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95)

<41화>

수아가 출근하려는데 지안이 단풍잎 같은 손으로 붙잡았다. 

“언니…….”

평소에 나름 씩씩하던 아이였는데 출근 안 하면 안 되냐는 눈빛이었다. 이런 너를 두고 돈을 벌기 위해 나가야 하는 내 마음은 오죽하겠니. 

지안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채로 수아를 올려다봤다.

“나 오늘 수혈하는데…….”

오늘도 지안은 수혈을 해야 했다. 수아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수혈하는 게 뭐.”

“…….”

“수혈 한두 번 해? 밥 먹는 것 다음으로 제일 많이 하는 일인데. 왜 갑자기 어리광이야? 아프면 간호사 이모들이 잘 돌봐주실 건데.”

“칫…….”

결국 지안의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스크가 젖어가고 있었다. 

“눈물 닦아. 언니는 일하러 가야 돼.”

“미워…….”

“어쩔 수 없는 건, 서로 이해하기로 했잖아.”

“…….”

지안이 수아의 소매를 놓아주며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지 않는다. 아는데, 가끔씩 이해하기 싫은 것이다. 

수아는 한숨 쉬는 것도 아파서 그냥 삼켰다. 매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일하러 가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평소에는 언니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이해하면서, 이제는 수혈도 견뎌내기 힘든 몸이 되다 보니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골수이식을 한 번 더 해보기 전에 잘못되는 일이 없기를. 수아는 지안의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다가 지안의 손에 깍지를 꼈다. 

“대신 하루 종일 지안이만 생각할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말인데도, 지안은 수아의 무거운 마음을 덜어주려고 억지로 쌩글 웃었다.

“응. 그럼 오늘도 잘 있어볼게.”

수아는 지안을 꼭 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또 하려다가,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제는 코피 났는데. 피가 계속 안 멈춰서 좀 힘들었어.”

“…….”

“언니한테 전화하려다가 참았어. 바쁜데 신경 쓰일까 봐. 잘했지?”

“…….”

지안의 목숨이 꺼져가고 있다. 혼자서 견뎌내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데. 

나는 무엇을 위해서 돈을 버는 걸까. 아픈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야말로 보호자의 역할인데 이놈의 병원비……. 

“그럴 땐 언니한테 전화해.”

“히히. 알았어.”

피가 모자란 심장이 쌕쌕거리며 뛰고 있었다. 부디 조금만 더 버텨 줘. 병원을 나서는데 강서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출근했어?

“지금 나가는 길이에요.”

-오늘 가족들이랑 밖에서 만나기로 한 거 알지?

“……네.”

-부모님 결혼기념일이야. 안나희 씨도 힘 줘서 꾸미고 올 것 같으니까, 너도 예쁘게 하고 와. 저번에 백화점에서 사준 옷 있잖아. 그거 입고 오라고. 나 체면 좀 세우게.

“안 그래도 일 마치면 그걸로 갈아입을 거예요. 옷 가지고 나가는 중이에요.”

-그래, 잘 생각했다. 나중에 보자.

“네. 이만 끊어요.”

옷차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데, 억지로 옷과 가방, 구두를 챙겨 나왔다. 

일할 때는 시럽이라도 묻을까 봐 입을 수도 없었다. 주제에 맞지 않는 의류 때문에 짐이 많아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강이준도 오늘 오려나. 

그의 기억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화차(火車). 죽은 망자를 지옥으로 실어 나르는 불수레라고 했다. 

이미 화차에 올라탄 셈이었다. 애초에 브레이크는 없었다. 그러니 지옥으로, 불구덩이 속으로 내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

며칠이 지났다. 이준은 기억이 돌아온 후 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맨 정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대표실에 앉은 이준은 습관처럼 수아가 남긴 열쇠고리를 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3박 4일. 그 시간 동안 오롯이 윤수아에게 미쳐 있었다. 

내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다고 수없이 생각했다. 그랬기에, 기억을 잃었어도 꿈에 나왔던 거겠지. 

몇 년간 여자를 안지도 않았다. 건강한 남자가 이토록 강렬한 성욕을 참으며 살 수 있었던 건, 속된 말로 한 번 싸지르고 마는 욕정이 더럽게 느껴져서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단지 몸이 달아올라서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밤새 괴롭히고 실신 직전까지 몰아불인 후 아랫도리가 얼얼해지면 호텔을 나왔었다. 

꽤 그 짓을 해봤다. 어느 순간 구역질이 났다. 불이 한 번 붙었다가 산화되어 버리는 욕구, 그 일회성 욕구에 몸을 던지는 게 짐승보다 못한 것 같았다. 

