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95)

<38화>

두 사람은 비가림막이 있는 노천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공기에 습기가 빠져서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했다. 야외에서 비를 보며 앉아 있기에 더없이 좋았다. 

“저녁 먹었어요?”

“아니요…….”

배가 너무 고파서 염치불구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나도 안 먹었어요. 여기 스테이크도 괜찮고, 뇨끼도 괜찮거든요. 그걸로 시킬게요. 적당한 와인도.”

“네.”

그는 점원을 불러서 간단한 불어로 주문했다. 와인과 에피타이저가 나올 때까지 눈동자가 계속 부딪쳤다. 어색해. 어색해. 너무 어색해……. 

오히려 비가 와줘서 고마웠다. 빗소리가 적막하지는 않게 해줬으니까. 부드러운 눈매로 얼굴을 빤히 보던 그가 입술을 열었다. 

“아까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그쪽 봤어요.”

“아, 그 서점……. 피아노 치셨잖아요.”

“그쪽 들으라고 그랬는데.”

“…….”

고백 같은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또 어색해지고 말았다. 

이준은 와인 잔을 손에 쥔 채 아예 대놓고 수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그스름한 수아의 볼이 더 붉어졌다. 이준은 살짝 잔을 부딪쳐오며 미소 지었다. 

“마셔 봐요.”

“…….”

그가 와인 잔을 들어 목으로 넘기는데, 투명한 유리잔 사이로 그의 눈매가 보였다. 짙은 눈썹이 무척 남자답고, 외꺼풀을 가진 눈이 날렵했다. 

그 눈이 수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와인을 천천히 기울여서 입으로 흘려 넣었다. 선명한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매력적인 눈빛이 직선으로 꽂히는데 심장이 찌릿하게 떨렸다. 

수아는 떨림을 삭이려고 와인을 목으로 꿀꺽 넘겼다. 포도의 짙은 향이 코를 감싸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곧 스테이크도 나왔다. 와, 예뻐. 데코가 예술이야……. 

먹음직스러운 빛깔의 스테이크 위에 빨강과 초록의 야채를 구워서 곁들였는데, 소스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놓은 듯했다. 셰프가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 와 보니, 굳이 영어를 배우려 하지 않고 불어만을 고집하는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 이해가 됐다. 삶과 예술은 하나라는 그들의 철학이 패션, 건물 양식, 음식에서도 느껴진다. 진심으로 멋진 나라다.

이 나라는 쥐만 잘 잡으면 될 것 같은데…….

그가 칼로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어서 앞에 놓아줬다. 포크로 스테이크 한 점을 찍어서 건네기까지.

“난 점심 늦게 먹었어요. 많이 들어요.”

“…….”

포크를 받다가 손가락 끝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 나 왜 이래……. 이 감촉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수아에게는 남자와의 의미 있는 첫 스킨십이었다. 일하다가 부딪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진한 스킨십에 대한 열망이 일었다. 프랑스에서 처음 만난 온기는 이토록 사람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비가림막 위로 빗방울이 툭툭툭 떨어졌다.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람들의 즐거운 대화소리, 이 모든 것이 적당했다. 

저만치 빗물이 고여 있는 바닥에 가게의 조명이 비쳐서 일렁거렸다. 예쁜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피부를 스치는 잔잔한 바람에 그의 고급스러운 체향이 실려 왔다. 상큼하면서 남자다웠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청각과 후각, 시각이 이렇게나 예민해져 있는데? 이런 달콤한 꿈은 꿔보지 않았기에,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그때 지잉지잉,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수아의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강서한이었다. 

갑자기 낭만적인 파리가 한국의 음산한 뒷골목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문자가 들어왔다.

[나 이혼 준비해. 내가 너한테 꽂혀 있는 거 알지?]

순식간에 몸에서 소름이 번졌다. 엄마의 교통사고 때문에 만나게 된 이 남자는 사람을 항상 오싹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2년 전, 맞은편 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를 건너다가 자동차에 치었다. 파란불이 깜빡이고 있었고, 도로에 발을 내딛을 때는 이미 빨간불이었다. 

멈췄어야 했는데, 어두운 새벽에 첫차를 타고 일하러 가려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보행자의 무단횡단이 확실했으므로, 운전자였던 그 남자는 12대 중과실에 해당되지 않아서 형사처벌을 피했다. 

그는 유명인이었다. 자신의 잘못이 희박하다는 법적 소견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는 유능한 변호사를 대동하여, CCTV와 블랙박스를 내세워 엄마의 과실이 크다고 몰아붙였다. 

