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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2/95)

<42화>

잠시 후 퇴근한 이준은 가족들과의 모임을 위해 예약되어 있는 호텔 레스토랑으로 왔다. 

파티 분위기로 꾸며진 VIP룸은 우아하고 화려했다. 특히 나희가 좋아하는 비단향꽃무, 국화, 소르벳작약 등이 테이블과 룸 곳곳에 놓여 있었다. 

은은한 향기가 공간을 감쌌고, 높은 샹들리에가 빛을 뿌리는 듯했다. 나희와 강 회장은 조금 일찍 도착한 이준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여보. 우리 이준이 이제 철 들었나 봐요. 이렇게 착한 아들이 될 줄은 몰랐는데. 그죠?”

“꼭 애비가 아프다는 말을 들어야 되는 거냐.”

이준은 삐딱하게 웃으려다 말고, 예의를 갖췄다. 

“결혼기념일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마워. 이준아.”

강 회장이 이준에게 잔을 건네며 물었다. 

“와인 한 잔 받을 테냐.”

“네. 주시죠.”

이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강 회장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이준은 제일 든든하고, 인물 좋고, 사고 치지 않는 바른 놈이었다. 머리 회전도 빠르고, 안목도 남달랐다. 

이런 놈이 애비의 일을 도와주면 좀 좋으려나. 몸이 늙어갈수록 믿을만한 후계자가 간절했다. 강서한이 이준의 반의 반만 따라가도 쓸 만할 텐데…….

“건축 디자인 쪽으로 꽤 인정받는다는 얘기는 들었다. 애비로서 뿌듯하구나.”

“미국에 진출하려고요.”

“그런데 큰 회사를 이끌어볼 생각은 정말 없는 게야?”

강 회장이 아쉬워서 발목을 잡는 듯한 심정으로 물었지만 이준은 단호했다. 

“네. 없습니다. 대신 제 회사를 크게 키워볼 생각입니다.”

“…….”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착잡해지는 마음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강 회장은 나지막한 한숨을 흘린 후 대답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언제든 애비 도움이 필요하면 편하게 말 하거라.”

“…….”

그 말에도,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 말은 진리에 가깝다. 도움을 받는다는 건 빚을 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어떻게든 혼자서 해나갈 것이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분위기가 조금 딱딱해져서 이준이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VIP실 문이 열렸고, 서한과 수아가 등장했다. 나희가 일어서서 다정한 계모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왔구나. 와줘서 정말 고마워.”

서한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결혼기념일 축하드립니다.”

이준의 눈은 수아에게 고정된 듯 붙어 있었다. 수아의 화사한 분홍색 원피스는 날씬한 허리를 강조한 디자인이었다. 어깨는 과하지 않은 퍼프소매여서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올림머리를 한 수아의 볼록한 이마와 콧날이 오똑하게 빛났고, 맑은 피부와 자두 색을 띤 붉은 입술이 대조되면서 생기발랄했다. 심플한 목걸이와 귀걸이도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준의 심장이 움찔거릴 만큼 수아는 예뻤다. 상실감과 배신감이 더욱 커졌다. 

이준은 와인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수아를 다시 흘긋거렸다. 한껏 꾸민 나희가 수아를 앞뒤로 보며 감탄했다. 

“수아야. 오늘 너무 예쁜데? 귀족 아가씨 같아.”

“고맙습니다. 결혼기념일 축하드려요. 어머님…….”

나희가 활짝 눈웃음을 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수아가 나한테 처음으로 어머님이라고 했어. 우와. 기분이 너무 좋은데? 여보. 들었어요?”

“……진작 그랬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제가 붙임성이 없어서요.”

저번에 호칭 때문에 서한에게 혼이 났던 터라,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는 그 말을 하고 나니, 이제는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 하면 강이준이 포기하겠지…….

“아버님. 결혼기념일 축하드립니다.”

“그래. 새 아가. 고맙구나.”

수아와 이준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아버님, 어머님이라는 호칭에 이준의 눈이 살벌해져 있었다. 수아는 긴장됐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이준에게 인사했다. 

“……도련님. 안녕하셨어요?”

“…….”

그때 이준이 쓰읍, 숨을 크게 안으로 삼켰다. 도련님이라……. 내가 어떻게 훼방을 놓아도, 강서한과 결혼하겠다는 뜻인가. 

기분이 엿 같아서, 목구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하는 짓이 괘씸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일단 보는 눈들이 많았기에, 이준은 뒤늦게 대답했다.

“네.”

나희가 살짝 웃으며 이준에게 핀잔을 줬다. 

“네라니. 왜 그렇게 짧아? 안부도 좀 묻고 해. 다섯 살도 아니고 형수한테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되겠니?”

서한은 재킷을 걸쳐두고 이준의 맞은편에 앉으며 빈정거렸다. 

“저 녀석이 왜 저러겠습니까. 제가 내기 골프에서 졌잖아요. 그래서 형수라는 호칭은 언제 부를지 모를 일이고요.”

이준이 서한의 와인 잔을 채워주면서 말했다. 

“결혼하면 부르지 뭐.”

서한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웬일이냐는 표정이었다. 

“오오.”

“결혼한다면.”

“…….”

