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아, 여행 중에 여자를 만났구만. 큭큭.”
서한은 이준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물었다.
“뭐야, 잤어?”
“…….”
이준이 대답이 없자, 서한은 껄렁하게 웃었다.
“잔 거 맞네. 이야, 강이준. 여자 안 만나길래 몸에 문제 있나 했는데. 원나잇도 한단 말이야?”
“…….”
쨍그랑. 갑자기 포크를 떨어뜨린 건 수아였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당황한 수아가 포크를 주우려 하자, 이준이 당당하게 눈을 부딪쳐오며 말했다.
“점원 부를게요.”
“……아, 네.”
어쩜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이건 당해보라는 거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거다. 엿 먹으라고, 네 뜻대로 될 줄 아냐고, 사람 물로 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다.
수아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물 잔을 손에 꼭 쥐었다. 목이 마른데도, 물 잔을 쥔 손이 떨리는 게 티가 날까 봐 물을 벌컥 들이킬 수가 없었다.
서한은 술에 딱 맞는 안주거리를 찾았는지 흥분해 있었다.
“재밌네. 그래, 그 여자는 어찌 됐어?”
“…….”
이준은 슬며시 수아를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사라졌어.”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원나잇이라서?”
“글쎄.”
“그 여자가 이걸 두고 떠났던 말이야?”
“…….”
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수아는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
“한국에 가면 같이 살자. 응?”
“……왜 같이 살자는 거예요?”
“몰라서 물어? 매일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렇지.”
“…….”
이준이 뒤에서 수아를 껴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몸이 향긋했다. 이준은 수아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쇄골 쪽으로 입술을 옮겨가며 말했다.
“동거 싫어? 네 나이가 어리니까 결혼하자는 말을 못하는 거야. 네가 좋다면 결혼하고 싶어, 난.”
“둘 다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럼 생각해 봐 지금부터. 파리 떠나기 전까지 대답해.”
“…….”
그의 입술이 쇄골에 도달한 후 혀로 옴폭한 곳을 야금야금 핥았다. 수아의 볼과 목덜미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어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눈뜬 성욕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았다.
“밥, 청소 시키려고 그러는 거 절대 아니야. 그런 건 내가 다 알아서 해. 넌 공부하고 싶으면 하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남는 시간에 나랑 연애하면서 같이 살면 돼.”
“…….”
“기한은,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
수아는 이준의 굵은 팔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의 제안이 너무 달콤해서 아주 잠깐이지만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곧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준이 귓가에 대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내가 첫사랑이지?”
“…….”
고막을 간질이는 느낌에, 수아는 움찔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아냐고?”
“…….”
그때 이준이 수아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입술을 꾹 박았다. 짜릿한 느낌이 발끝까지 쭉 흘렀다.
“그냥, 느낌.”
“…….”
이 사람에게서 더 빨리 벗어나야 되는 게 아닐까.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엄마를 죽인 것도 모자라, 지안이가 죽도록 버려두게 될까 봐.
강서한, 그 무서운 남자가 징그러운 소리를 하며 접근할 때 문득 지안을 놔두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만약에 무슨 일이 있어서 너와 평생 헤어져야 한다면, 그냥 딱 하루만 너랑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쪽을 택할 거야.”
“…….”
죽음이 참으로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과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지안을 두고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자유를 가져볼 수 있다면……. 불온한 생각에, 심장이 꿈틀거렸다.
“같이 씻자.”
눈이 게슴츠레해진 이준이 수아의 귓불을 물었다.
“……아니요. 먼저 씻으세요.”
“왜.”
“정리할 게 있어요.”
“아, 혼자 씻기 싫은데…….”
“빨리 욕실로 가요.”
그의 등을 억지로 떠밀어 욕실로 넣으면서, 또 내가 나쁜 년이 된 것 같아서 겁이 났다. 스쳤던 나쁜 상상이 현실로 다가올까 봐, 잠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나 그래왔다. 딱히 종교는 없지만, 마음이 불안할 때 어딘가에 계실 신께 간절히 기도를 하곤 했다. 수아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제가 나빴어요. 항상 동생을 짐처럼 생각한 건 아니에요. 아주 잠깐 힘들 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에요. 제 동생을, 제 목숨보다 귀한 제 동생을 부디,
그때 벨이 울렸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였고, 정희 이모였다.
***
서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추리를 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해도 말 한 마디 없이 떠나는 건 이상하잖아.”
“…….”
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서한은 이준의 속을 긁고 싶었다. 서한은 와인 잔을 이준의 잔에 경쾌하게 부딪치고는 놀리듯 웃었다.
“그때 남자가 있었던 거 아닐까?”
“…….”
“한국에 다른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기둥서방 같은 거.”