엄마는 뇌수술을 받은 후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는 상태였는데, 병원비는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지안도 희귀병 진단을 받으면서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었다. 윽, 소리를 낼 여유마저 없었다. 

몇 개월 후 엄마는 돌아가셨고, 그는 자신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며 엄마의 남은 병원비를 어느 정도 해결해주었다. 뒤늦게라도 선의가 고마워서 눈물을 펑펑 흘렸더랬다. 

그런데 그것을 빌미로 사람 목을 조여 왔다. 탐욕을 내비치면서 호시탐탐 몸을 노렸다. 그가 정말 두렵다. 끝까지 잘 버틸 수 있을까. 손아귀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수아는 연거푸 걸려오는 전화를 꺼버렸다. 

“전화 안 받아도 돼?”

“아, 네.”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금세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난 올해 서른하나.”

“어머. 서른 안 넘으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실망했어요?”

“그런 건 아니고요.”

“아저씨 같아서 싫어?”

“아니요!”

“…….”

이런, 너무 크게 말했네. 고개까지 완강하게 저어 버렸다. 얼굴이 새빨개졌을 텐데……. 수아는 와인을 꿀꺽꿀꺽 삼켰다. 몸이 살짝 더워지면서 취기도 조금 올랐다. 

“말 놓으셔도 돼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

밀당 같은 말이었다.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건가. 눈을 빼꼼 흘기는 척했지만, 입꼬리는 제멋대로 올라가 버렸다. 표정이 우스워졌을 것 같았다. 

이준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봤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혹시나 울었다는 걸 들키면 무안해할지도 모르니까. 

은은한 오렌지 빛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새하얀 피부는 결이 매끈해서 자체적으로 빛이 났고, 쌍꺼풀이 있는 큰 눈이 선하다. 

투명한 눈동자가 유난히 맑고 깨끗한데, 그래서 우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가 보다.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눈이었다. 

돌아서자마자 눈앞에 아른거리고, 발목을 잡는 것 같고, 연어처럼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희한한 회귀 본능이었다.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은.

이준의 입술에서 진심이 흘러나왔다. 

“그쪽한테 첫눈에 반했나 봐, 내가.”

“…….”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뭐지……. 수아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기분이 좋아죽겠는데도, 바람둥이인가 싶어 쌜쭉하게 반응했다. 

“원래 여자를 잘 꼬시나 봐요?”

“내가 그럴 것 같아?”

“네.”

“…….”

알쏭달쏭한 그의 미소에 이상하게 애가 탔다. 분명히 그가 먼저 호감을 표시해왔는데, 끌려가고 있었다. 그것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언제 한국에 가?”

“3일 뒤요.”

“나랑 같이 있으면 되겠네.”

“…….”

수아는 연신 얼굴이 더워졌다. 자꾸만 그가 치고 들어왔다. 저렇게나 멋진 웃음을 지으면서 당돌하게 의견을 피력하니, 가슴이 방망이질 했다. 

수아는 할 말이 없어서 와인을 호로록 삼켰다. 그가 빈 잔을 채워주고, 또 마시고. 그러다 한 병을 다 비웠을 때쯤.

“같이 호텔에 갈래?”

수아가 혼란스러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럼 같이 자야 돼요?”

“…….”

이준이 커다란 손에 쥐어진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남자가 호텔에 가자는 말이 보통은 그 뜻이지, 아마?”

“…….”

수아가 탁자 아래에서 손끝을 만지며 이준의 말을 곱씹었다. 언젠가는 강서한한테 무너질지도 모른다. 강서한과 처음으로 잠자리를 하느니……. 더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저 만약에 그쪽이랑 자게 된다면, 처음이에요…….”

“…….”

“…….”

“…….”

침묵, 또 침묵. 어색한데다 야릇해지기까지 했다. 쓸데없는 얘기를 해버렸나. 남자 앞에서 이렇게 바보 같을 줄은 몰랐다. 

그가 조금 갈등하는 것 같아서 혹시 능숙한 여자를 찾는 건가 싶었다. 수아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그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채근하는 투로 물었다. 

“그래서, 어떡할래.”

“…….”

아, 헛다리를 짚은 거였다. 기다리기 힘들어서 표정이 애매해진 거구나.

수아는 재빨리 귀엽게 의사표시를 했다.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와인 잔을 그의 잔에 톡 부딪치며 입가에 배시시 웃음을 띄웠다. 좋다고, 그러겠다고. 

그랬더니 순식간에 그의 눈빛이 진해졌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며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나가자,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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