴은 저릿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수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VIP룸으로 향했다. 시간이 꽤 지체되어서인지 강서한의 표정이 불퉁했다. 까칠한 목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뭐하다 이제 와?”

“……지안이와 통화 좀 했어요.”

“어디서.”

“화장실에서요.”

“…….”

여자 화장실에 있었다고 하니, 서한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잠깐 안 보이는데, 왜 빡쳤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 이준이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수아는 이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준은 빈 와인 잔을 채운 후 따끔거리는 뺨을 슬며시 만졌다.

“왜. 긁혔어?”

“어. 별 거 아니야.”

서한의 물음에, 이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와인이 피처럼 붉었다. 내가 죽을까, 강서한이 죽게 될까…….

끝까지 가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다. 가지고 있는 패를 까봐야 될 일이었다. 

“나 있잖아. 그 여자 찾을 것 같아.”

“정말?”

“가까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알아?”

서한의 눈동자에서 흥미로운 빛이 감돌았다. 수아는 손끝이 망가지도록 두 주먹에 힘을 꽉 쥐고 있었다. 관자놀이까지 씰룩댔고, 식은땀이 났다. 

“저, 저기 휴대폰을 화장실에 두고 왔나 봐요. 다녀올게요…….”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비상구 계단에서는 팽팽하게 맞섰지만, 지금은 한 발 물러서야 했다. 뻔뻔한 얼굴로 있어서는 안 됐다. 

있을 곳이 없어서 또 다시 화장실로 온 수아는 가쁜 숨을 쌕쌕거렸다. 숨통이 터질 것 같았다. 손발이 달달 떨렸다. 한 번만 나 좀 봐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말했을까……. 아니, 나를 겁주려는 거겠지? 강이준 씨. 제발 그러지 마. 안 돼…….

그 시간. 서한은 상체를 바짝 끌어당기며 다시 이준에게 물었다. 

“가까이 있다며? 어떻게 아냐고?”

“사람을 좀 시켜서 수소문하고 있거든.”

“아. 흥신소.”

“아직 만나지는 않았는데, 멀리 있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

“와. 기대된다. 찾으면 어쩔 거야? 그 여자한테 남자가 있으면?”

이준은 와인 병을 들어 원산지를 확인하다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빼앗아 와야지.”

“이야. 진짜?”

“어.”

갑자기 나희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얘들아. 아버지가 엄마 소원 들어주기로 했다. 럭셔리 크루즈 여행!”

강 회장은 나희의 고집과 애교에 슬쩍 넘어가 주기로 한 거였다. 

“당장은 안 되고, 올해 안에 시간 낼게.”

“들었지? 야호! 3주 동안이나 시간 내주신대. 나 정말 부부끼리 크루즈 여행 가는 거 부러웠단 말이야.”

“그게 그렇게 가고 싶었어?”

“그럼요. 제가 작년부터 노래 불렀잖아요. 크루즈 여행 가고 싶다고.”

서한이 와인 잔을 들며 다 같이 건배하자는 제스쳐를 취했다.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좋으시겠어요.”

“좋다마다~~”

수아 없이, 모두 잔을 들었다. 와인을 입에 머금고 신이 난 나희는 꽃병을 들어 향을 맡으며 방긋 웃었다.

“오늘따라 꽃도 더 예쁘네. 여보. 이 꽃 이름이 비단향꽃무예요. 전 장미보다 이 향기가 훨씬 좋더라구요.”

“이름이 예쁘네. 비단향꽃무.”

“그렇죠? 핑크도 예쁘고 보라도 예쁘구요. 꽃말이 뭔지 알아요?”

“글쎄.”

“영원한 아름다움이에요. 뜻도 너무 로맨틱하지 않아요?”

영원한 아름다움이라……. 이준은 비단향꽃무를 보며 꽃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서한은 아직 찾지 못한 그 여자 얘기를 더 하고 싶었다. 원래 남의 이성문제는 관심이 가기 마련이니까. 심심풀이 땅콩으로 제격인 소재였다. 

“참. 그 여자, 처음에 어떻게 만났어?”

“음…….”

이준은 천천히 그날을 떠올렸다. 수아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울고 있었다. 우는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그날의 수아의 모습이 불멸하듯 각인되어 버렸으니 영원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기분이 이상하다. 

수아가 세상의 모든 슬픔을 쏟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무력감을 느끼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애처롭고, 가슴 아프다. 

이준은 수아의 빈자리를 응시하다가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선가 그 여자가 울고 있는 걸 봤는데…… 우주가 부서진 것 같더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