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95)

<40화>

정말 많이 아팠다. 하지만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만큼은 너무 좋았다. 매순간 그에게 반하게 됐다. 스포츠도 아닌데, 승부욕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어쨌든 그의 눈빛과 표정을 보고 있는 게 황홀했다. 쾌락에 완전하게 몰두하고 있는 남자가 이렇게 멋진 줄은 몰랐다. 

마찰열에 의해서 속살이 날카롭게 찢어지는 느낌이었지만 몸이 부서져도 견뎌내고 싶었다. 너무 아파 눈물을 흘릴 때쯤 행위가 끝났다. 

“울었구나. 하, 미안…….”

“하, 하아…….”

그가 눈물을 부드럽게 핥아줬다. 강아지가 된 것 같아서 금세 웃게 됐다. 

“울다가 웃었네.”

이준이 수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다가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별사탕보다 달콤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는 욕정만 풀지 않았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소중한 존재로 대해줬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지안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안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수아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었는데. 

“이제 씻겨 줄게.”

이준이 수아를 조심스럽게 두 팔로 안아서 욕실로 데리고 갔다. 욕실에서 거품을 풀어놓고 와인을 마셨다. 

입으로 와인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꺄르르 웃고, 거품으로 장난도 쳤다. 즐거웠고 내내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한없이 자상했던 그의 눈에 색기가 돌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참겠노라 다짐했던 그는 새벽에 곤히 자고 있는데, 허벅지 사이를 입술로 급습했다. 

아팠지만 또 그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워서, 회복되지 않은 몸을 다시 그에게 내줬다. 

다음 날에는 에펠탑에 가고, 차를 빌려서 포도밭 구경도 갔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에 차를 세워두고 정사를 벌이기도 했다. 

정말 3일 동안 미친 사랑을 경험했다.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처럼 어디서나 손을 잡고,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키스를 했다. 

그런 용기와 열정이 내 안에 있을 줄은 몰랐다. 사랑에 빠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거였다. 

파리에서 3박 4일 동안 그 몰래 끙끙 앓았더랬다. 혼자 작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불행하기를 바랐다. 죽은 엄마는 살아 돌아오지 않으니까. 

***

골목 안에서 쭈그려 앉아 울던 수아가 일어났다.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더 큰 비가 쏟아지기 전에 지안이가 있는 병원으로 가야 했다. 

우산도 없어서, 수아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그를 처음 만나 호텔로 가던 그날도 비가 왔는데. 거리가 선명한 색을 띠면서 파리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때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어졌다. 목안이 꽉 메어오는 것을 참으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쿵쾅쿵쾅, 빨라지는 맥박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역시나 그였다. 이준이 수아의 손목을 붙잡아 몸을 돌려세웠다. 

“하지 마! 결혼!”

“…….”

지나가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고, 그가 길거리에서 포효하듯 소리 질렀다. 이준이 다시 한 번 사나운 눈빛으로 못을 박았다.

“강서한은 안 돼.”

“…….”

수아는 눈을 위로 치켜떴다.

“그럼 딴 남자는 돼요?”

“그것도 안 돼.”

“하아.”

수아는 기가 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언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뭔데 참견이에요?”

“내가 왜 참견할 자격이 없어? 강서한이 내 이복형인데!”

“시동생이라는 자격으로 반대하시겠다 이거예요?”

“…….”

빗물에 젖은 이준의 눈이 수아를 뜨겁게 응시했다. 

“아니. 내가 네 남자였으니까.”

“…….”

가슴 속이 찌릿했다. 누군가가 심장을 손에 쥐고 터뜨리는 것처럼 갈비뼈 안쪽이 아팠다. 그것은 슬픔이기도 했고, 미련이기도 했으며, 환희의 감정이기도 했다. 

다행인 건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눈가가 젖어드는 것을 숨길 수 있었다. 

“강서한, 정말 사랑해?”

“…….”

수아는 처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려고 시선을 피했다.

“네.”

“…….”

그때까지도 붙잡혀 있던 수아의 손목이 힘없이 아래로 처졌다. 그가 손목을 놓아준 거였다. 

온기가 뭉텅 빠져나가면서 차가운 빗방울이 손목에 타닥타닥 튀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따뜻했는데……. 

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잊었어?”

“…….”

의미 없이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던 수아가 이준을 또렷하게 바라봤다. 

“네. 그 후로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어요.”

