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지안은 정상적인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일주일쯤은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수아는 정희 이모네 집에 지안을 맡겨놓기로 했다.
떠나는 날 아침. 혼자 잘 있을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지안은 수아의 가슴에 살포시 안겨왔다.
“언니. 사랑해. 내 마음 알지?”
“언니도 지안이를 너무 너무 사랑해.”
조금은 불안하지만 언니를 위해 기꺼이 참으려 한다는 걸 모를 리가. 모진 마음을 먹었나 보다.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안의 눈시울은 붉어지고 있었다.
더 짠해지기 전에 수아는 얼른 정희 이모네 집을 나왔다. 주머니 안에 있는 돈은 프랑스를 여행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
국제 미아가 되는 건 아니겠지? 수아는 설렘과 긴장 속에서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를 타는 것도, 해외를 나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출국 절차에서 혼자 낙오될까 불안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수아는 12시간의 비행 후에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렸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입국 심사를 마쳤고, 이제부터는 계획해둔 대로 움직이면 된다.
파리는 가장 여행하고 싶은 도시로 꼽히는 곳이니, 누군가의 행적을 열심히 검색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가장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와 교통편, 먹거리 등을 알아뒀다.
수아의 여행은 돈과의 싸움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먼 프랑스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공항에 내린 시각은 밤이어서 빵과 물만 사서 게스트하우스로 곧장 갔다. 3인실이지만 혼자였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쥐가 나타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주의문을 본 후 께름칙해졌다.
호텔이 아니니까 이 정도는 각오해야 되는 건가. 여행자들의 후기에도 쥐는 종종 등장했다. 그러니 나도 견딜 수 있어.
수아는 후다닥 씻고 빵과 물을 먹으며 창가를 바라봤다.
“우와…….”
밖으로 보이는 야경에 감탄이 나왔다. 파리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에펠탑이 보인다더니.
좀 먼 곳이었는데도, 우뚝 솟은 에펠탑이 보였다.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아, 너무 예쁘다…….”
가슴이 뛰었다. 정말 파리에 오고 만 것이다. 한참 동안 창가에 달라붙어 있어도 지겹지 않았다.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쥐가 나오는 방이라고 해도 지금 나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일들이 차례대로 일어났다. 다가올 미래가 꽤 밝을 거라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무사히 파리 여행을 마치고 사랑하는 지안에게 돌아갈 수 있기를.
수아는 반짝이는 불빛들을 아로새기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파리는 한국보다 7시간 빨랐다. 한국이라면 한낮인데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 시간쯤 뒤척였을 때.
찍찍찍~ 찍찍찍~!
천장에서 쥐들이 몰려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군단이었다.
“으으읍…….”
수아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제 입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다. 다른 방에 있는 여행자들의 잠을 깨워서는 안 됐다.
삭삭삭, 삭삭삭삭. 이빨로 뭔가를 갉는 소리도 들렸다. 천장에서 방으로 쥐가 툭 떨어지는 건 아닐까?
수아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천장을 노려봤다.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청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쥐 소리 때문에 몇 시간을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있었는지 모른다.
수아는 동이 틀 무렵 제 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두 시간쯤 곯아떨어졌다가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첫날부터 제대로 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었다.
조식을 준다고 했기에 간단하게 세수를 한 후 주방으로 갔다. 식탁 위에는 빵 세 가지와 쨈, 버터, 요거트, 오렌지 주스와 포도가 놓여 있었다.
이게 어디야. 수아는 서둘러 식탁에 앉아 빵에 쨈과 버터를 발라 욱여넣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해외이다 보니 공복이 찾아올까 봐 두려웠다.
수아는 주스와 함께 배를 든든하게 채운 후 시내로 나갔다. 마음이 좀 들떴다. 눈을 두는 곳마다 수백 년씩 된 건물이었다.
사람과 동물들만 죽고 태어나고, 이 도시는 그대로다. 도시에 수천 개의 눈이 있어서,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품을 파는 가게들도 쭉 나왔고, 크고 작은 골목마다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엄마야!”
깜짝 놀란 수아가 오싹해진 가슴을 쓸어내렸다. 파리는 주민보다 쥐가 더 많다고 하더니.
너무 커서 고양이인 줄 알았잖아……. 어디서든 튀어 나오는 이놈의 쥐만 안 보이면 좋으련만.
잠시 후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했다. 수아가 프랑스에 온 이유는 이곳에 있는 그림 한 점 때문이었다.
