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설마, 강이준의 차인가…….
이상한 느낌이 등줄기를 후려쳤다. 서울 시내에 파란색 애스턴 마틴이 한 대뿐인 것도 아닌데, 왜 강이준을 떠올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서한의 숨이 파들파들 흔들렸다. 몸은 링 위에 올랐을 때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영역다툼을 하는 짐승처럼 사나워진 서한은 파란색 스포츠카를 따라 붙으며 수아와 통화를 이어갔다.
“너 지금 어디야?”
-……아, 저 백화점에서 나왔어요. 매니저님이랑 같이 식당으로 가는 중이에요.
“식당? 걸어서?”
-네.
수아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남자한테 끼를 부리는 여자도 아니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는 않을 것이므로 마음을 조금 놓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어차피 내 여자가 될 거니까.
“백화점에서 어디 쪽으로 나왔는데?”
-정문 반대편이요.
파란색 스포츠카는 저만치 가고 있었다. 사이에 다른 차가 두 대 끼어 있어서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서한은 눈을 찡그려 번호판을 보려 했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쓸 정도는 아닌데 시력이 썩 좋은 편도 아니었다. 선팅이 까맣게 되어 있어서 옆 자리에 누가 탔는지 확인도 되지 않는다.
왜 갑자기 망나니 같은 상상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따라붙어서 이준의 차가 맞다면, 저 차를 기어이 세울 참이었다. 옆 사람을 확인해야 했으니까. 서한이 눈을 부라리며 액셀을 밟았다.
수아는 이준의 차 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서한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매니저는 남자야?
“아니요. 여자 분이에요. 저보다 7살 많으세요.”
이준이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수아도 사이드 미러를 확인했다.
서한의 차가 속력을 내서 따라오고 있었다. 이준도 달아나기 위해 부앙, 액셀을 밟았다.
수아는 간이 조마조마해서 수명이 십 년쯤 단축되는 기분이었다. 폰에서 예민한 목소리가 들렸다.
-걸어가고 있는 거 맞아? 바깥 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아, 막 룸 안으로 들어왔어요. 조용한 곳이에요. 매니저님은 화장실 가셨고요.
매니저를 바꿔 달라고 할까 봐 괜히 묻지도 않은 걸 대답했다. 수아는 더 초조해서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
-메뉴가 뭔데.
“초밥이에요.”
가게 이름을 물을까 봐 겁이 났다. 당장 가서 확인을 할지도 몰랐다. 수아는 통화를 마무리하려고 인사를 했다.
“오늘 정말 죄송해요. 서한 씨도 식사 맛있게 하시구요, 나중에 통화해요.”
-…….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게 기분 나빴을까. 얼마간의 침묵 후에 그가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전화는 끊어졌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서한의 차는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수아는 불안해서 이준에게 물었다.
“눈치 챈 거 아닐까요?”
“의심이 많은 건 원래 성격이고, 확신은 못할 걸. 시력이 별로거든.”
“따라오고 있는데 어떡해요…….”
“지금 옆길로 빠질 거야.”
이준이 갑자기 방향을 요리조리 바꾸자, 서한은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멀어졌다. 2,3분간의 아슬아슬한 추격전이 끝났다. 수아는 그제야 심호흡을 터뜨렸다.
***
“하, 씨발! 미꾸라지 같은 새끼!”
파란색 스포츠카를 놓친 서한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운전에는 자신이 있는데, 퇴근 시간이다 보니 차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젠장. 빌어먹을.
“도로도 좁은데 개나 소나 차를 끌고 다니는 게 문제라니까…….”
아무데나 욕을 퍼붓고 싶어서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이준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말까. 평소에 전화 한 통 안 하는 사이인데, 뭐라고 말을 하지? 대뜸 수아랑 같이 있냐고 물어?
“하, 이런 미친…….”
실소가 터졌다.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아무래도 스스로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된다. 아닐 거다. 그럴 리 없다…….
수아는 내성적이고, 이준은 필요한 말만 하는 성격이다. 게다가 두 사람이 따로 말 한 마디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준은 수아를 형수라 부르기 싫어했고, 수아는 이준을 굉장히 불편해했다.
어쨌든 기분도 별로인데, 집에 가서 술이나 거나하게 마실 생각이었다.
빵빵! 갑자기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빵빵!
