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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95)

<33화>

퇴근길이라 차가 많았다. 쌩쌩 달릴 수 없는 도로 사정상 부딪치는 순간 중상은 아니겠지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충격은 꽤 있었다. 차에 툭 부딪치고 그 반동 때문에 도로에 몇 바퀴 굴렀다. 윽, 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 만큼 온몸에 둔탁한 통증이 박혔다. 

그나마 격한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기에, 이 정도의 강도는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턱을 꽉 물고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머리에 뇌진탕이 일어난 듯했다. 머릿속이 번개를 맞은 것처럼 뒤죽박죽되면서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이 물결쳤다. 

번쩍, 번쩍, 모든 기억이 섞이다가, 밀물처럼 밀려오기를 반복했다. 서너 살 때의 모습이 떠오르고, 대학교 졸업식도 보였고, 최근에 꾸었던 꿈들까지. 

그러다가 사라졌던 파리에서의 기억이 기적처럼 스며들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모든 게 기억나버렸다. 

격투기에서 완패를 당한 것처럼 몸 전체가 욱신거리는데도, 이준은 건방진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지냈어?”

“…….”

“안녕, 애니.”

“…….”

수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기도하느라 도로에서 무릎을 꿇었던 수아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

이준은 일단 구급차에 의해 병원에 실려 갔다. 수아는 병원에 따라와 보호자처럼 그의 옆을 지켰다. 

이준이 CT를 찍으러 검사실로 들어갔고, 수아는 그 앞에서 기다렸다. 붉어진 눈시울로 손톱을 물어뜯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하필이면 그가 뛰어들 건 뭐야. 빨간색 불을 초록색 불로 착각할 건 뭐냐고. 왜 나를 구한 건데. 내가 다치게 놔두지 그랬어……. 

기억이 돌아온 건 어떡하지? 더 이상 잡아뗄 수도 없다. 

수아는 병원에 온 사람들 가운데 오십대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젊음이 싫었다. 건강한 몸뚱이만 가진 젊음은 무기력하고, 미약하지 않은가. 쉽게 유혹에 흔들리고, 마음이 아프고, 불투명한 미래에 가슴 졸이는 게 싫다. 

저 나이가 되면 사는 게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20대보다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들은 세월의 풍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노련한 기술을 갖추고 있을 것만 같다. 

몸도 마음도 허기가 지는 20대가 빨리 지나갔으면 싶었다. 

오랫동안 비를 맞고 있는 것이리라. 언젠가는 무작정 쏟아지는 비를 맞지 않아도 되는, 가끔은 운 좋게 비를 피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잠시 후 그의 검사결과가 나왔다. 찰과상, 타박상 정도였고, 골절은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지금도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미안한데. 

사고차량의 주인과는 대충 인사를 끝냈다. 어차피 무단횡단이어서 치료비는 그가 전부 해결해야 했다. 

저 때문에 다치셨으니까 치료비는 제가 내 드릴게요. 라는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어서, 비참하고 또 비참했다. 

병원에서는 그에게 입원을 권했으나, 이준은 곧바로 퇴원하겠다고 했다. 걱정이 된 수아가 예민한 목소리를 냈다. 

“입원하세요. 내일이라도 몸이 크게 아플 수 있어요!”

“시간 없어. 누구 결혼이 한 달도 안 남아서.”

“…….”

기가 막히는데, 뭐라 말해야 될지 몰라서 수아는 벙찐 표정이었다. 피로 얼룩진 수아의 손바닥이 이준의 눈에 띄었다. 

“거긴 왜 치료 안 받았어?”

이준이 수아를 구하느라 인도로 밀치면서 생긴 상처였다. 수아는 황급히 손을 뒤로 감추었다. 

“아, 저는 괜찮아요…….”

이준이 무서운 얼굴로 버럭 화를 냈다. 

“안 괜찮잖아! 피가 나는데!”

“…….”

“따라 와.”

“…….”

수아는 억지로 이준의 손목에 이끌려 응급실로 갔다. 간호사가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른 후 반창고를 붙여줬다. 옆에 있던 이준이 간호사에게 물었다. 

“흉터 안 남을까요?”

“이 정도면 6개월은 지나야 흉터가 사라질 것 같네요.”

“하…….”

그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본인은 더 많이 다쳤으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가 죽은 후로 내 몸이 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것 같아서 잠깐 울컥했다. 

애정결핍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순간이 나에게도 필요했을까. 목안이 자꾸만 뜨거워져서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분명히 행복한 느낌인데, 몸 전체가 조용히 떨리는데, 이런 기분에 자주 휩싸인다면 너무나 슬퍼질 것 같았다. 

