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95)

<37화>

이준이 고서점 2층으로 올라왔을 때였다. 조금 전 눈앞에서 사라졌던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첫 만남 때 워낙 강렬하게 각인되어서인지 계속 눈에 띤다. 아니, 눈에 밟힌다.

그녀가 어디서든 내 시야 속으로 파고드는 것인지, 내가 그녀를 우연찮게 따라다니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어쨌든 우연이 거듭되고 있다. 

피아노 건반을 통통 두들기는 그녀의 옆모습이 맑고 선했다. 기분은 좀 나아졌을까. 이게 참 궁금하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이게 뭘까. 

이 감정이 단순한 연민이라 위로를 하고 싶은 건지, 행여 다른 종류인지 모호했다. 

하여튼 그녀의 처절한 울음이, 안에 있는 뭔가를 건드린 것은 확실했다. 지금 그녀는 벽에 있는 책장으로 가서 책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준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종격투기와 피아노가 전혀 어울리진 않지만, 이준은 마음이 허전할 때면 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다. 

원래라면 이런 곳에서 연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쩐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녀의 서럽던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무거워진 내 마음도 가벼워질 것 같았다. 

이준은 건반 위에 기다란 손가락을 올리고 연주를 시작했다. 캐논변주곡은 악보를 보지 않고도 연주할 수 있는 곡 중에 하나였다. 

격투기를 하느라 손은 거칠었지만, 건반 위를 오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수아는 넋이 나간 얼굴로 어떤 동양인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배우보다 더 잘생긴 남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다락방 같은 이곳을 가득 채웠다. 마침 해가 지는 시간이라서, 주황색 노을빛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오래된 책들이 마법서처럼 반짝였고, 책 냄새들이 향긋했다.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들도 아지랑이처럼 천천히 꾸물댔다. 

피아노를 치는 남자는 금색 빛 테두리에 둘러싸여 있어서, 노을이 지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판타지 영화처럼 시간과 공간이 멈추어 버린 듯했다. 기이했다. 

수아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연주를 감상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피멍으로 얼룩진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파리에 오길 정말 잘했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봤고, 오래된 서점에서 이런 시간도 가져보다니. 

어린 시절, 엄마가 카스테라를 만들고 있으면 그 옆에서 카스테라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었다. 곧 부드러운 카스테라가 구워질 것이므로, 기다리기만 하면 행복이 예정되어 있는 셈이었다. 

참 쉽고도 당연한 종류의 행복함. 수아의 가슴속에서도 그런 행복함이 아주 오랜만에 몽글몽글 차올랐다.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반드시 좋은 일이 예정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이준이 십 분 가량 피아노 연주를 한 후 일어섰을 때,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런 반응이 머쓱해서 사람들 앞에서는 연주를 하지 않는데, 오늘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녀가 연주를 끝까지 듣고 있었고, 미소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공기 중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그 찌릿한 것이 서로의 심장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

“아, 떨려…….”

수아는 파리 시청 주변을 구경하면서도 아까 그 남자를 떠올렸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수아는 제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아직도 심장이 마구 뛴다. 남자를 보고 이런 떨림을 느낀 건 처음이다. 

왜 그렇게 멋있지? 키도 엄청 컸다. 몸도 건장했는데 피아노까지 잘 치다니. 얼굴은 화룡점정이었다……. 

여태껏 남자에 관심이 없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 남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파리에서 본 가장 멋진 남자는 바로 그 동양인이었다. 

중국사람 같지도, 일본사람 같지도 않았는데. 세련된 옷차림과 자체적으로 흐르는 섹시한 매력 때문에 외국에서 오래 산 동양인 같았다. 

눈앞에서 많은 남자들이 스쳐지나갔다. 그 남자를 찾고 싶은 건지, 또 눈이 헤매고 다닌다. 상사병이라도 날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수아는 파리의 골목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중이었다. 가게들이 즐비하고,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도 뒤섞여 있었다. 