결.혼.한.다.면. 글자마다 방점을 찍는 듯한 묘한 뉘앙스였다. 곧바로 서한의 눈썹이 치솟았고, 눈동자에는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무슨, 뜻이야?”

“…….”

이준은 서한이 더러운 기분을 마음껏 느껴보도록 일부러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서한의 잔에, 제 잔을 톡 부딪치며 여유를 부렸다. 

“아직 결혼한 거 아니잖아. 결혼하면 부르겠다고.”

“…….”

시비를 거는 말투였다가 이내 웃음을 짓고 있으니, 서한은 속이 뒤틀리는데 화를 내기는 애매했다. 서한이 잔을 들지 않고 있자, 이준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오늘은 안 마셔?”

“…….”

네가 기어오르고 싶어서 미쳤구나. 언젠가는 네 면상이 피칠갑 되는 날이 있을 거야.

서한은 억지로 피식 웃어넘기며 와인 잔을 들었다. 수아는 모근이 바짝 서는 듯했다. 강이준이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을 사람 같다. 어떡하면 좋지? 어쩌면 내가 도발했는지도 모른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습관처럼 손톱을 물어뜯을 뻔했다. 

다행히도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서 화제가 바뀌었다. 나희가 나이프와 포크를 들며 말했다. 

“여기 얼마 전에 셰프가 프랑스인으로 바뀌었거든. 프랑스 대통령을 모셨던 셰프였대. 수아야. 어서 음식 들어 봐.”

“네. 잘 먹겠습니다…….”

“여보. 스테이크도 시키고, 이분이 잘하는 프랑스 가정식도 시켰어요. 어때요?”

“음. 달팽이 요리 잘 하네. 이때까지 먹어본 것 중에 제일 좋아.”

“그렇죠? 달팽이가 바질향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잖아요. 바질소스 장인인 것 같아요. 이 맛 내기 진짜 힘든데. 수아야. 맛있지?”

수아는 달팽이를 썩 먹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골뱅이려니 하고 대충 입에 넣었다. 

“네. 맛있어요.”

“이준이는 왜 안 먹어? 입에 안 맞니?”

“아니요. 점심을 늦게 먹어서요.”

이준에게 음식은 어떤 맛도 나지 않았다.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오직 쌉싸름한 와인만 겨우 마셔줄 만했다. 

윤수아. 내가 첫남자이면서, 나와 며칠씩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수백 번 입을 맞췄으면서……. 너는 도대체 어떤 여자인 거야? 나한테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었나?

약혼식 날 내가 강서한의 가족이라는 걸 알았으면 네가 물러났어야지.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 해도, 네가 양심이 있다면 너는 강서한을 떠났어야 해. 

그런데도 끝까지 이 자리에 앉아 있어? 이제는 내가 널 온전하게 기억하는데도?

날 잊었다고 했다. 잊었다……. 파리에서 갑자기 떠난 이유는 한국에서까지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그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 내가 일방적인 감정인지, 쌍방의 감정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병신인가. 싫다는 여자 억지로 붙잡고 3일을 그러고 있었냔 말이다. 

잊었다는 말도, 떠난 이유도 퍽 자존심 상했다. 특히나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어릴 때부터 날 돌게 했던 이 미친 새끼, 강서한의 여자로 살겠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망가지더라도 그 꼴을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두 사람의 잠자리를 떠올리니 뇌혈관이 몇 가닥 터진 것처럼 두통이 몰려왔다. 

눈에서 열이 펄펄 끓어올랐다. 윤수아, 네가 어떻게……. 이준은 턱을 꽉 물고 날숨을 안으로 삼켰다. 

그러다가 이준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차키를, 맞은편에 앉은 서한의 발쪽으로 일부러 떨어뜨렸다. 뭔가가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서한이 발 아래를 쳐다봤다. 

“또 이거야?”

서한이 차키를 줍고는 큭, 비웃음을 터뜨렸다. 낡아빠진데다 불에 그슬리기까지 한 열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수아가 눈으로 그걸 보고는,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움찔 떨었다. 그 속에 있는 편지는 발견되지 않았을 거야. 아직 모르고 있을 거라고……. 

서한은 열쇠고리를 가볍게 던지는 시늉을 하며 놀렸다. 

“진짜 이건 좀 아니지 않냐. 거지들도 안 주워가겠다. 내가 쓰레기통에 던져줄까?”

“아니. 그게 나름 의미 있는 물건이라서.”

“응? 이게?”

이준이 한쪽 눈썹을 구부리고, 살짝 얄팍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기억이 돌아왔거든.”

나희가 반색했다. 

“이준아. 그때 여행 갔던 거 기억 안 난다고 하더니, 이제는 생각나?”

“뭐,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정말 다행이야. 엄마도 계속 찜찜했는데.”

서한은 기도하는 천사의 모습을 성의 없이 보다가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물건인데?”

“누가 준 거더라고.”

서한의 눈이 야릇한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누가? 여자야?”

“…….”

이준이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한 모금 삼킨 후 수아를 흘긋거렸다. 시선을 빠르게 가져온 이준은 서한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 여행하다가 만났던 여자.”

“…….”

수아는 이준이 자신의 목을 조여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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