치료를 받은 후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그가 도로 위에 쓰러져 있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불안한 수아가 이준을 가로막았다. 

“진짜 괜찮겠어요? 입원 안 해도?”

“걱정은 돼?”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차에 치었는데!”

“그때 강서한이랑 사귀고 있었어?”

“…….”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 돌아와서, 수아는 호흡을 골라야 했다. 

“아니요.”

그의 기억이 되돌아 왔고, 이제는 또 다른 거짓말 게임을 시작해야 했다. 이준이 수아를 매섭게 노려봤다. 

“왜 멋대로 떠났어?”

“…….”

수아는 냉랭한 말투로 대답했다. 

“다시 만나는 건 싫어서요.”

“…….”

이준이 크게 실망한 듯 미간을 좁혔다. 

“외국이어서 감성적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끝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한국까지 와서 엮이고 싶진 않았어요.”

“나만 착각했었구나? 나만 너한테 빠진 거고. 하아.”

이준이 차갑게 비웃었다. 프러포즈까지 했었다. 3일이지만 매일 같이 살자고 졸랐었는데, 나만 좋아했었다고? 나한테 보여줬던 그 웃음 뒤로, 너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배신감에 절은 이준이 빈정거렸다. 

“누가 들으면 밥 먹듯이 원나잇 하는 여잔 줄 알겠네.”

“…….”

“너, 내가 처음이었잖아.”

“…….”

수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짓말이 또 먹히지 않고 있었다. 

“처음으로 잔 남자랑 끝을 내는 게 그렇게 쉬웠다고? 네 처음을, 그냥 아무 개한테 던져준 거야? 외국이었으니까?”

“…….”

이준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갔고, 수아는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어. 널 어떻게든 찾아낼 생각이었고.”

“…….”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내가 기억을 못한다고, 너는 안심했겠지. 하.”

“…….”

이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나를 약혼식장에서 만났을 때, 넌 결혼을 엎을 생각을 했어야 해.”

“왜요.”

그가 구겨진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왜라는 말이 나와?”

“…….”

노려보는 눈빛 때문에 숨이 막혔다. 그가 피할 수 없는 뚜렷한 진실을 꺼내들었다. 

“형수가 시동생이랑 붙어먹은 전적이 있잖아. 약을 잘못 처먹고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3일 밤낮으로 말이야.”

“…….”

적나라한 표현에 잠시 멍해졌다. 1년 전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고스란히 펼쳐졌지만 수아는 잡아떼야 했다. 

“다 지난 일이잖아요. 그걸로 사람 발목 잡을 생각이에요?”

“그래서 끝까지 결혼하겠다고?”

“네. 누가 말려도 전 결혼할 거예요.”

까칠해져 있는 이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하지 마. 이복형이라도 가족으로 묶여 있는데, 너랑 내가 앞으로 볼 일이 없을 줄 알아?”

“보면 어때서요? 강이준 씨가 불편한 모양인데요, 저는 하나도 껄끄럽지 않아요.”

“…….”

수아는 고집스럽게 눈을 떴다. 난 이 결혼이 반드시 필요하단 말이야.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네. 사람을 잘못 봤어, 내가.”

“…….”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게 나을 뻔했어.”

“…….”

울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그냥 감정이 없는 인간이어야 했다. 그가 여러 차례 쌕쌕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강서한 재혼인 거 알지? 전처랑 뭐 때문에 헤어졌는지 알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성격차이 아니야.”

“뭐라도 상관없어요.”

“폭행이야.”

“…….”

폭행이라는 말에 움찔 몸이 떨렸다. 여자가 강서한의 주먹에 맞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상상하게 됐다. 한참 만에 숨을 조용히 내려놓은 수아가 겨우 입술을 떼어냈다. 

“말리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결혼할 거니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

이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수아는 몸을 돌렸다. 몇 걸음 떼어내는데, 그가 등 뒤에서 으르렁댔다. 

“씨발, 맞아서 얼굴뼈가 내려앉았다고!”

“…….”

수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금이 최악이구나 했는데, 더한 상황이 남아 있을 때. 신이 나를 버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면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도 견딜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치러야 하는 벌이니까. 

수아는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걸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야 했다. 시동생과 붙어먹고 형과 결혼하려는 여자이므로, 소름 돋을 만큼 뻔뻔하게 보이는 게 나았다. 

이준을 두고 병원 밖으로 나온 수아는 사람이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골목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쪼그려 앉은 수아가 입을 틀어막고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1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의 온도, 바람에서 묻어나던 향기, 햇살이 피부에 닿던 느낌, 이 남자가 처음으로 다가왔던 순간 빛이 어떤 모양으로 부서졌는지. 

나는 파리에서의 모든 순간을 영원처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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