좌회전 신호에 서 있는데, 신호가 바뀌어도 서한의 차가 움직이지 않으니 뒤에서 경적을 울린 거였다. 서한의 미간이 홱 좁혀졌다. 재촉하는 거 딱 싫은데. 감히 누구한테.
서한은 비웃음을 입가에 띄우고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었다. 빵빵! 빵빵! 서한은 백미러를 보며 조롱했다.
“내가 안 비켜주면 네가 어쩔 건데. 4억짜리 차를 들이받을 거야? 해 봐, 이 개새끼야.”
빵빵! 빵빵빵! 서한의 뒤에 있는 차들은 한 대도 좌회전 신호를 받지 못했다.
이제는 그 뒤에 있는 차들도 줄줄이 클랙슨을 울리며 원성을 보탰다. 서한은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내려서 멱살이라도 잡아 보던가. 겁나서 못하잖아. 씨발 새끼들아.”
***
혼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아직도 단거리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수아는 차안에서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날 말려 죽이려고 환장했어요? 오늘 같은 행동은 미친 짓이라구요! 알아요?”
이준의 음성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아는데 어쩔 수 없었어.”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그만큼 절실해.”
“저도 이 결혼이 절실해요!”
차는 한적한 공원 가까이로 들어서서 정지신호를 받은 상태였다. 화가 난 수아는 제멋대로 차에서 내렸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을 향해 뛰었다.
그래, 꿈은 꿨었다. 당신 꿈을 자주 꿨었어. 꿈꾸는 것마저 죄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젠 꿈마저도 꾸지 않도록 할게. 혹시나 꿈에서 당신을 만난다면 차갑게 당신을 지나칠게. 그러니까 이러지 말아요…….
수아는 정신없이 달렸다. 지하철역이 그리 멀지 않았다. 신께 묻고 싶었다.
이건 네가 받아야 할 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그런데 19살 때의 내가 뭘 선택할 수 있었겠어요? 왜 날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해요…….
Rrrrr~~~ 폰은 몇 번째 울리고 있었다. 지하철역에 온 수아는 무음으로 바꾸기 위해 폰을 손에 쥐었다. 문자가 들어왔다.
[전화 받아.]
[받으라고.]
강이준이었다. 어차피 직장을 알고 있으니 숨을 곳이 없는 쥐나 마찬가지였다. 수아는 쌕쌕거리며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어디야?
“만나고 싶지 않아요. 할 말 있으면 지금 해요.”
그가 주변에서 자신을 찾고 있을 게 뻔했다. 지하철이 오려면 3분 정도 남아 있었다. 수아는 그에게 붙잡힐까 봐 두리번거리며 통화를 했다.
남은 시간은 3분에서 2분. 수아의 심박수가 높아져 있는데, 이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해, 아주 많이.
“…….”
이준이 무작정 뱉어버린 그 말에 수아의 경계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혼자 이 울렁거림을 견뎌야 했다. 그의 고백은 가슴 안에서 끝도 없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어. 앞뒤가 맞지 않는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
-근데 내가 1년 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어. 꿈에서 만난 당신을 아주 열렬하게.
“…….”
지하철역의 소음이 어느새 고요해졌다. 그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릴 만큼 이준의 말이, 수아의 몸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이 말을 안 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
“…….”
파리에서 당신을 떠나면서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당신은 몰라. 나는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나는요, 엄마를…….
수아는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저는 당신의 형수가 될 사람이에요.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무슨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어. 이게 사실이야.
“이런 마음을 품어서도, 입 밖으로 꺼내서도 안 되는 거예요.”
-꺼내버렸어. 마음은 품어버렸고. 이제 어떡할까.
“주워 담으세요. 없던 일로 해야 해요.”
-주워 담을 생각 없어.
“형의 여자한테 이러는 거 아주 몹쓸 짓이에요!”
-몹쓸 짓이라. 하려면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데.
“정말 미쳤어요?”
수아는 지하철이 지금 도착한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때 이준이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수아는 재빨리 지하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금 늦게 수아를 발견한 이준은 미처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아직 출발하지 않은 지하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였다.
이준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짙은 한숨과 함께 나온 질문은 수아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우리가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적 있죠?”
“…….”
눈물이 고인 수아의 눈동자가 처량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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