“…….”

그를 빗속에 내버려두고, 수아는 앞만 보며 걸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인생에서 단 3일도 행복하면 안 되는 거였다. 꿈같던 3일이, 이제 와서 발목을 잡는다. 

수아의 흐느낌이 옅게 새어 나왔다. 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파리에서 그렇게까지 급하게 작별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전화를 받게 됐다. 정희 이모였다. 

지안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고 했다. 열이 39도까지 솟아서 병원에 있는데, 아무리 해도 38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피검사 수치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때 그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손을 벌벌 떨던 수아는 2,3분 만에 정신없이 짐을 챙기면서, 탁자 위에 기도하는 천사 모양의 열쇠고리 하나를 올려놓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호텔을 나온 수아는 공항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끝없이 자책했다.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됐는데, 내가 천하태평하게 여행길에 올라 있어서 애가 아픈 거라고. 

차라리 나를 아프게 하시지, 신은 왜 자그마한 아이에게 자꾸만 시련을 주시는지 모를 일이었다. 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었다. 

한국 땅을 밟는 순간 강이준을 말없이 떠나온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구차한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그건 확신으로 바뀌었다. 

Rrrrr~~~ 전화벨 소리에 빗방울이 차갑다는 걸 깨달았다. 상념에서 빠져 나와 강서한의 전화를 받았다.

-병원이야?

“……아뇨. 이제 다 와 가요.”

서한의 목소리가 삐딱했다.

-여태껏 뭐했어?

“아, 잘못 내려서 좀 걸었어요.”

-잘못 내려?

“네. 딴 생각하느라…….”

-비도 오는데 걸었다고?

“……네.”

-수상한데.

그가 어디선가 보고 있을 것 같아서 오싹했다.

“뭐가 수상해요?”

-아니야. 아무것도.

이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의처증 같은 거, 꽤 무섭다고 하던데…….

-알았어. 나중에 전화할게.

“네.”

전화를 끊자마자, 또 벨이 울렸다. 병원 번호였다. 냉큼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이세요?”

-이식 코디네이터 서은정이에요.

“네. 선생님.”

-국내에는 골수 기증 등록하신 분들 중에 지안이와 항원이 일치하시는 분이 없어요. 지안이가 급한 경우라서, 해외 골수은행, 혈액은행에 빨리 도움을 요청했거든요. 미국에 한 분 계세요.

“저, 정말요?”

수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유전자가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이 해외에 있다…….

-그 분이 30대 초반 여자 분인데, 기증 등록을 한 지가 10년이 됐어요. 그동안 마음이 바뀌셨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강제로 할 수가 없는 부분이라서요. 일단 연락을 취해보고, 다시 연락주기로 하셨어요.

“네. 고맙습니다. 빨리 알아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네. 연락이 들어오는 대로, 바로 전해드릴게요.

해외에서 골수 이식 공여자를 찾으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일이 처리되고 있었다. 그만큼 지안이 상태가 안 좋은 거다. 

“잠시만요. 근데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아이의 병 앞에서 돈을 운운해야 될 때가 제일 비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돈을 내지 않으면 치료를 시도해주지도 않을 것 아닌가. 

-나라별로 달라요. 그나마 가까울수록 나은데, 미국 같은 경우는 이송료만 5천만 원 이상 생각하셔야 해요. 검색료는 저번에 말씀 드렸고요.

“……이송료만요?”

-네. 그리고 그 분의 검사비, 실제로 기증해주신다면 채취비, 입원비도 추가로 발생할 거고요. 이 부분은 보험 적용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

해외에서 공여자를 찾는 경우에 대해 이미 들은 바가 있지만, 예상을 넘어가는 금액이라 앞이 캄캄해졌다. 어쩌면 1억이 훌쩍 넘어갈 것 같았다. 

푸석거리던 가슴이 털썩 내려앉았다. 돈 앞에서 동생의 생명을 저울질하는 추악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란…….

소름이 돋는다. 평생 혼자서 강이준을 짝사랑하겠다고? 가슴에 담아두지 마. 잊어. 

제발 강이준을 아련한 눈으로 보고 있지 마. 그를 착각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 마음마저 더러워, 윤수아.

강서한이 아이를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낳아야 한다. 잠자리를 원하면 언제든 벗어야 하고. 

그의 탐욕을 부르는 젊은 몸뚱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잖아. 뭐든 해야 해.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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