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수아는 소리 죽여 울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수아를 흘긋거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울고 있는 여자는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다른 곳이었다면 친절한 유럽의 남자들이 다가와 도와줄 것이 있느냐 물었겠지만 이곳은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그러니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의 창시자인 스탕달은 1800년대 초반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어떤 미술품을 보고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정신적인 혼란 증세도 겪었는데, 삶이 한 순간에 빠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훗날 유서 깊은 예술 작품을 보고 흥분으로 이상행동을 벌이는 것을 스탕달 신드롬이라 이름 붙였다. 스탕달을 흔들었던 작품이 바로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다.
그녀는 16세기에 태어나 스물둘의 나이에 사형 집행을 당했다. 수아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난 베아트리체. 가엾구나…….
넌 14살 때부터 친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했어. 당국에 신고도 해봤지만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았지.
네 아버지는 네가 신고한 것을 더욱 괘씸하게 생각하여 널 가둬놓고 미친 짓을 일삼았고.
결국 넌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 그런 망나니는 인간도 아니야. 처참한 방법으로 죽어 마땅해.
예나 지금이나 정의는 누구 편일까. 넌 존속살인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어.
네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보러 나왔다고 하더구나. 친부를 악마 같은 욕정에 빠지게 한 네 얼굴을 보려 했겠지.
눈이 뒤집어질 만큼 자극적인 사건이었을 테니 사람들은 너의 아름다움에 더욱 홀렸을 거야.
베아트리체. 많이 외로웠지……. 친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네 심정을 이해해. 혹시 너도 날 이해할 수 있니?
흐느낌을 틀어막은 손에서 눈물 줄기가 굵게 쏟아져 내렸다.
너만이 나를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았어…….
우리 엄마는 악마가 아니었어. 천사였어.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마지막은 지독하게 불운했어.
내가 그런 엄마를 죽였을 거야……. 아니, 죽였어…….
베아트리체. 돈이 악마였다고, 그런 선택에 놓였던 상황이 나빴을 뿐, 내게는 잘못이 없다고 말 좀 해줄래…….
동생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말이야. 난 엄마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그때 난 고작 열아홉 살이었어. 엄마의 장례식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아니?
살인자가 상주가 되어 있는 상황을 사람들이 알아채는 거 아닐까. 겁이 나서 영정 속 엄마 모습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 눈물도 흘리지 못했어…….
더 암담한 것은, 난 죗값을 치르고 싶지만 동생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야.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내지 못해. 낮에는 사람들의 눈을 보는 게 무서워. 어두운 밤마저도 내 편이 아니야. 악몽이 나를 괴롭혀.
그리고 하나뿐인 동생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
“흐윽…….”
울음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수아는 베아트리체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프랑스로 온 거였다. 수아는 루브르 박물관이 엄마의 장례식장인 것처럼 구슬프게 울었다.
이준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우는 여자를 바라봤다. 스탕달 신드롬인가. 영국 런던의 고톨드 갤러리에 갔을 때 그런 남자를 본 적 있다.
고흐의 자화상 앞이었다. 귀를 자른 후 붕대를 감고 있던 고흐의 모습. 그걸 물끄러미 보던 남자는 헛소리를 주절주절하더니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은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다. 교과서 귀퉁이에서 작은 사이즈로 본 그림들은 실제로 어마어마하게 큰 것들이다.
작품이 가진 에너지가 있는 건지, 보는 순간 사람을 덥석 집어 삼킨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었다.
우는 여자는 동양인인데 한국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서럽게 우는 모습은 등을 토닥여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웠다. 이준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베아트리체 첸치의 저주 받은 삶을 알고서 우는 것이리라. 가슴이 고요해졌다.
이준은 숨 쉬는 것도 잊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림 속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녀의 눈물에, 세상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부디 스스로를 치유하는 눈물이기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라는 거대한 자기장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이준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벌써부터 그녀가 잔상에 남아 아른거렸다.
처음 겪는 착시현상이었다. 감았던 눈 속에 그녀가 박혀버린 것만 같았다.
***
수아는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앞에서 기운이 없어질 때까지 울었다. 2년 동안 묵혀 놓았던 아픔을 털어냈더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남아 있는 삶에 최선을 다한다면 엄마도 용서해주시지 않을까. 여전히 나 자신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박물관을 나온 수아는 정희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 저 수아예요.”