역시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이어서 관광객이 아주 많았다. 사람들은 루브르의 상징인 삼각유리 피라미드에서 사진을 찍느라 저마다 분주했다.
역사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라 흐를 수밖에 없는 걸까. 루브르 박물관은 다른 나라에서 약탈해온 문화재들을 버젓이 전시하면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비양심적인 면모를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장사를 하고 있어서 어쩐지 씁쓸했다.
이곳에는 제일 비싼 작품인 <모나리자>가 걸려 있는데, 모나리자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구름떼 같은 사람들에 휩쓸려 다니며 그림을 감상해야 된다나.
수아의 목적은 모나리자가 아니었기에, 보고 싶은 작품의 위치를 알아본 후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빨라졌지만 마음은 가라앉고 있었다. 드디어, 그림을 찾았다.
귀도 레니의 작품.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었다.
이 그림을 보려고 프랑스 파리에 온 것이다. 수아는 책으로 수없이 봤던 작품 앞에서 전율했다.
“하아…….”
여러 감정이 뒤섞인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검회색 배경 속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사형장에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던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본 귀도 레니가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세상을 떠나던 때가 스물 둘이었으니, 수아와 또래였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그림은 400년이 훌쩍 흘렀건만 그녀의 슬픔과 절망이 진하게 느껴졌다.
당연하지만 그림을 만져서는 안 됐다. 수아는 허공에 손을 뻗어 그림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
이준은 루브르 박물관 앞이었다. 건축 설계가 일이라, 일 년에 두세 번은 꼭 시간을 내서 해외를 다니며 건축물을 감상한다.
역사 깊은 문화재를 보는 것이 영감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되어서다. 루브르 박물관은 세 번째였다. 작품의 수가 30만점이나 되다 보니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많았다.
이준은 천천히 인파 속을 걸으며 작품을 감상했다. 그러고 있는데 엄마 안나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왜요.”
-넌 엄마한테 항상 왜라고 해야 돼? 꼭 할 말만 해야 될 것 같잖아.
이준은 엄마 안나희가 제발 아버지와 이혼하기를 바랐다. 언젠가는 망할 집안이라고 확신했다.
“파리에 왔어요. 용건만 얘기하세요.”
-아, 바쁘구나. 그래. 용건만 말할게. 경인일보가 우리 그룹에 우호적이지 않은 거, 너도 알지?
“알아요. 근데 왜요.”
-경제부 사건담당 박성주 기자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 같아. 낯선 전화 받지 마.
“무슨 일인데요?”
나희는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서한이, 이번에 이혼할 것 같아. 너희 형수 얼굴뼈가 내려앉았어. 강서한한테 맞아서.
“…….”
이준의 얼굴이 된통 찌푸려졌다.
“미친놈……. 그 새끼가 형수한테 주먹을 휘둘렀다구요?”
-한두 번이 아니었나 봐. 눈이 잘못됐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안구는 함몰되지 않았대. 미친놈이지, 정말.
그놈의 주먹을 제대로 맞으면 여자와 남자 가릴 것 없이 안면골이 부서질 수도 있다.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지만 형수는 심성이 고운 사람 같았는데 어쩌다가…….
참담하고, 원통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준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일부러 돈 없고, 빽 없는 여자를 데려온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악마 같아.
“…….”
-몇 달 전에는 골프채로 하청업체 사장을 때려서 반쯤 죽여 놨나 봐. 너희 아버지가 돈으로 언론을 틀어막긴 했는데, 새어나갈까 봐 조마조마해. 어쩜 그런 인간이 다 있니…….
“…….”
-하여튼 낯선 전화는 받지 마. 응?
“네. 이만 끊죠.”
개자식.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다. 벼락을 맞아서 목숨이 끊어지면 좋으련만. 그 인간이 이복형이라는 사실을 제발 끊어내고 싶다.
소름이 끼쳤다. 내 핏줄에 그런 난폭함이 숨겨져 있단 말인가. 왜 파리에서까지 그 인간의 소식을 들어야 되는지 짜증이 났다.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넌 인간도 아니야. 제발 뒤져. 죽어 버려…….
그 새끼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이 엿 같을 예정이었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이준은 한참 동안 씩씩거렸다. 그림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 돌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불쑥 무언가에 홀린 듯 이준이 멈춰 섰다. 순간 몸에서 분노가 쑤욱 빠져나갔다. 폭발할 것 같던 열 덩어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가녀린 어깨를 떨고 있는 한 여자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떤 그림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마치 그 그림이 누군가의 무덤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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