이국적인 분위기와 여유로운 사람들. 이곳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젊은이들도, 노인들도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즐기는 듯했다. 걱정 따위는 원래 없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낭만과 열정이라는 것. 삶에 무겁게 짓눌리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열정을 말살하고, 낭만을 죽여 그 모든 시간을 돈으로 바꿔야 하는 수아에게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파리는 어딜 가나 연인들이 얼싸안고 있는 곳이어서, 또 아까 고서점에서 만났던 남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반했나 보다. 아직도 심장에 미세한 진동이 남아 있다. 

한국에 가기 전에 한 번만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수아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이런 유치한 기도를 하는 건 처음인 거, 아시죠?

그 잘생긴 남자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멀리서라도 딱 한 번만 더요. 네?

꼭 감았다가 눈을 떴을 때 당연히 시야 속에 그 남자는 없었다. 실망한 얼굴이 너무 울적해 보였을까. 

삐에로 분장을 하고 판토마임을 하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수아에게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수아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삐에로는 눈물을 닦으라고, 몸짓으로 연기했다. 그리고 눈앞에 커다란 상자가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이 상자 안에는 당신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궁금하게 만들었다. 곧 상자를 열었다.

삐에로는 반짝이는 태양을 흉내내며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할 거라는 마임을 보여줬다. 한 마디의 대사도 없었지만 그 몸짓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삐에로는 분명히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수아는 작게 미소 지었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노천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잔을 내려놓은 이준의 눈에, 또 그녀가 보였다. 순간 바람결이 잔잔해졌고, 또 다시 세상이 고요해졌다. 

이번에는 그녀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그녀를 둘러싼 파리의 골목들이 환하게 밝아졌다. 눈동자가 그녀에게서 떨어지질 않는다. 저 웃음을 보려고 파리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런데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파리가 한국의 작은 동네도 아니고, 하루 2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리는데, 왜 그녀가 자꾸 눈에 띄는 건가. 

신은 자꾸만, 자꾸만 그녀를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마치 그녀를 보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것처럼.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파리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그녀와 나, 두 사람이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까 고서점에서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였던 이유가 연민인지 호감인지 헷갈렸다면, 지금은 그녀의 나이 때문에 주저하게 됐다. 

성인 남자에게 여자에 대한 호감은 곧 섹스를 하고 싶은 욕구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였다. 혹시나 미성년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미성년자라면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울 것이고, 오늘 하루 종일 느꼈던 감정이 부서질 것 같은데. 

행실이 개 같은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에, 여자와의 만남은 늘 꺼려졌다. 원나잇을 한 것도 몇 년쯤 됐던가. 

꼬르륵, 수아는 배가 고팠다. 더 이상 허기를 참을 수 없었다. 바로 뒤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야외로 나와 스테이크를 써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수아는 제일 싼 음식점을 찾아야 했다. 점심도 거르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지금은 시멘트처럼 딱딱한 빵이라도 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배고파. 여기서 어디로 가야 되지…….”

햄버거를 먹을까. 아니면 길거리에서 파는 케밥? 아, 그냥 익숙한 게 낫겠어.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자. 

그때였다. 후드득, 빗방울이 쏟아졌다. 

“어? 비 온다…….”

파리는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더니. 아침에 하늘이 너무 맑아서 설마 했는데!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그윽한 저음이 깔렸다. 

“같이 와인 한 잔 할래요?”

“…….”

“내가 살게요.”

“…….”

수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 한국 사람이었구나……. 

기도를 들어 주셨어……. 키가 커서 그를 올려다보는 수아의 얼굴에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이제 꼬르륵거리는 뱃소리보다, 심장이 더 큰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혼자만 보기에 너무나 아까운 그의 외모는, 가까이서 보니 잘생김이 더욱 도드라졌다. 피부마저 빛이 나는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와인 마실 수 있는 나이에요?”

“…….”

수아는 난생 처음으로 남자에게 꼬리를 쳤다. 깊고 투명한 눈망울로 이준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보조개가 들어가는 예쁜 웃음을 지었다. 

“얼마든지요. 저 스물한 살이에요.”

“…….”

이준이 시원한 눈매를 길게 늘이며 싱그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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