-그래. 잘 도착했지?
“그럼요. 숙소도 잘 찾았고, 밥도 든든히 먹었어요. 지안이는 특별히 아픈데 없죠?”
-응. 괜찮은 것 같아.
“저 찾고 그러진 않아요?”
-어제는 조금 시무룩하더니, 지금은 혜정이 따라 초등학교에 놀러갔어. 혜정이가 그룹별로 숙제할 게 있는데, 친구들이 동생 데리고 와도 된다고 하더라고. 지안이 신나서 따라갔어.
“풉. 지안이한테는 잘 된 일인데, 방해되지 않을까 모르겠어요.”
-뭐 그리 방해되려고. 하여튼 지안이 잘 있으니 걱정 말고, 잘 놀다 와.
“네. 이모, 고맙습니다.”
지안이가 너무 보고 싶지만,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더 많이 사랑해줘야지.
수아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이색적인 풍경에 마음이 살랑거렸다. 한국에서 일만 했던 스물한 살의 나이는 외국에서 뭘 봐도 들뜰 수밖에 없었다.
이젠 어디로 갈까. 아, 눈을 돌리니 건너편 산책로가 좋았다. 싱그러운 초록 내음을 맡으며 그 길을 걷다 보니 곧 노점거리가 펼쳐졌다.
헌 책과 오래된 LP판, 그림, 엽서들을 파는 곳이었다. 조용히 그것들을 구경하던 수아는 바로 옆 작은 카페 앞에 섰다.
“아, 커피…….”
느긋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커피 한 잔이 절실한데, 그리 비싸지도 않은데, 선뜻 지갑을 열 수가 없었다.
점심 겸 저녁으로 7유로를 넘겨서는 안 됐다. 프랜차이즈 햄버거밖에 사 먹을 수 없을 거였다. 밖에 있는 카페 메뉴판을 보고 잠시 고민하던 수아는 꾹 참고 길을 걸었다.
이준도 그 길에 있었다. 그녀 뒤에서 ‘아, 커피…….’ 세 음절만 들었는데도 한국 사람이라는 확신이 섰다. 국적이 같다는 걸 알게 되니 왠지 가까워진 것 같다.
그녀는 아까 그곳에서 얼마나 오래 울었을까. 지금은 기분이 나아졌을까. 계속 마음이 쓰였다. 여자의 마음이 이리도 궁금해지긴 처음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냥 가 버린다. 한 잔 사서 건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준은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을 좀 더 감상한 후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고서점으로 가는 길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맞은 편 산책로에 줄줄이 위치한 것들이다 보니, 산책로를 곧장 걷고 있는 수아와 동선이 겹치고 있었다.
이준은 당대 최고 문학가들의 아지트였다는 고서점에 발을 들여놓았다.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풍겼다. 깨끗한 최신 서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가 멋스러웠다.
그 시간 수아도 고서점에 있었다. 100년이나 된 서점이라고 했다. 2층은 다락방 같았다. 옛날부터 사용해오던 책상, 타자기가 있고, 한 쪽에는 침대도 놓여 있었다.
전설적인 작가들이 드나들었고, 그들이 맘껏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숙식까지 제공했단다.
아, 피아노도 있었다. 낡은 피아노인데 소리가 날까. 조심스럽게 건반 하나를 톡 눌렀더니 소리가 난다. 어머나. 소리도 깨끗하고 좋았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는데 형편이 좋지 않아 배우지 못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이럴 때 한 곡 멋지게 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쉬운 눈으로 피아노 건반을 만져보던 수아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영어로 된 중고서적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들 중에 헤밍웨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보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에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울 줄이야.
문학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헤밍웨이는 알지 않나. 슬며시 웃음이 났다.
반가워요, 헤밍웨이. 저한테 노인과 바다는 꽤 어려웠지만 당신이 작품 속에서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요.
불굴의 의지와 집념. 인간에게 그런 것들이 있는 한, 결국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려 한 것이죠? 거대한 청새치와의 사투를 통해서 말이죠.
수아가 노인과 바다 영문판을 꺼내서 천천히 넘겨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수아가 몸을 돌려 피아노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피아노를 반 정도나 가릴 만큼 체격이 아주 좋은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시작됐다. 캐논 변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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