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95)

<32화>

목이 꽉 멘 수아는 힘겹게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혼자였어요. 여행 중에 누구도 만난 적 없어요.”

수아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지하철이 출발했다. 이준이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자, 수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슥 훔쳤지만 이내 투명한 물기가 볼을 적셨다.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가 기억이 돌아와 버리면 그땐 어떡하지? 세상이 나를 버린 건가. 정말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밤이 찾아왔다. 오늘따라 지안은 유달리 수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슴푸레한 달빛에 지안의 머리카락과 뺨을 만지며 선잠이 들었다가 또 다시 악몽을 꾸었다. 

수아는 절벽 끝에 매달려 있었다. 아파트 20층 높이만큼 아찔한 절벽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동아줄 하나를 붙잡고 있는데 손에서는 꽤 많은 피가 배어났다. 수아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안에게 부탁했다. 


“언니 좀 살려 줘, 지안아……. 사람 좀 불러 와…….”


지안이 차가운 눈빛을 띠며 앙칼진 목소리를 냈다. 


“살고 싶어?”

“…….”

“언니도 살고 싶을 때 죽어 봐.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


수아는 동아줄을 놓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충격으로 수아의 목 경추가 끊어졌고, 수아는 몇 초 만에 의식을 잃었다. 

새벽녘에 잠을 깼을 때는 어둠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시각이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지독한 외로움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어쩌면 죽음과 가까워진 듯도 했다. 

서늘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수아는 달을 보며 파리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유일하게 따뜻하고 행복했던 시간……. 이내 수아의 속눈썹이 물기로 젖어들었다. 

***

여기가 어디지? 미술관인 듯하다. 


어느 동양인 여자가 그림 앞에서 울고 있다. 관광객들은 그녀를 힐긋거리다가 지나간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아파도 내지르지 못하는 신음처럼 가느다랗다. 천사가 눈물을 흘리면 저런 모습일까.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보석처럼 빛난다. 


그녀는 왜 울고 있을까. 왜. 그림 때문인가. 그녀가 울고 있는데, 내 가슴에 눈물이 고인다. 타인의 슬픔이 날 것처럼 생생하게 들어와 박히기는 처음이다. 


저 서러운 울음을 닦아주지 못해 내가 아프다. 몸이 꼭 붙어서 태어난 샴쌍둥이도 아니고, 우리는 개별적 자아이건만, 그녀의 울음이 내 안으로 쏟아진다. 


그 눈물이 따뜻한 빗물처럼 고여서, 내 목안을 꽉 틀어막는다. 이 이상한 느낌은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고 뛰어넘는다.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그림이 누군가의 무덤인 것처럼 운다. 


점점 더 서러워지는 울음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가 티슈를 건넬 수도 없다. 이토록 한 여자의 얼굴이 강렬하게 새겨지는 것도 처음이다.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문득 이 생소한 느낌이 두려워진다. 하지만 발걸음은 붙박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뗀 적이 없는데, 그녀는 어느새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칼이 꽂힌 듯 가슴 통증이 급습했다. 

“하아…….”

이준이 잠에서 깨어났다. 꿈을 다시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윤수아가 울고 있었는데. 거기가 어디지? 왜 울고 있었을까. 그녀를 처음 만났던 곳인가……. 

***

“매니저님. 제가 재고정리 할게요.”

“이번에도? 아니야. 무거운 것도 많은데 내가 할게.”

“제가 정리하는 걸 무지 좋아한다니까요.”

“미안해서 그러지.”

“아니에요. 저한테 맡겨주세요.”

수아는 다른 직원들이 꺼려하는 일을 맡고는, 창고로 들어갔다. 시름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혼자 무거운 박스를 옮기고, 뜯고, 개수를 세고 하기를 두 시간째. 단순한 노동임에도 머릿속은 단순해지지 않았다. 

어제 들었던 고백이 마음속에서 끝없이 출렁거렸다. 잔잔한 파도가 되어 철썩였다가, 해일처럼 큰 형태로 되어 가슴을 삼키고 들쑤셨다. 

윤수아, 그래서 네가 흔들려봤자 뭐 어쩔 건데.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그때 매니저가 문을 빼꼼 열었다. 

“수아 씨. 퇴근 시간 지났는데? 빨리 퇴근해.”

“아, 벌써 그렇게 됐네요. 퇴근할게요.”