그 후 섹스를 잊기 위해 더더욱 운동에 몰입했다. 연애라는 건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고, 결혼은 더더욱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윤수아를 만난 후 메말라 있던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아니, 메말라 있던 게 아니었다. 터질까 봐 조심하고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 감정들이 순식간에 증폭하여 나 자신을 지배했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감정을 교류하면서 섹스를 하고, 자연스럽게 미래를 떠올리고, 너의 모든 시간과 기억에 내가 스며들기를 바라는 것.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니,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바로 윤수아였기 때문이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달콤한 냄새가 좋았다. 보조개가 패는 웃음, 반짝이는 콧날, 발그스름한 뺨, 도톰해서 자꾸만 베어 물고 싶은 입술, 가느다란 목덜미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나를 미치게 했다. 봉인되어 있던 성욕이 화산 폭발하듯 터졌다. 처음인 여자를 배려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몸을 가질수록 갈증이 나서 떼를 쓰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 나누던 섹스의 느낌이 생생하다. 마지막 밤은 수아가 자지러졌다. 처음 느끼는 절정에 울부짖었다. 

극한으로 내몰린 몸을 어쩌지 못해 경련하듯 떨고, 더해달라는 말을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탐스러운 젖가슴을 아낌없이 내주며 연신 아찔한 신음을 터뜨렸고, 고통을 쾌락으로 만드는 자극점을 찾은 후 깜짝 놀라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었다. 

교성을 내지르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입을 막지 못하게 하고, 그녀의 표정이 섬세하게 바뀌는 것을 내려다 볼 때의 희열이란……. 

“좋아?”

“하, 하아, 하윽, 으윽.”

“얼마나 좋아?”

“하, 너무 행복해요……. 시간이 멈췄으면, 흣, 좋겠어요. 아윽.”

순진한 내 여자를 색녀로 만들 때의 쾌감이 이런 거였나. 더더욱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프러포즈를 생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내게 거짓말을 했을까. 한국 이름 이수진이라는 것도, 가르쳐 준 폰 번호도 거짓이었다. 왜 갑자기 말도 없이 떠나버린 건가. 

분명히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3일 동안 파리를 미친놈처럼 돌아다녔다. 그녀를 찾기 위해서. 

수많은 관광객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던 여자는, 기를 쓰고 찾으려니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그녀 자체가 환상이었나. 내가 느꼈던 감정이 모두 헛된 것이었을까. 열쇠고리 하나만 달랑 손에 남겨져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직후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니를 어디서 찾아야 될까. 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사고가 났던 거다. 그러다가 기억을 잃었고. 

똑똑. 노크소리에 방황하던 이준의 눈이 문을 향했다. 신 비서가 들어왔다. 

“미국에 도착한 로건이 한국에서 아주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기분 좋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모스크바 국제 건축 자재 전시회에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회신을 보낼 건데, 당부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

넓은 무대에 진출하기 위해 미국에 최소 1년 정도 머물 계획이었다. 

뉴욕에 사무실까지 알아봐 두었는데, 윤수아 때문에 당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달 후에 미국으로 가야 하는데……. 이준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파이나이트, 생분해성 건축자재인데 사막모래로 만든 게 있거든. 콘크리트보다 성능이 좋은 거라고 들었어. 그걸 좀 알아봐 달라고 해.”

“네.”

“또 뿌리채소의 셀룰로오스를 콘크리트에 섞으면 강도가 몇 배로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영국에서 나왔는데, 그게 어디까지 개발되었는지도 궁금하다고 전해.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봐 달라고.”

“네. 알겠습니다. 메일 보내고, 퇴근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

시계를 보니 6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신 비서가 나간 후 벨이 울렸다. 안나희였다.

-이준아. 오늘 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이라고 저번 주에 말했는데. 오는 거 맞지?

“네. 갈 거예요.”

-어머. 요즘 왜 이렇게 엄마를 기쁘게 하니? 아버지도 엄청 좋아하시겠다. 우리 아들, 이제 효자야, 효자.

효자, 라는 말이 성대를 확 긁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부모는 별 거 없어. 자식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는 게 기쁜 일이고, 유일한 낙이야. 

“이따 뵙겠습니다.”

-그래. 운전 조심하고. 응? 

나희의 말이 몇 마디 더 이어지는 듯했지만, 이준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가족을 잔인하게 깨뜨리려는 계획도 모르고, 나희는 그저 기분이 좋은 듯했다. 

어떻게 해도 윤수아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은 자명한 일이었다. 너를 볼 수 있다면 기꺼이, 어디든 갈 것이다. 

중독, 사랑, 증오. 이것들이 복잡하게 섞여서 불이 붙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걸고, 버려야 한다면 버릴 것이다. 

그런데 괘씸하고, 또 괘씸해서…… 너를 부서뜨려야 할까. 아니면, 너를 가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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