“…….”
이준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서한은 더더욱 조롱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그냥 많이 굴러먹던 여자일 수도 있어. 원나잇 하는 애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 이놈한테 대주고, 저놈한테 대주고. 그날 밤이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고.”
“…….”
서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기분을 들쑤셨다. 무겁게 숨을 내려놓던 이준이 수아를 대놓고 바라봤다. 수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생각해요? 그런 여자였을 것 같아요?”
“……그, 글쎄요.”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를 낸 수아는 테이블 아래에서 떨리는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떠난 여잔데 네가 그딴 열쇠고리를 달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단 말이지. 혹시, 잠자리가 끝내줬나 봐?”
“…….”
서한이 입술에 묻은 와인을 혀로 날름거리면서 탐욕스럽게 물었다. 수아의 입술 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본 이준은 열쇠고리를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얘긴 그만하자.”
“왜. 재밌는데.”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얘기를 계속 하고 있으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모퉁이를 돌아 복도 끝에 오니 열린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딱히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지만 혼자 있을 수 있어서 좀 나았다.
그들 곁에서 떨어져 나왔더니 어김없이 지안이 걱정됐다. 수아는 정희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 지안이 어때요?”
-괜찮아. 열도 없고. 구토도 안 했어. 언니 올 때까지 안 자고 기다릴 거라는데 빨리 올 거지?
“네. 조금 있다가 일어설게요.”
-지안이가 바꿔 달래. 기다려 봐.
잠시 후 지안이 나름 쌩쌩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언니. 내가 토끼 될까 봐 무섭다고 그랬잖아.
“응.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당근 안 준다고 약속했는데, 저녁에 당근 푹푹 쪄서 나온 거 있지. 나 완전 기가 막혔어.
수아는 일부러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앞니 나올까 봐 걱정하고 있는 애한테 의사 선생님이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 언니가 의사 선생님한테 화를 좀 내야 되겠는데?”
자기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던지, 지안은 금세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펄쩍 뛰고 그래. 의사 선생님이 무슨 잘못이야. 지금 당근이 제철이래……. 병원 밥이 그렇지 뭐…….
“그래서 당근 먹었어?”
-응. 맛없지만 먹었어.
“아유, 잘했어.”
지안은 멸균식을 며칠째 먹고 있다. 호중구 수치가 너무 낮은 환자들만 먹는 건데, 완전히 열을 가해서 지안이 말대로 푹푹 찐 음식들이다. 소금 간도 안 되어 있어서 정말 맛이 없다.
며칠 전에는 사과를 먹고 싶다고 해서 간호사에게 특별히 부탁했더니, 사과를 삶아서 가져다 줬다. 어떤 음식이든 겉면에는 보이지 않는 세균이 있기 때문인데, 삶은 사과를 본 지안은 안 먹겠다고 울어버렸다.
면역력이 약하다는 건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과 싸워야 하는 일이다.
“지안아. 언니 곧 들어갈 거야.”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전화를 끊은 후 그나마 웃음이 조금 났다. 토끼가 될까 봐 걱정하는 엉뚱한 지안이. 지안이가 자라는 걸 보면서 힘든 일도 잊게 된다. 지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가시밭길을 걸을 수 있다. 윤수아, 힘내.
갑자기 등 뒤에서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어?”
“…….”
수아는 화들짝 놀랐다. 강이준이 눈앞에 서 있었다. 통화를 하느라 발자국 소리를 못 들었던 거였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수아는 강서한이 올까 봐 주변을 살폈다.
“머, 먼저 들어갈게요…….”
“애기 좀 해.”
“누가 보면 어쩌려구요?”
“내가 그런 거 신경 쓰는 놈으로 보였어?”
“…….”
그의 단단한 눈빛은 정말 무서운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두려웠다. 수아는 어쩔 수 없이 사정했다.
“아는 척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
이준이 바로 앞에 턱 버티고 있어서, 수아는 옆으로 비켜가려 했다. 역시나 이준이 수아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 세웠다.
이준의 손길이 닿아 수아가 경계하며 날을 세우고 있는데, 손에 쥐고 있던 폰이 지잉지잉 울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수아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강서한이었다. 지금 찾고 있는 건가?
불안한 느낌은 빗나가지 않았다. 모퉁이 저편에서 건장한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강서한의 목소리도 들렸다.
“전화도 안 받고, 어디 있는 거야…….”
수아의 등줄기에 소름이 번지면서,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조급해졌다. 어떡해야 될지 몰라서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는데.
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들켜도 되는데. 네가 선택해.”
“…….”
서한이 모퉁이를 돌면, 둘이 같이 있는 걸 들키게 된다. 바로 옆은 비상구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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