“그래, 수고했어. 수아 씨.”

수아가 백화점을 나오자마자 강이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어디서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시죠?”

-해외에 가본 적 없다는 거짓말은 왜 했어요?

“그건 분명히 말씀 드렸잖아요. 약혼식 날 정신이 없어서 말을 길게 섞고 싶지 않았다고.”

-루브르 박물관에 갔었죠?

“…….”

훨씬 구체적인 질문이어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파리에 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루브르 박물관에 가지 않나요?

-갔다는 뜻이네. 그리고, 거기서 울고 있었고.

“…….”

뭐, 뭐지? 수아의 숨이 파들파들 흩어졌다. 일부라도 기억났을까. 아님, 꿈인가. 꿈에서 만난 나를 좋아하게 됐다고……. 어쨌든 확실하지 않으니 확인하려 하는 거겠지…….

일단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봐야 했다. 

“소설 쓰시나 봐요. 그런 적은 없어요.”

-내가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서 지금 딱 돌기 직전이야.

“이봐요! 심증만 믿고 행동해서는 안 돼요. 어리석어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면 어쩌려고 이래요?”

-이미 돌이킬 수 없어. 당신이 내 꿈에 나타난 게 1년 전이니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꿈속의 여자는 내가 아닐 거예요.”

-당신이야. 확실해. 

“아니요. 당신이야말로 정신병자 같은데요.”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끌고 가서 거짓말탐지기 앞에 데려다 놓고 싶은 심정이야.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길거리에서 발악할 수는 없었고, 수아는 화가 나서 말을 꾹꾹 눌러가며 따지고 들었다. 

“하, 제발 망상에서 벗어나시죠! 당신은 미쳤어요! 형수가 될 사람한테 이래서는 안 되는 거 몰라요? 내가 어려서 만만해요? 나한테 도대체 뭘 원하는 건데요?”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강이준이었다. 

-널 원해. 

“…….”

손목을 통해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한 눈에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은 날이 바짝 서 있었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해.

“…….”

수아는 그 눈을 또렷하게 보며 비웃음을 지어야 했다. 

“……진실? 당신은 형의 여자를 갖고 싶어 하는 미친 욕망에 사로잡힌 거예요. 당신은 사악해요. 악마라고.”

-…….

“이것 놔!”

-…….

수아가 이준의 손목을 홱 뿌리쳤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달려야 했다. 수아는 바로 앞에 있는 횡단보도로 뛰었다. 

횡단보도는 명백한 빨간 불인데도, 횡단보도 뒤쪽의 초록색 간판 때문에 수아는 초록불로 착각했다. 

빵빵!! 끼이이익~~~!!

그때였다. 이준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수아에게 달려갔다. 수아를 인도 쪽으로 밀친 이준이 미처 자신은 피하지 못하고, SUV차량에 툭 부딪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 하, 가, 강이준 씨…….”

수아는 도로 위에 쓰러져 있는 이준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심장이 터져버린 듯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빠진 수아가 엉금엉금 기어서 이준에게 다가갔다. 이준은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어, 어떡해…….”

“하…….”

눈앞에서 벌어진 교통사고에 충격을 받은 수아는 손을 덜덜덜 떨었다. 수아가 눈물을 흘리며 도로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제가 이렇게 빌게요. 

제발 이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해 주세요.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했어요. 

사랑을 이뤄달라는 기도는 한 번도 드린 적 없으니, 이 사람이 아프지 않게라도 해주세요. 

저의 행복을 바란 적 없잖아요. 그러니 이 사람이라도 지켜주세요. 제발……. 

당신이 신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나에게 한 번이라도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준의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수아가 손을 뻗어 이준의 상처를 만지려는데,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이준이 미간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떠올렸다. 수아는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괜찮아요? 왜 그랬어요……. 흑흑…….”

“하아.”

“왜 날 구했어요, 왜…….”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준은 고통 속에서도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힘겹게 웃고 있는 거였다. 보란 듯이. 

왜 이러는 거지.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 

오만한 웃음이었다. 이제 게임이 끝났다고 말하는 듯한 불안한 미소였다. 이준의 입술 사이로 탁해진 음성이 새어나왔다. 

“잘 지냈어?”

“…….”

그 묘한 웃음은 더욱 강렬해졌다. 

“안녕, 애니.”

“…….”

수아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교통사고의 충격으로 이준의 기억이 돌아오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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